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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불구경
(민32:1-42)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강 건너 불구경>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강 건너 불구경.
여러분, 요즘 한참 많이 들었던 얘기 중에 하나지요. 그 피랍자들, 탈레반에 의해서 납치된 사람들, 그분들의 석방을 위해서 미국이 노력해주지 않는 점을 탓하는 많은 글들을 접하게 됐었습니다. 그것을 미국이 어떻게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우리나라에게서 군대 파견을 강압적으로 요청하면서 그 동맹국의 국민들이 납치되어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많은 분노의 글들과 소리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 이것이 아주 치명적일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멀쩡하게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 강 건너 불들이 내게로 옮겨 붙을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같이 불을 끄려고 하지 않고 불구경이나 하고 있다가 내가 망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오늘 성경 속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앞부터 읽지 않아서 여러분 혹시 짐작이 안 갈 수 있겠습니다마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야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도력이 이제 끝이 나고 여호수아가 맡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을 도하해서 이제 여리고 성부터 해서 점령해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근데 요단강 동편에서 이미 많은 민족들을 전쟁으로 정복하고 이기고 땅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때 그 요단강으로 여러 개의 지류, 강들이 흘러 들어가는 아주 비옥한 목초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을 본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나와서 간구를 합니다.
우리가 자식도 많고 가족도 많고 또 가축도 많아서 이동하기가 힘든데 가만히 보니까 여기가 아주 좋은 목초지가 아니냐? 그러므로 목축업을 위해서는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는 것 같아 부탁하건데 우리는 여기에 머물도록 허락해달라.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얘기를 듣자 모세가 아주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면서 반응을 합니다. 너희가 또 다시 40년 전의 악몽을 깨우고 있다. 40년 전에 뭐지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그 땅을 혹평해서 이 이스라엘 민족 동족의 마음이 간담이 녹아내리게 만들어서는 완전히 하나님이 약속한 복지를 향한 사기와 의기를 완전히 꺾어놔버렸어요. 그래서 모두가 다 불신앙을 표현하게 만들어서 40년을 광야를 돌게 만들었는데 너희가 또 다시 민족 앞에서 너희는 요렇게 좋은 땅을 차지하고 안정된 생활로 들어가면 다른 동족과 이웃들은 김이 빠져서 우리는 왜 이렇게 같이 싸웠는데 얘네들은 벌써 동쪽으로 땅을 차지하고 서쪽으로 강을 건너서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전쟁을 치러가면서 이 땅을 또 얻어야 되느냐? 하는 그런 불신앙적인 마음, 완전히 마음의 사기가 저하되는 그런 사건으로 너희가 이웃들을 괴롭힐 수 있지 않느냐? 가나안 정복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좌절될 수도 있지 않느냐? 막 야단을 칩니다.
그러니까 이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이에요. 말하기를 이 곳에 우리가 우리를 짓고 집을 짓고 성읍을 보강하고 증축하고 해서 우리의 가족들과 아이들 그리고 가축을 다 여기다 남겨서 살 수 있도록 해놓고는 우리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 남자들은 우리 동족과 같이 강을 건너서 그들이 가나안 복지를 다 차지할 때까지 우리가 같이 싸우고 돌아오겠다. 절대로 우리가 앞장 설 것을 약속하고 그리고 우리 이웃이 우리 동족이 복지를 차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가 절대로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자 모세가 선하게 여겨서 그래, 너희가 만약에 그 말대로 하면 이려니와 그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가 차지하기를 원하는 이 가나안 땅도 차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모세가 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23절) 다시 말해 너희의 동족이 복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같이 돕지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너희가 아무리 요단강 동편에서 강으로 경계선을 잡고 너희만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너희의 죄가 속에서 뚫고 나와서 너희가 가나안 복지의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던 그 삶의 한복판에서 죄가 터져나오고 화가 터져나오고 결국은 너희도 복지를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내용을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아주 중요한 얘기 보통 중요한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지니면서 참 복된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고만 있으면...
여러분이 그걸 안 하고 있어요. 지금... 안 하고 계시는 거예요. 자꾸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서 놓치고 있는 시간이 길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복지, 복된 삶이 이루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자꾸 복을 돈이 있어야 되고 건강이 있어야 되고 자녀들이 공부를 잘 해야 되고 취직을 잘 해야 되고 시집 장가를 잘 가야 되고 이런 것에서 자꾸 찾으려고 하지요?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근데 정말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면서 내가 그렇게 죽었다는 그 사실 하나, 그러니까 나를 기억하라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계시된 나의 모습. 그렇게 까지 내 정말 적나라한 모습을 계시하기 위해 주님이 돌아가신 그 사랑의 사건을 기억하기만 하면 복지가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의 현실이 바로 그런 현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단한 사업가가 되었다는 얘기도 아니고 자녀들이 무슨 로마정부의 관리가 되었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그러나 행복했고 그러나 정말 복된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자, 근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이 스테반 집사 순교를 기점으로 해서 핍박을 가하실까요? 초대교회에? 왜 핍박을 가하실까요?
절대로 그렇게 초대교회가 자기 예루살렘 교회로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대 그 복된 삶이 유지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지금도 그 복된 삶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죽고 부활함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이런 한 복된 삶을 나는 살고 있는데 아직도 내 옆에 이웃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삶을 계속 살아갖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웃들에게로 향할 수 있도록 강권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흩어버리십니다.
교회가 나빠서가 아니에요. 교회가 잘못 되어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하듯이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버리시고 마십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 예루살렘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교회가 어디로까지 들어가냐? 빌립 집사같은 경우 사마리아 사람 동네까지 들어갑니다. 사마리아가 어떤 곳입니까? 개라고 취급했던 사람들, 더럽다고 취급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까지 어쩔 수 없이 피신해서 들어갑니다. 그래서 거기서 전도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지의 확장의 역사가 일어나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예를 이렇게 들어봐요. 제가 언젠가 말씀을 드린 것 같아요. 미국에 머물 때 들은 이야기에요. 교포 자녀 넷이서 지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 중에 그때 사고로 죽은 아이의 한 어머니를 만났는데 죽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저한테 죽은 그 당시의 얘기를 하시면서 울어요. 또 울어요.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근데 두 아이는 같은 교회를 다니던 교인의 가정의 아이였고 두 아이는 교인의 가정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교인이 아닌 그 아이가 운전면허를 따고 어머니의 차를 몰래 갖고 나왔던 것이에요. 근데 거기에 동승했다가 죽었습니다. 근데 그 운전한 아이는 안 죽었어요. 나머지 세 아이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죽은 아이의 엄마가 더 억울한 거예요. 그렇다고 그 산 아이에 대해 원망할 수도 없는 거고. 다행 아닙니까? 남의 아이라도 산 것이 다행이지만 그러나 내 마음에는 속이 상한 거예요. 이게 속아 상한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정말로 그 마음의 아픔을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래서 한참 얘기가 진행 중에 할 말이 없었는데 한참 얘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어떻게 제가 말하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가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 안 다니는 아이들을 전혀 모르는 아이냐? 그랬더니 안대요. 집에도 자주 놀러왔고 했었다는 거예요. 아, 그러냐고. 그러면 그 교회 안 다니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본 적이 있느냐? 했더니 가만히 계세요. 없다고. 아이, 그러면 집사님 안 되시잖아요. 내가 그랬더니 무슨 말씀인 줄 못 알아들으세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만나고 있는 친구들. 지금 부모인 나보다도 많은 시간을 그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속에 이 세상의 악한 영과 이 세상의 악한 기운이 가득히 들어와서 그 아이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내 아이를 지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무슨 수로?? 운전하는 믿지 않는 그 아이를 늘 내 아이와 같이 다니는 그 아이를 위하여 같이 기도하고 내 아이만큼이나 같이 기도해주지 않았다면 그 아이와 같이 지내고 있는 내 아이를 어떻게 지키겠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얘기 아닙니까? 그 아이가 지켜질 수가 없고 그 아이가 하나님의 보호아래 없는 아이라면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아래 없는 아이가 이끄는 자동차 그 하나나님의 보호아래 있지 않는 아이가 가는 그 길을 내 아이가 같이 따라가고 있는데 어떻게 내 아이를 지키겠습니까?
오늘 하는 얘기에요.
너희 이웃이 복지의 삶을 마련하고 있지 못한데 너 혼자만 강 동편에서 복지의 삶을 마련할거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내 이웃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의 이진법의 원리를 전혀 몰라서 이 세상의 짐을 다 지고 맨날 자식과 싸우고 남편과 싸우고 아내와 싸우면서 가정이 편할 날이 없고 돈이 없다고 세상 무게를 다 지고 완전히 burn-out 되고 있습니다. 탈진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복지의 삶을 얻었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를 둘러싼 이웃의 가정이 세 가정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세 가정을 통해서 세상의 불길이 들어오고 세상에 의해서 먹혀버리고 그들이 burn-out 타고 있어요. 세상의 풍조에 타고 있다고 하면 나 혼자서 견디기 어려울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공격적으로 나가야 돼요.
어떻게? 자,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나 자신이 복지를 찾을 때는 세상 모두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이웃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자식과 내 가족에 대해서도 죽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서 복된 은혜와 사랑과 필요한 모든 것들이 마음에 주어지게 되고 내가 평강해지고 내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이 행복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뻗쳐나가야 돼요. 나가지 않으면 몰려들어오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내가 지켜야 된다는 것을 내 이웃들의 심령이 복음으로, 주님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이진법 원리로 그들도 그들의 삶에서 복지로 회복되고 지켜지기 전까지는 나의 복지가 위험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이웃이 복지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상한 일이 있어요. 내가 혹시 흔들릴 때라도 그 복지가 지켜주는 거예요. 이웃들이 와서 말합니다. 아유~ 나한테 그랬잖아. 자기가 아이들 공부 못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며? 나는 그렇게 살고 있어. 우리 아이가 공부를 못했거든?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하더라구. 이런 말을 이웃에게 들을 때 내가 강화되는 거예요. 아이구, 그래 맞았어.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하나님이 시킬거야. 아무려면 나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하지. 그 아이 인생이 행복하기 위하여 공부가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걔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될 텐데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마음을 다 잡으면서 아이와의 관계에 복지를 유지해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어에 interest 흥미, 관심 이런 뜻 아닙니까? 또 동사로도 사용되잖아요? 흥미를 끌다 이런 식으로. 근데 그 inter 라는 말과 est 라는 말이 합성된 겁니다. 라틴어에서 나온 말인데 라틴어에서 est라는 말은 be동사에요. 영어의 be동사 독일어의 sein동사와 같은 것인데 est는 sum(영어의 be 동사)동사의 현재형 단수 3인칭입니다.
그런데 왜 inter와 est가 합쳐졌냐?
intercity 하면 뭡니까? 도시와 도시 사이를 말합니다.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ICBM) 하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 interest, 관심이라는 것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뜻이에요.
존재와 존재 사이에 다리가 끊어지지 않습니까? 오늘 요단강으로 막혀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둘 다 망한다는 것이에요.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강을 넘어 다리를 놔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살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는 한 모두가 다 되받게 되고 여기 뭐라고 그래요?
23절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이웃의 복지가 마련될 때까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그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로 알라.
그러니까 이웃들만 죄 속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너희 속에 들어와서 너희를 움켜쥔다는 겁니다. 불행과 어떤 재난과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으로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점령해버린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사실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근데 그러한 삶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또 베드로가 설교는 했어요. 그러나 거기서 그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고 하는 거 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죠? 결국은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흩어져버리고 말아요. 복음을 받았으면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들어갔었어야 되지요. 근데 강압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살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복음을 받았으면 사람을 볼 때 관심을 이렇게 보면 돼요. interest, 존재와 존재 사이에 우리가 다리를 놓고 건너갈 수 있는 상황이 되고 그래서 내 복지가 지켜지는 거예요.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보느냐? 이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그 사실,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관점으로 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업하는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런 관점으로 보는 거예요. 사업에 대해 임하는 이 사람의 마음가짐이 자기가 십지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엄마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엄마가 도대체 자식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심지어는 어떻게 보느냐? 우리가 집에서 가족들끼리 이야기할 할 때도 부부간에 또 부모님과 자녀와 함께 이야기할 때 지금 우리 아이가 이 아이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까 모를까 이 관점으로 보라는 거예요.
지금 선교회에 참여하시면서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평화를 누리고 샬롬을 누리는 부모조차도, 내 그 부모님들에게 물어봐요. 여러분들이 지금 자녀를 볼 때 우리 아이가 자기가 십자가에서 이천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관점으로 아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적용하는 것까지는 되는지 모르렜어요. 근데 아이들에게는 너희가 지금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어하고 그 아이가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게 뭐예요? 아이의 복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세상이 말하는 잘 사는 방법을 아직도 적용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요단강으로 막혀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식 앞에서 복지를 회복하라고 얘기를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자꾸 뒤집어져요. 나 혼자 있을 때 행복하다가도 자식 앞에서 자식이 조금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또 뒤집혀져요.
왜 그래요? 나 혼자 복지로 살 수가 없어요. 왜 자식에게 네가 십자가에서 이천년 전에 죽었다 라는 말을 왜 못하는 겁니까? 왜 안 하는 겁니까? 계속 자식에게는 공부 잘하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하도 태목사가 얘기하니까 공부 잘하라는 소리도 마음 놓고도 못하고 속으로 아이구! 저거 공부 잘해야 될 텐데... 내가 공부 잘하라는 말은 못하고 이거 죽겠네... 공부 잘하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에 대한 관심 이전에 하나님에게 먼저 마음을 다 드리기 위해서 아이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는 이야기지요. 초점이 거기 있는 게 아니지요.
그렇게 했으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얻고 행복함을 느꼈다면 아이에게도 “네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걸 알고 그렇게 생활을 해라” 이렇게 가르쳐야 되는데, 나는 평안을 얻은 다음에 그 다음에는 아이에게 가만히 놔두거나 아니면 아이가 공부를 하나 안 하나... 이건 죽은 게 아니라 벼르는 거예요. 십자가를 붙잡고 벼르는 거예요. 한 열 번 정도 벼르다가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너 정말 엄마가 언제까지 참아야 되냐?” 참기는 벼르는 거지요. 죽어야 될 사람이 벼르고 있어요.
자식을 바라볼 때도 그런 관점으로 보라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interest. 관심이 진짜 참된 관심이라면 복음적인 관심, 내 남편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나 모르나 이 관심으로 보다보면 내 마음에 있는 복지가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가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이러면서 내 복지가 지켜지는 거예요. 이게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그런 관점으로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복지를 심어주지 않으면 복지를 소개해주지 않고 십자가를 소개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뒤집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 십자가와 관계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 나가서 한번 연습해봐요.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이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아나 모르나, 주님이 대신 죽으신 사실을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나. 받아들인다면 이 말을 할까 안 받아들인다면 이 말을 할까 이런 관점으로 사람과 만나서 대화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점점 더 복지가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2007.09.10)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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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