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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2208.2023.9.10)
요10:1-6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0:1-2절에 목자와 절도나 강도의 비유가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절도나 강도는 바리새교인이나 서기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저희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더라고, 즉 이 비유의 숨은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하게 합니다. 넓은 초원이 있고 한 가운데 목장이 있으며 이른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비쳐주는 목장의 아침 풍경입니다. 양들은 우리 안에서 목자를 기다리고 있고, 목자는 아침 일찍 양들을 돌보기 위해 지금 목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양들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밤새 춥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밤중에 이리나 사자 등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에서 꺼내어 하루 종일 풀과 물을 먹도록 들판에 풀었다가 다시 저녁이면 우리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물론, 밤중에도 양들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맹수나 기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다가 아침에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 줍니다. 요10:3절‘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문지기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삯군입니다. 밤새도록 양을 지키다가 아침에 목자가 오면 인계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빨리 들판에 나가서 물도 먹고 싶고 풀도 뜯고 싶은데, 갇혀 있으니 답답하여 목자를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목자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 밤사이에 건재함을 확인하고 앞장을 서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이며, 반면에 선한 목자 이외에 절도도 있고 강도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만 14절에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며, 예수님 자신은 참으로 양을 사랑하고 선하고 착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도 버리노라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세월을 아껴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아무렇게나 허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욥37:2절을 보면 욥의 세 친구들이 큰 고통을 당한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왔다가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을 때 그때, 그 세 친구들을 따라왔던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세 친구들이 욥에게 ‘지금 되어진 모든 일들은 다 너가 저지른 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계속해서 공격하자 욥은 나름대로‘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방어를 했습니다.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세 친구들을 따라왔던 엘리후가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해답을 알고자 할 때 우리의 이성이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으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하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창12:1절‘너는 노의 고향과 친척과 어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도망치던 야곱은 한밤 중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도망쳐나왔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 바로 왕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신5:26-27절‘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들은 것을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미디안 병사들이 무서워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찧던 기드온도 삿6:12절‘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전에 머물던 어린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은 너무 어린 탓에 처음에는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다시 불렀을 때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준 대로 삼상3:10절‘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대답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왕상3:5절‘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꿈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고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마5:1-2절‘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하셨고 그 중에는 마5: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팔복의 말씀도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솔로몬으로부터,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3-5절‘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과 참된 양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유대인의 양치는 모습은 낮에는 목자들이 각자의 양들을 들판에서 먹이고 저녁에는 공동으로 만든 양의 우리에 넣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지기를 세워서 들짐승이나 도둑이 들지 못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의 특징은 양은 연약하고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우리 안에 집어 넣어도 목자가 양들을 부르면 반드시 자기의 양들만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주인이 아침에 우리에서 양을 몰고 나갈 때 문지기는 양들을 확인 하지 않고 양의 주인만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들을 부르고 앞장서서 가면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양은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망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양을 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잘 알아 들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성경 말씀대로 듣기는 들어도 알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으로 오셨는지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목자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보시고 너희들은 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목자요 인도자라고 하지만 참된 목자를 증거하지 못하기에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가 참된 목자인데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 자가 참된 자기의 양인 것입니다. 요8:47절‘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한일서 4:6절‘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그러므로 제대로 된 양이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목자입니까?
요10:15절에 보시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양이란 자기 목자가 어떻게 죽는가를 아는 양입니다. 참된 신자란 목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심으로 나를 부르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참된 양은 목자의 죽음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란 자기의 죽음 즉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으로 해산을 한 자들임을 아는 자들이 참된 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의 복음이 빠져버린다면 아무리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불러도 주님께 속한 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강도나 절도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서 그들에게는 양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10:5절‘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그들도 열심히 가르치고 인도하려 했지만, 사랑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양들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랑하고 위했다면 왜 따라가지 않았겠습니까?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너희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난날에 그들의 음성을 통하여 양들이 찢기고 상처를 입어 손해를 보았던 경험이 있기에 따라가지 않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를 믿고 안심하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비탈길이나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이유를 묻지 말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저 궁극에는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좋다고 따라 나설 자가 누구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자는 말씀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누가 좋다고 따르겠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듣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갈6:14절‘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이러한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전도라는 것은 이러한 십자가를 전하였을 때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주님의 양이고 따르지 않고 도망가면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전도란 사람을 꼬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짜 양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가짜 양을 많이 모아 놓았다고 진짜 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양들을 불러 내시는데 어떻게 불러 내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하여서 나중에 십자가를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이것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양만 불러 내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반드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잃어버린 자(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하신 것처럼 물론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없기에 자꾸만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을 모아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문제는 사람을 꼬시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필요을 채워주는 것으로 가득찬 것이라는 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디에 버려 두었습니까? 예배당에 십자가는 폼으로 달아 놓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십자가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죽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주님 십자가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양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주님의 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목자와 양은 십자가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참된 양은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데 십자가 복음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믿고 따르도록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참된 양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세상의 소리, 더 나아가 사탄 마귀의 소리를 들으면 딴 길로 가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의 양심에는 ‘할까? 말까?’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분명하게 잘못된 길인 줄을 알면서도 사탄의 소리에 홀리게 되면, 그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발달된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경우에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항상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 신랑․신부의 비유, 아버지와 탕자 아들의 비유, 그리고 오늘 내용인 목자와 양의 비유는, 가장 대표적이며 아름다운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비유란, 언제나 그 비유에서 지적되는 사물, 비유되는 형식,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을 혼돈하면 끝이 아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생각하려는 문제는, 비유가 지적하는 사물에 대해서입니다. 만약, 비유가 지적하는 사물이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의 경험 속에 없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은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양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는데, 양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무슨 내용인지 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비유인 양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종종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양이라는 동물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는 성경 말씀을 번역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 새끼를 보라’고 번역했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곳 사람들은 양을 본 적이 없고, 또 양을 그대로 옮길 단어도 없을 뿐 아니라 옮겼다 해도 양이 가진 의미가 바로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바치는 돼지가 어린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게 이해될 수 있어서 돼지 새끼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가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사물이 듣는 자의 경험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본문에서 비유하고 있는 목자와 양이 우리 문화권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양이 흔치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동물원에서 볼 수 있고 또 양의 가죽으로 된 소지품을 사용하기도 하며 그림책에서 구경하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친숙한 동물은 아닙니다. 목자와 양을 관계지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편에서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소설책이 아니고선 실제로 목자가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수백 마리의 양을 지키며 때로는 피곤하여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리(wolf)로부터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목자를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실감나게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그들의 대부분은 양과 함께 사는 목자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이라고 하면 가장 가깝고 이해가 빠르며 실감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개’, ‘고양이’라고 막 불렀는데, 지금은 그렇게 부르면 무식하다고 욕을 먹습니다. 지금은 ‘반려견, 반려묘’라고 불러야 합니다. 예전에는 ‘개’나 ‘고양이’는 집 밖에 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는데, 지금의 ‘반려견’이나 ‘반려묘’는 집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가면, 자기 마음대로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반려견’,‘반려묘’를 아기 다루듯이 꼭 껴안고 엎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 키우는 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다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려견’, ‘반려묘’가 죽고 못사는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인이 ‘반려견’, ‘반려묘’를 소중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반려견’, ‘반려묘’가 주인의 말도 잘 듣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이 ‘반려견’, ‘반려묘’를 그렇게 소중하게 대하는데, 그 ‘반려견’, ‘반려묘’가 주인의 말은 전혀 안 듣고, 옆집 아저씨 말만 잘 듣는다고 한다면, 그 주인이 좋아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주인은 ‘반려견’, ‘반려묘’가 듣든지 말든지, 계속 이름을 불러대기도 합니다. 계속 이름을 부르면서, 그 맛에 살기도 합니다. 외출할 때도, ‘반려견’, ‘반려묘’를 오랫동안, 혼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맡기기도 합니다. 잠깐 외출시에도, ‘반려견’, ‘반려묘’가 어떻게 보내는지, 휴대폰에 설치된 앱으로 집안에 있는 ‘반려견’, ‘반려묘’를 살펴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과 함께 걸어가던 ‘반려견’이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따라가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찌 되겠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리 고와도, 따라가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것으로 유혹을 한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큰 집에 산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 집으로 쏙 들어가서 안 나오면 안됩니다. 오직 주인의 음성만을 듣고, 주인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인을 바라보고, 주인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양인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한다 해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 아무리 근사한 것으로 우리를 꼬신다해도,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왕이었을 때,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대상14:10절‘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블레셋과 싸우러 나갔을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패한 블레셋이 전열을 정비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다시 같은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대상14:15절‘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가 싸우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요단 강을 건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마주한 첫 번째 도전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다음, 소리를 질렀더니,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 성을 돌기 전에, 여호수아는 혼자, 여리고 성 앞에 가서 섰습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큰 싸움을 앞에 둔 지도자로서, 염려와 걱정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오직 자기를 믿고,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큰 일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마도 큰 걱정거리이었을 것입니다. 잠을 못 이루고, 홀로, 여리고 성 앞에 섰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는 그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아군이냐? 적이냐’,‘누구 편이냐’그때, 그 사람이 수5:14절‘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시자,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순종했더니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일에 자신의 뜻과 생각에 따라 살아가기에 바쁩니다.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의 판단과 지혜로 먼저 결정하고,나중에, 하나님께서 자기가 내린 그 결정을 축복해주시기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결정에 따르기보다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결정한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고, 축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일에 무관심한 것은 불신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시간을 내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바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이 귀하고 복된 날만큼이라도,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있으면, 듣기 싫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갈 길을 밝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좋은 것을 먹을 수 있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며 새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