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묘지 문제
『稼亭集』에는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게 마련이니, 이는 인간의 상리(有生必有死 人之常理也)”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고, 앞으로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이 죽음은 잘났든 못났든 돈이 많든 적든 간에 피해갈 수 없는 필연의 문제이다. 그래서 『簡易集』에는 “삶도 죽음이요 죽음도 삶(生亦死 死亦生)”이라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풍수는 발복론을 더해서 음택풍수라는 하나의 풍수영역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음택풍수에 의한 길흉화복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무용론까지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풍수인들은 여기에 적절한 대응논리를 제시하는데 실패하였고, 오히려 풍수 자체가 설자리조차 잃어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과 죽은 이후의 사후 문제는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풍수적인 동기감응론의 신뢰여부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사후의 일은 죽은 자가 처리할 수 없으니, 모두 산 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산자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만 우리 사후의 문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유교의식으로 무장하는데 그치고 않고, 효 사상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다. 이를 『霞谷集』에는 “제사를 지내서 신(神)을 감격(感激)시키는 것과, 음덕(陰德)이 보은(報恩)을 하게 하는 것 그리고 지극한 효도(孝道)가 감동시키는 것은 역시 같은 것”이라 하였다. 더 나아가 동기감응론을 바탕으로 한 발복론까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였고, 후손들에게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을 넘어 확신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사후를 제대로 대우받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부모의 사후를 잘 처리하고 그것을 보고 배운 자식도 당연히 자신의 사후를 잘 처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의 실천적인 모습이었다. 이는 곧 자신의 사후를 보장받는 지름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새 생명의 탄생에는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지만, 부모의 노후와 사후에 대한 지출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공부만 잘할 것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더 나아가 때리고 죽이는 패륜의 모습만을 연출한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교육환경은 곧 다가올 우리의 사후를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처리하기는 하지만 돈을 지출하는 것 자체가 싫은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다가면서 새 생명으로 얻은 자식을 지극정성을 다해 키운 부모의 육체가 하잘 것 없는 한줌의 재로 변하여 뿌려지는 것이다. 그도 아니면 항아리에 담겨서 어느 납골당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나무뿌리에 뿌려지는 수목장을 시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줌의 재로 뿌려지고 나무뿌리에 뿌려진 수목장은 그 나마 그 순간에 이미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항아리에 담겨서 납골당 한쪽 구석에 모셔진 부모의 유골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킬 것인지, 그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자식이 살아 있을 때는 그 자리를 지킬지 모르지만 그 자식마저 하늘나라로 떠나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물론 그때 가서도 누군가에 의해 어떤 식으로 처리될 것이겠지만, 현재보다 좋은 모습으로 처리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시기만을 늦춰놨을 뿐이지 처리되어야할 미래의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자식의 후손 즉, 손자가 아들보다 더 잘 처리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보고배운 것이 없는 그들에게서 뭘 더 바라겠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 풍수인들은 대응논리를 제시하여야 마땅하다. 시신을 함부로 뿌린다든가 납골당 항아리에 모셔놓은 것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 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를 하여야 한다. 또한, 새로운 장례문화로 현대인들이 수용 가능한 논리와 방법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는 정부의 시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며, 매장문화를 통해 만연한 동기감응론의 문제조차도 모두 포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미풍양속인 부모의 사후를 편안한 곳에 모시고 명절 때 성묘하고 벌초하는 아름다운 풍속 중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할 만한 요소는 유지토록 하는 최소한의 자세조차도 모두 버리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人政』 에서는 “매장의 제도는 고금이 다를 뿐 아니라, 또한 나라마다 풍속에 따라 같지 않다.(葬埋之制 非特古今有異)”고 하면서 “오직 매장만이 천하에 통행(通行)할 수 있는 것(惟有葬埋 可通行於天下)”이라 하였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를 유지하면서 화장 문화가 가진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한다. 다시 말해서 비록 대세가 된 화장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한 유골을 정결한 곳에 매장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매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는 많은 면적을 차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키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순환의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관상과 사주명리, 성명학 등은 그래도 스스로 진화해서 현대인들이 수용 가능한 영역 속에 상당부분 파고들어간 모습이지만, 우리 풍수는 아직도 음택 풍수에 집착하면서 앞길을 찾기 어려운 모습이다. 음택 풍수를 전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현대화하는 모습을 통해 거듭나려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구시대의 거의 모든 사고와 가치관이 급격하게 쇠퇴되고 변화하는 현대에서 풍수학인들이 나아갈 방향성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최고인양 행세하는 것은 풍수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과거의 논리와 방법 형식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논리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풍수학인들이 현대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자 살아갈 방향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