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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0일 ~ 3월 26일 수에즈만 ~ 수단 수아킨
21일의 아침 해가 좌현 아시아 쪽 이집트에서 솟아날 준비 중이다. 오늘 새벽 항해는 야경이 아름다웠지만 고깃배, 대형선박, 석유 시추장치 등으로 정신 하나 없는 항해였다. 기온이 급강하해 상당히 추웠다. 풍하 15노트, 엔진 Rpm 1,400, 메인 세일만 50% 우측으로 활짝 열고 순항중이다. 속도는 5,5노트. 파도가 제법 있지만 뒷방향이라서 별 문제 없다. 나비오닉스에 이제 4일 18시간 남은 것으로 표시된다. 아내가 새벽 2시까지 함께 야간 항해를 해주어서 나는 잠시 쉴 수 있었다. 이번 항해 중 아내와 다투기도 많이 다툰다. 그래도 늘 다시 마음을 합쳐 항해한다. 아내와 리나, 모두 내게 늘 든든한 크루들이다. 크루이기도, 항해의 목적이기도, 삶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오전 5시 55분. 해가 뜬다. 태양 아래로 유조선 한척이 수에즈로 향하고 있다. 곧 기온이 상승해 따듯해진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풍하바람이 제법 센데도 속도가 많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역조류가 있나보다. 제네시스에 ‘이리듐 고’ 같은, 전자 장비가 많지 않아 늘 제한 된 정보로 항해를 해 답답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수에즈에 머물며 세계일주 항해를 하는 선장들의 배에 전자장비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많이 놀라고, 많이 배웠다. 대개 레이더는 없거나 고장 났고, 레이더는 물론이고 오토파일럿도 없는 배를 타고 세계일주중인 프랑스 청년들. 항해 역시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다. 그리고, 이스마일리아 기름은 훨씬 더 검다. 수에즈 기름이 더 깨끗하다. 혹시 수에즈운하 통과 중 경유를 보충하려면, 수에즈에서 해라.
실은 그저께 앵커 체인 수급이 불가능해 보였을 때, 프랑스 청년 레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희는 이제 항해가 끝나가니, 앵커 체인이 필요 없으면 내게 팔아라. 곧 답변이 왔다. 우리는 앵커를 엄청 자주 쓴다. 바다에 앵커링 하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식 마리나는 거의 들르지 않고 앵커링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빈 거다.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러니 무기항으로 세계일주 항해하신 김승진 선장님의 성과는 더더욱 대단하다. 전에는 그냥 무기항으로 세계일주 항해했구나. 하는 느낌이다가 직접 내가 장거리 항해 해보니,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 내가 몰라서 그 성과의 크기를 가늠치 못한 거다. 지금은 판단이 간단하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윤태근, 김승진 선장님과 나는 차원이 다르다. 끝!
윤태근, 김석중, 김승진 같은 분들이 계셔서, 지금 내가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 도움을 받아가며 항해 중이다. 나는 이번 항해 기록을 면밀하게 남긴다. 내 뒤에 또 세계일주나 지중해, 수에즈 운하, 인도양, 동중국해 항해를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뒤에 오시는 분들이 또 자세한 기록을 남긴다면, 그런 것들이 모여 소중한 항해 자료가 된다. 결국 한국 세일러들의 힘이 될 거고, 한국 요트 문화 발전에 밑거름이 될 거다.
수에즈에서 산 요거트를 리나가 잘 먹는다. 빨대를 물고 오물오물 귀엽기 짝이 없다. 실은 외국에선 우리가 늘 먹던 식재료도 찾아 요리해 먹기 쉽지 않다. 특히나 나 같이 비위가 약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무슨 소리냐고? 일단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사러 마트에 가면, 유럽정도는 우리나라 마트같이 예쁘게 포장 해 둔다. 이집트는 고기 색깔이 팥죽색이었다. 이것저것 들었다가 도로 놓았다. 외국은 거기에 양고기도 있고, 돼지고기나 쇠고기의 자른 부위의 모양이 다르다. 색깔도 좀 더 짙다. 닭 같은 경우도 좀 더 크고, 깃털도 막 붙어 있다. 그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입맛이 삭 사라진다.
크레타 하니아에서는 마트 푸줏간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눈알까지 새빨간 토끼가 껍질이 벗겨진 채로 쇠고기, 돼지고기들 사이에 얌전히 놓여 있었기 때문. 물론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가면 간혹 개고기도 걸려 있긴 하지만, 눈알까지 반짝거리며 식재료로 걸려있는 것은 못 보았다. 오래전 들렀던 대만에서는 시장에서 식재료로 뱀을 팔고 있었다. 이러니 비위 약한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빵이나 집어 들고 나오는 거다. 아내는 나보다 용감하다. 커다란 닭을 푸주한에게 부탁해서 먹기 좋게 손질을 시켜 가져와 요리한다. 한국서 출발하는 장거리 항해는 식재료 때문에 큰 걱정은 안하지만. 외국에서 출발하는 장거리 항해는 식재료 때문에 고민이 많다. 로마처럼 큰 도시에 한국 마트가 있다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식재료는 장거리 항해의 큰 장애물 중 하나다.
간혹, 나는 집에서 라면도 안 끓인다는 분들이 크루로 항해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미리 안다면 절대로 배에 태우지 않을 거다. 장거리 항해는 공동생활이다. 누가 밥을 해다 바친다는 것인가? 혹시라도 나는 요리를 전혀 못한다는 분은 아예 항해 하지마라. 남들에게 폐를 끼친다. 아니라면 확실하게 말하고, 그에 갈음하는 뭔가를 해야 한다.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것이라도 역할 분담을 하면 된다. 공동생활에서 남들에게 힘든 역할을 맡기고 본인은 항해를 즐기려는 분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대개는 자신이 문제라는 걸, 인지 조차하지 못하시는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항해에 우리 가족만 항해 한다. 이번 항해를 오롯이 가족만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수에즈 만에는 시추 시설이 많다. 시추공에서 하늘로 시뻘건 불꽃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대낮인데도 붉은 불꽃이 말끔하게 보인다. 저렇게 버리는 폐열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일 텐데. 적어도 하루에 라면 1만 그릇 정도는 끓이지는 않을까? 부러운 나라다. 그런데 왜 이집트는 윤택하지 못할까? 개인적으로 짐작하기에, 부패 때문 같다. 정치인은 수백 억짜리 호화 요트를 몇 대씩이나 가지고 있고, 국민은 밥 먹고 살기도 만만치 않은 나라. 누군들 그런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을까? 누구를 위해? 열심히 잘 해 봐야 소용없는 국가. 국민의 의지를 꺾는 나라는 절대로 잘 살수 없을 거다. 잘 살다가 갑자기 추락한 나라들을 보면, 대개는 정치인들이 국민의 희망을 앗아간 국가들이다. 우리도 타산지석. 희망이 사라지면 똑 같이 된다. 곧장 나락이다.
오전 10시 10분. 아내가 잠을 자다 선실에서 나오며 말한다. 저 뒤에 저게 뭐야? 돌아보니 우리 배의 둥근 펜더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다. 나는 전혀 눈치도 못 챘다. 배를 돌려야 하는데 메인세일이 활짝 열려 있다. 그냥 배 방향을 돌리면 메인 세일이 급격하게 돌아가며, 메인세일 트레블러 붐카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일단 속도를 줄이고, 메인세일 시트를 죽기 살기로 감는다. 어느 정도 시트가 감긴 다음, 배 방향을 돌리니 정면에 펜더가 보인다. 갑자기 방향을 돌린 탓에, 레이더가 지나가는 유조선들을 감지하고 경보를 울려댄다. 아내가 갑판으로 나가 걸이장대를 가져 온다. 배 속도를 줄이고 펜더에 접근, 걸이장대로 펜더 줄을 걸어 올린다. 만세! 이번에는 펜더를 건졌다. 아내 덕분에 펜더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발견했고, 아내가 건져 올렸다. 14만원 손실을 줄였다. 아내가 복덩이다.
파도가 높다. 1.5 미터는 되겠다. 뒷 파도이긴 하지만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파도 높을 때 선실에 들어가면 대부분 바로 멀미다. 또는 넘어지며 벽에 부딪쳐 부상을 입는 경우도 많다. 윈디를 보니 토요일부터 역풍이다. 우리는 토요일 오전 중 수아킨으로 들어간다. 스타보드로 방향을 틀어 수아킨으로 들어 갈 테니, 클로스 홀드나 빔 리치가 되겠지. 예상은 그렇다. 바다는 우리의 예측대로가 아니니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제 영국 선장 마크에게 물었다. 홍해에서 수에즈 오는 항로는 어땠나? 맞바람으로 무척 고생했다. 맞바람? 나도 이스마일리아에서 수에즈 오면서 맞바람으로 고생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가? 바람은 한 방향일 테니, 둘 중 하나는 편안히 와야 하는데 둘 다 맞바람이었다니! 그런 게 항해지! 그리고 함께 웃었다.
21일 오후 1시 30분. 엔진 1,400Rpm, 메인세일 70%, 다운 윈드 18노트, 선속 7.2노트, 이제 32분만 더 가면 수에즈만을 벗어난다. 수에즈 출발 24시간 만에 제대로 홍해로 들어선다. 파도는 세지만 점심은 먹어야 한다. 막 점심식사를 준비하는데, 해외안전지킴이로부터 문자가 온다.
[선장님, 잘 항해하고 계신지요. 해수부로부터 3.17(금) 01시경(UTC) 홍해 항해 중이던 화물선이 총기사격을 받았다(피해 없음)는 내용을 전파 받아서 전달 드립니다. 발생 위치 첨부 드리니, 꼭 참고하시어 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문자와 위치사진인데, 사진은 인터넷이 끊겨 볼 수가 없다. 대략 윤곽만 보인다.
역시 안 좋은 소식이다. 입맛이 뚝 떨어지네. 해적 사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예멘 모카 앞 바다다. 사진 위치로 보아 육지 쪽으로 바짝 붙어서 생긴 사건 같다. 나는 역시 제일 가운데 화물선 사이로 최대한 빨리 빠져나야겠다. 미상의 선박 공격, 총기사격 사건. 역시 뉴스에는 없다. 뭐가 어떻게 된지는 모르지만 이제 H.R.A.(high riak area)에서 해제 된 지역인데, 다시 긴장이 고조되려나? 점심으로 리나와 아내는 된장찌개와 참기름 계란 프라이. 나는 남은 버터에 크레타 하니아 마트에서 산 깃꼬만 간장 한 수저로 썩썩 밥 비벼 먹었다. 2~3분이면 식사를 마치는 평생의 습관은 항해엔 나쁘지 않다. 밥 먹고 바로 항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 인생의 다른 문제처럼 총기 사건과 점심 식사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문득 지부티에 에이전트를 소개 받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인터넷이 될 때 얼른 덴마크 선장 톨스에게 문자를 보낸다. 받고 보니 이미 가지고 있는 번호다. 일단 수아킨으로 가서 날씨를 보고 연락 해야겠다. 그리고 날씨와 바람이 계속 좋다면, 수아킨에서 오만 살랄라까지 직행도 고려해 볼 생각이다. 지부티에서 또 속 터지는 에이전트와 황당한 사건을 만나는 것보다는 바다에서 좀 더 고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아산 지부티 에이전트 : +253 7762 7015
오후 4시, 배 뒤쪽에서 툭툭 진동이 있는 것 같아, 러더 커버를 열어보니, 위쪽 러더 고정대가 닳아 조금 이격이 있다. 요즘 본 김승진 선장님의 유튜브 항해기에, 오토파일럿이 잘 고장 나기에 겁이 덜컥 난다. 아내에게 견시를 맡기고 플래쉬를 들고 뒤쪽 선실로 들어가 기계실 커버를 열고 오토파일럿 시스템과 배연배수 배관들을 면밀히 살핀다. 러더를 구동시키는 체인이 짱짱하다. 큼직한 오토파일럿도 소리 없이 잘 작동한다. 손을 대어 만져 보니 특별히 열이 나거나 진동이 있는 부위도 없다. 나는 안심하며 기계실 커버를 닫는다. 엔진과 오토파일럿만 멀쩡해도 한국까지 별 문제없이 갈 수 있다. 물론 기계와 선체에 대한 부분만이다. 내친김에 엔진룸을 열고 점검한다. 그저께 교환한 연료 필터 아래 부분을 만져 연료가 새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냉각수 등 전체적으로 이상 없다.
3월 21일 오후 7시. 아내의 된장국을 마저 다 먹었다. 수에즈에서 산 양상추를 잘라 쌈장을 발라 먹는다. 맛있다. 리나는 계란 후라이가 질렸는지, 아니면 아까 치즈를 너무 먹었는지,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스프레이 후드 뒤쪽으로 등반에 열중이다, 19개월짜리가 다음 장애물로 옮아 갈 때, 결연한 표정과 또렷이 목표물을 바라보는 눈매는, 학창시절 리듬 체조하던 제 고모를 딱 닮았다. 가족과 혈연이란 이렇게 신기하구나. 따듯한 물을 받아 리나를 씻긴다. 리나는 물을 찰박거리며 잘 논다. 딸기 치약으로 이도 닦인다. 집에서 안하던 일을 항해 중에 한다. 이제 리나가 물놀이 좋아하는 것 하나는 알겠다. 아직도 아빠 소리를 못한다. 지가 먹고 싶은 것을 가져와 껍질을 벗겨 달라든가, 더더! 하며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소리치는 것은 잘한다. 요구르트를 너무 많이 먹을 때는 엄마가 스트로를 슬쩍 들어 공기가 들어가게 하며, 이젠 없다! 라고 했는데, 이젠 다 눈치 채고 지가 스트로를 눌러 더 먹는다.
오후 7시 20분. 수에즈만을 벗어나 진짜 홍해에 들어섰다. 다음 웨이포인트까지 진행 방향 139도, 이대로 378해리를 간다. 이틀 반을 가야 한다. 그리고 하루 더 가면 수단 수아킨이다. 남은 총거리 559해리, 아직 3일 20시간 남았다. 해도로 바로 곁에 후루가다(Hurghada)다. 아내는 후루가다엔 국제공항도 있는데.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맛난 것 실컷 먹고 오고 싶다고 한다. 나더러 당신도 그렇지? 하기에, 미안하지만 나는 꿈에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한다. 일단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이 너무 맛날 뿐 아니라, 이 배를 강릉까지 잘 운반한 뒤에 나머지를 생각할 것이다. 지금은 안전하고 정확한 항해만이 나의 지상 목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나는 후회한다. 아내가 얼마나 한국 가고 싶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벽창호 같은 것이 엉뚱한 소리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늘을 보니 좌현이 북두칠성, 우현에 오리온이다. 나는 진짜 홍해의 시작점, 후루가다 앞바다를 지나고 있다. 바람과 파도가 조금 얌전해지는 듯하다. 집세일을 편다.
3월 22일 오전 2시 49분. 홍해 이집트 쪽 port safaga 로부터 50해리 앞 바다다. 하늘은 별들의 I-Max극장이다. 풍하 10노트, 선속 5.2노트. 역조류인 듯 느릿느릿 전진한다. 어제 밤 11시부터 오늘 오전 2시 30분까지 아내가 야간 견시해 주었다. 내가 잠시 눈 붙인 사이 바람이 바뀌었다. 좌현 뒷바람에서 우현 뒷바람으로 바뀐 거다. 집세일과 메인 세일을 다시 조정한다. 우현 집세일 시트가 텐더에 걸렸다. 텐더를 설치 한 후로는 늘 한번 씩 걸린다. 텐더 방향을 바꿀까 생각해 본다. 헤드램프를 쓰고 어둠속으로 나가 줄을 풀어 집세일이 좌현으로 넘어가게 해 놓고 다시 더듬더듬 돌아온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한 발 잘 못 내딛거나 균형을 잃으면 끝이다. 먹물 같은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돌아 올 길은 없다. 밤하늘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바다다.
오전 4시 20분. 젠장, 난 세일 펴면 안 되나 보다. 바람이 죽고 세일들은 널어놓은 빨래가 되었다. 집 세일 펼 때마다 바람이 사라지네. 뭔가 자료를 찾으려니 인터넷이 안 된다. 이제 지식은 내 뇌가 아닌 바깥세상 클라우드 어딘가에 존재한다. 나는 그저 도서관의 색인을 찾듯 그 지식을 찾는 사람일 뿐. 인터넷이 없으면 나의 세계는 곧 사라진다. 내가 아는 지식은 더 이상 내 지식이 아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설명하거나 기록하려면 막상 아는 게 없다. 어쩌면 네트웍 없는 지금이 진정한 나의 세계인가? 참 작고 보잘 것 없구나.
레이더를 보니 좌측 뒤편으로 큰 배가 지나간다. 육안으로 찾아보니 여객선인 듯 불빛이 휘황하다. 가수 이장희 형님이 지금 여객선을 타고 세계일주 중이시다. 인터넷이 되는 곳에서는 카톡으로 서로 여행기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했었다. 3월 24일 요르단 Aqaba를 지나 25일 Suez를 통과하신다니 혹시? 하는 마음이다. 서로 통신할 방법이 없으니 부지불식간 아쉽게 스쳐 지나치게 되지만, 건강히 여행 잘 하시기를 비는 마음이다. 오랜만에 ‘그건 너’를 들어 본다.
오전 5시 50분. 홍해 3일차 항해. 일출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좌현에 돌고래다. 바우로 나가보니 20~30 마리 쯤 된다. 홍해에 돌고래가 있다. 별 움직임도 없는 것 같은데 상당히 빠르다. 고된 항해는 이런 순간 보상 받는다. 집에서 TV로 보는 돌고래들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이다. 돌고래의 몸통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숨구멍이 열리고 날숨이 빠져 나오며 물방울이 튄다. 파도를 뛰어 넘으며 점프하는 힘찬 꼬리지느러미에 물줄기가 따라 솟구친다. 군무하는 돌고래들과 눈이 마주친다. 이들은 한국 동해까지도 회유할까? 이들은 어째서 이 새벽 다가와 제네시스와 함께 춤추는 것일까? 다른 세계, 다른 생명체와의 조우. 바다의 신비다. 잠든 아내를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한다. 항해가 힘든 거다. 10분 정도 돌고 점프하고 잠수하던 돌고래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6시 40분. 오늘은 특별히 감자밥이다. 실은 어제도 같은 밥. 그래도 오늘 아침엔 카레를 만들었다. 오만 살라라 쯤 가면, 로마에서 산 한국 식재료는 끝이다. 엄청나게 아껴 먹었다. 중간 어디쯤 한국 식품을 살 곳이 있는지 와이파이 되는 곳 가면 한번 검색 해 봐야겠다. 아내와 나는 지나치게 한국인이다. 한국 식재료 없이는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다. 이것 또한 항해의 장애물이다. 밥을 안치며 보니 리나는 깊은 꿈나라에 있다. 혼자 무서운 꿈도 꾸고, 뽀로로를 보다 재미난 장면이 나오면 까르르 웃기도 한다. 19개월 리나의 꿈에 나오는 괴물들은 어떤 모습일까? 분명 엄청나게 귀여운 것들일 텐데. 궁금하다. 밥을 다 짓고 보니 이집트 쌀이 제일 한국 쌀과 비슷하다. 아하! 이집트에서 쌀을 더 살 것을. 한 봉지만 샀다. 만시지탄! 후회다. 유럽에서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선장들은 이탈리아 쌀 절대 많이 사지 말고, 수에즈 Badar mart에서 많이 준비해라. 택시비는 15이집트파운드다.
오전 8시 10분. 홍해 한가운데 울진 왕돌초 같은 곳이 두 군데 있다. 더 작은 곳이 El akhawein 이라는 곳인데 갑자기 요트 정박 마크가 나타난다. 확대해 보니 The Brothers 라고 표시된다. 등대가 있고, 마리나와 무어링 하는 곳이 있단다. 정말이라면 신기한 일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길이니 지나며 한번 살펴보자.
오전 9시 15분 El akhawein 이 나타났다. 바다 한 가운데 작은 돌섬 두 개다. 한쪽은 등대와 작은 벽돌집이 있다. 사람이 사는지는 불분명하다. 납작한 독도 같다. 유람선 3대가 와서 앵커링 하며 고무보트로 이동 중이다. 10미터 가량 절벽이라 앵커링해도 상륙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우리는 멀리서 사진이나 찍으며 지나가자. 아프리카 쪽 이집트 Bir Esel 에서 30해리 정도니 관광하기엔 상당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은 없다. 선속 5.6 노트. 수아킨 도착까지는 3일 11시간 남았다.
오전 11시 45분. 바람도 파도도 얌전하다. 뒷바람이라 배의 엔진 배기매연이 신경 쓰인다는 아내의 말에 스프레이 후드 창을 열었다. 실은 좀 화가 난다. 엔진이 돌면 당연히 배기가 되는 것이고, 엔진이 멈추면 우리 가족은 곧장 위험에 처한다. 잘 도는 엔진을 가지고 시비 거는 듯해서 거슬린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다 관심사가 다르다. 나는 덴마크 선장 톨스의 도움을 받아, 엔진 오일을 갈고, 연료 필터를 갈고 매번 엔진의 상태를 살핀다. 엔진이 잘 도는 게 나의 관심사다. 나는 선장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19개월 리나의 엄마다. 리나가 계속 배의 배기연을 맡으면 리나의 건강에 나쁘지 않을까? 염려하는 거다. 다 알면서도 거슬리는 건, 항해의 피로와 책임감 때문일 거다. 현재 제네시스의 엔진은 상태가 좋다. 아내와 리나는 깊은 잠에 빠져있고, 우리는 홍해의 수심 1,000 미터 해역을 지나고 있다.
싱크대 수도가 잘 안 나와 놀랐다. 혹시? 하고 수도꼭지마다 다 점검했지만, 다른 덴 이상 없다. 수도꼭지의 소형필터가 막힌 거다. 분해 청소 과정에서 수도꼭지 끝의 필터가 망가졌다. 물은 잘 나온다. 다음번에 마켓에 가면 하나 사서 교환하자. 이딴 건 없어도 그만.
레이더에만 한두 대 대형 선박이 표시되고, 육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다. 속도가 5.2 노트로 느려진 것을 보아 역조류다. 며칠씩 가는 이런 항해에는 속도보다 방향이다. 하루 이틀 늦게 가는 건 문제없다. 역조류 일 때도, 순조류 일 때도 있다. 꾸준히 정확한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도착한다. 속도에 목매고 안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도착할 수단 수아킨은 어떤 항구일까? 앵커링하는 곳이라니 기름과 물, 식량은 잘 구할 수 있을까? 다른 배들이 어떻게든 구해서 왔다니 나도 구할 수 있겠지. 생각이 너무 많고, 좋지 않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서, 인간의 신뢰에 대한 내상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이젠 생각도 줄이자.
"세몬"
"음?"
"우리는 남을 도와주는데 왜 남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지 몰라요."
세몬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뭘 자꾸 그러는 거요.“
라고만 했을 뿐 휙 돌아누워 그냥 잠들고 말았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 : 톨스토이
따지고 보면 나는 이번 항해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고마운 일이다. 다운 받아온 톨스토이의 책을 읽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목이 메인다. 잠시 감사 기도를 드린다. 미리 다운 받아 온 책들과, 음악들이 위로가 된다. 장거리 항해 중에는 엔터테인먼트 부분도 반드시 고려해야한다. 맹하니 칠흑 같은 밤바다만 내다보는 것도 고역이다. 별구경, 발광 플랑크톤 구경도 하루 이틀이다. 외국에서 출항할 경우 짐무게 제한 때문에 책들이나 음반을 가져오기 어려우니, 반드시 다운 받아 챙기자. 대양항해 중엔 No wifi, No phone 이다.
오후 2시 10분 카레, 양상추, 삶은 계란으로 점심을 먹을 때, 위성전화가 울린다.
“대한민국 해군입니다.”
감도가 좋지 않다. 급히 이상 없이 항해중임을 알린다.
“저희는 안전하게 잘 항해 중입니다. 염려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망망대해에 우리 가족끼리만 떠 있다가 뭔가 세상과 단번에 연결 된 느낌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보호 아래 있다. 해군에게 좌표와 방향 속도를 알려주고, 전화는 끊겼다. 대체로 믿을 수 없는 위성전화다. 다음에 또 장거리 항해를 할 때엔 뚜라야보다 더 나은 전화기를 준비해야겠다. 그럴 기회를 또 갖게 된다면.
오후 3시 30분.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한 번 더 읽었다. 언제나 처럼 단숨에 읽는다.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이번에도 처음 보는 것 같은 구절이 몇 개 있었다. 볼 때마다 가슴 벅차다. 매번 헤밍웨이의 재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나 같은 사람으로써는 꿈도 못 꿀 걸작이다. 아바나의 한 어부가 들려 준 이야기를 가지고, 읽는 사람 모두 현장에서 직접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올리는 듯 착각하게 한다. 읽고 나면 늘 소설 아닌 영화를 본 것 같은 생생함.
노인은 마지막 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모든 위대함과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더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역경에 잘 견뎌 낼 수 있는지를 물고기에게 보여 주고 말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이 이상한 노인이라고 아이에게 말하곤 했었다. 지금이야 말로 그 말을 증명할 때다." - 노인과 바다 중 : 헤밍웨이
오후 6시 20분. 아내가 멀미를 계속한다. 가슴 아래 꼭 체한 듯한 느낌이 계속된단다. 그래도 리나 밥을 빠지지 않고 챙긴다. 누릉지를 끓여주었더니 먼저 리나를 먹인다. 리나는 살이 올라 통통하다. 역시 엄마는 다르다. 오늘은 리나의 표정이 갑자기 아기에서 어린이가 된 느낌이다. 아빠를 빤히 바라본다. 항해 끝날 때쯤에는 아빠! 라고 말을 할까?
수에즈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요티들은 배의 잔 고장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전자 장비나, 레이더, 오토파일럿마저도 그다지 큰 문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다만 엔진, 디젤유, 앵커 등은 신경 써서 관리한다. 세일 요트의 기본을 챙기는 거다. 엔진, 앵커 등만 문제없으면 항해에 지장이 없다. 장비가 늘 완벽하게 100% 운용되어야 한다던, 내 철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고칠 데가 마땅하지 않으니, 철학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는 만큼 마음 건강만 해친다. 운항에 지장만 없다면 잔 고장들은 잊고 그대로 항해하여 적당한 마리나, 또는 한국에 가서 수리하는 게 낫다. 다만 선저 청소 페인트는 태국서 꼭하고 가라고 한다. 거기 인건비가 싸서 가격이 저렴하다고 한다. 태국이라... 홍해 중간에서 생각하는 태국은 진짜 멀고먼 나라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당장은 처음으로 앵커링 해서 며칠을 보내면서, 물과 기름 식료품을 챙겨야 하는 수아킨도 막막하다.
오후 9시 리나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선실 내부가 더워서 그렇다고 아내가 걱정이다. 일단 리나를 씻긴다. 끈끈해서 잠을 못 잘 수 있다. 리나는 샤워와 물장난을 무척 좋아한다. 조그만 양동이에 앉아 양손으로 물을 튀기며 논다. 여기가 홍해를 야간 항해하는 세일 요트 선실 안이 아니라면 무척 평화로운 풍경이다. 깨끗이 씻기고 기저귀를 갈은 다음 아내에게 인수인계한다. 이젠 아내도 좀 잘 수 있겠지. 칠흑 같은 어둠 속. 수아킨까지는 421해리가 남았다. 아직 멀다.
3월 23일 오전 4시 55분. 좌현 5마일 지점에 Abu El Kizan 이 있다. El akhawein처럼 등대와 앵커링 지점이다. 멀리서는 등대만 보인다. 마치 한산도 거북선 등대 같은 생김새. 주변 바다가 수심 1,000의 홍해니, 바닷물이 없다면 흡사 바늘처럼 솟아 오른 지형이다. 쉽게 상상하기 힘든 땅모양. 제네시스는 5노트로 힘겹게 나아간다. 아직 384 해리나 남아 있다. 아내의 멀미가 좀 나아 졌기를 기대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방면에서 아침 해가 일출을 준비 중이다. 새벽 기온이 쌀쌀하다. 점퍼를 챙겨 입는다. 만경창파, 마리아칼라스의 오페라 아리아를 만파식적 삼아 항해 중이다.
오전 6시. 엇! 고래다. 아내가 외치며 바우로 나간다. 돌고래 떼다. 나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어제와 같은 돌고래인가? 아내는 돌고래를 보며 노래한다. 어제 아침엔 잠이 덜 깨 보지 못했던 돌고래 떼다. 일출과 돌고래, 노래하는 아내. 내게 영원히 남을 풍경이다.
오전 7시 45분? 6시 45분? 여기가 애매한 지점인가 보다. 어제부터 시간이 한 시간씩 오락가락한다. 어제 아내의 핸드폰은 한 시간이 빠르고 내 핸드폰은 한 시간이 느렸다. 오늘 오전 6시에는 두 핸드폰이 같았다. 그러다 방금 전 아내의 핸드폰은 6시45분, 내 핸드폰은 7시 45분이다. 그냥 새로운 시간으로 적용하기로 한다. 손목시계를 조정한다. 지금은 둘 다 10시 34분이다.
수에즈에서 산 요구르트, 치즈, 딸기 빵을 리나가 잘 먹는다. 잠깐 맛을 보니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는다. 쌀도 그렇고, 식재료를 수에즈에서 더 많이 준비할 것을. Rpm은 1,400 그대로인데, 속도는 어제 밤부터 4.9 노트다 속도가 늘지 않는다. 조류 영향이 크다. 오후부터는 좀 빨라지려나? 수단 수아킨까지 거리는 361 해리. 예상보다 하루가 더 늘어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꾸준히 전진한다.
오후 3시 15분. 속도가 4.3까지 내려갔다. 대단한 역조류다. 이스마일리아에서 수에즈 갈 때도 이랬다. 밤이 되면 속도가 나아지겠지. 엔진 Rpm을 올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참자. 그래봐야 속도는 얼마 안 올라가고, 기름만 많이 쓰게 될 거다. 물론 엔진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이번 코스 항해는 가기면 하면 된다. 하루 이틀 더 걸리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밤 지나고 내일 오전에도, 속도가 계속 이 정도라면 배를 전체적으로 점검 및 확인해 볼 예정이다. 엔진이나 스크류에 크게 진동이 느껴지진 않는다. 그래도 홍해 한 가운에서 잠수하여 스크류 점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속도가 다시 4.5 노트가 됐다.
항해 중 아내와 다투는 내용. 아내는 항해가 어떤 상황인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항해를 하려고 한다. 나는 안다. 그러면 우리는 죽는다. 배에 물탱크는 750리터다. 이걸 다 쓰면 항해가 안 된다. 아내가 샤워 한번하면 물탱크의 물이 1/6이 줄어 든다. 리나를 매일 저녁 씻기려고 한다. 매번 20리터를 사용하면 리나 씻기는 물만 10일이면 200리터다. 거기에 집사람 샤워 몇 번. 이래서는 10일 이상 장거리 항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물을 아껴 쓰라고 하면 잔소리한다고 삐진다. 참나 대책이 없다. 아내는 선실과 콕핏 바닥을 매일 닦는다. 그래도 중동의 흙먼지는 계속 들어온다. 아침이면 세면대에 모래 앙금이 앉는다. 주부로서 참기 힘든 상황임에 분명하긴 하다. 나는 2~3일에 한 번씩 각 화장실 샤워 배수구 필터를 청소한다. 머리카락과 잡 때들이 가득하다. 이걸 청소하지 않으면 배수 모터만 돌고 화장실 바닥 물이 배출되지 않는다.
아내는 항해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 여기저기 들리지 말고 몰디브까지 바로 가잔다. 나는 웃고 만다. 15일 이상 걸리는 장거리 항해다. 어쩌면 20일이 걸릴 지도 모른다. 기름도 부족하고, 지금처럼 물을 사용하면 우린 다음 항구까지 가기 전에 물이 없어 죽는다. 아내는 핸드폰이 안 터지니 육지에 가까이 가잔다. 그러면 지나는 배에, 암초에, 섬에, 항해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이상이 생기기를 원치 않는다. 안전제일 항해를 해야 한다. 물론 며칠 씩 씻지도 못하고, 좁은 배에만 갇혀 지내는 장거리 항해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통화하다가, 샤워하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만, 오늘 저녁 아내와 앉아 물 계산을 다시 해봐야겠다. 이해를 시키고, 아내가 상황을 인식해야 개선이 될 것이다. 아내도 장거리 항해가 힘들겠지만 나도 답답하다.
오후 7시 20분, 선속이 5.0노트로 약간 회복 된다. 저녁에 조류가 더 약해지거나 진행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
수아킨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을 정리한다. 달러 확보하기 (안 되면 지부티의 ATM을 이용해야 한다. 거긴 ATM에서 달러가 나온단다.) 물탱크 채우기. 연료 탱크에 디젤유 가득 채우고 200리터 더 싣기. 이 정도면 여차할 경우, 오만 살랄라까지도 바로 갈 수 있다. 식료품과 식수 사기. 밀린 빨래 세탁하기. 뭍에서 샤워하기. 이상은 선상생활에 관한 부분. 잠수해서 스크루 점검하기, 엔진 체크, 메인 시트 꼬인 부분 나사 풀어 펼치기, 텐더 보트 방향 바꾸어 놓기, 자전거 자물쇠 사서 선외기 잠그기, 앞 화장실 배수 모터 누수 작업. 자잘한 작업들이 많다. 항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스크루와 엔진뿐이다. 그나마 큰 걱정 없이 항해 할 수 있겠다.
아참, 뚜라야 위성 전화기는 절대 사지 마라. 이게 생긴 것도 장난감처럼 생겼지만 통화 품질은 아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한국 해군에서 온 연락도 잘 알아 듣지 못하겠고, 미국 시애틀 여동생에게 전화하니 3초 만에 끊어지고, 잠시 후 여동생이 전화해도 ‘여보세요?’만 하고 끊어진다. 그러면서 1분 단위로 과금된다 하니 절대로 뚜라야 위성전화 사지마라!
3월 24일 오전 2시. 엔진 Rpm 1,400. 배 속도가 계속 4.5노트다. 너무 느리다. 조류가 계속 수에즈 쪽으로 흐르나 보다. 바람은 풍상 5.0 노트, 이러다 바람이 강해지면 낭패다. 엔진을1,600rpm으로 높인다. 그래도 선속 5.0 노트다. 기름을 좀 더 먹겠지만, 강한 맞바람이 오기 전에 다음 웨이포인트까지 가자. 오늘 날이 밝으면 기름을 보충해야겠다. 이런 일련의 판단들이 모두 제대로 잘 작동하기를 기도한다. 그전에 속도를 낼 걸. 더 일찍 기름을 보충할 걸.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달 없는 밤. 수에즈 핫산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늘 내게 ‘마이 프랜드’라고 했지만, 단 한 번도 프랜드인 적은 없었다. 그는 어렵지 않은 일로 내게 적지 않은 돈을 요구했다. 그는 일방적인 거래를 한 거다. 그의 방식에서는 그런 게 프랜드인지 모를 일이다. 반면, 내가 만난 세일 요트 선장들은 모두 프랜드였다. 그들은 조건 없이 정보를 주고받았고, 엔진 정비를 해 주었고, 빈 디젤 말통을 주었고, 서로 뭔가를 해주려고 노력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아내가 준비한 식료품 등을 선물로 주었다. 지금도 계속 연락 중이다. 그런 게 프랜드다. 마음과 거래. 나도 다음에 만날 선장들에게 진정한 프랜드가 되도록 노력할 거다. 다만, 러시아 선장들은 딱 할 말만하고 뭔가 벽이 있다. 좀 더 다가갔던 선장은 약속과 시간개념이 엉망이었다. 러시아 선장들에 대한 내 생각이 편견이길 바란다.
오전 5시 10분. 한국 해수부 상황실에서 위성전화가 왔다. 이00주무관이다. 앞으로 하루에 몇 번씩 위성 전화로 연락을 준다고 한다. 그냥 ‘잘 운항 중입니다. 괜찮습니다.’ 정도로 답하면 된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 청해 부대와 해수부에서 살뜰히 챙겨주는 중이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다음 항구에서 외국인 선장들을 만나면, 각각의 나라에서 세일 요트들을 어떻게 챙기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뚜라야 위성전화기는 처음 살 때 준 이어폰 세트를 끼면 더 잘 들린다. 이어폰이 일종의 안테나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1990년대 말에 잠시 나타나다 사라진 씨티폰 같은 분위기다. 오늘 새벽에는 레이더가 자주 울린다. 통행하는 배가 많다.
오전 6시. 홍해는 거울 같이 잔잔하고 바람은 풍상 5노트다. 수에즈 떠나 처음으로 메인 세일을 접었다. 약한 바람이라도 이용하려고 애썼지만, 하루 정도 빼고는 바람은 별 도움이 안됐다. 엔진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진짜 대단하다. 그들의 항해술은 지금보다 훨씬 뛰어났을 거다. 펄링 방식의 메인세일을 잘 다루게 되어 기쁘다. 1,600Rpm 선속 5.3노트다. 수아킨까지는 266해리 남았다. 예상 도착 시간은 일요일 오전이다.
일출을 보고 기름을 보충한다. 160 리터를 넣었다. 덴마크 선장 톨스가 알려준 “공기 불어넣기” 가 아주 효과적이다. 그러나 20리터 말통 8개를 흔들리는 배에서 급유하기는 쉽지 않다. 배의 기름은 바다가 잔잔할 때, 무조건 가득 채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파도가 세면 기름 넣기는 정말 힘들다. 잔잔할 때 수시로! 급유의 새 표어다. 아침부터 상당히 더울 것 같다.
오전 9시. 배에 잔 진동이 느껴진다. 바람 없고 파도 없으니 선저 점검하기에 최적이다. 나중에 후회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하자. 배를 멈추고 고프로를 가져 온다. 고프로로 물속을 촬영한다. 꺼내서 확인하니, 스크루는 깨끗한데, 러더에 하얀 비닐마대 같은 것이 걸려있다. 배를 멈추고 핀과 수경을 준비한다. 수심 천 미터, 홍해에 입수해야 할 상황이다. 아내는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한다. 그럼 누가? 수영 팬츠를 준비하고, 스턴 샤워기 밸브를 열고, 구명환을 늘어뜨리는데, 배 뒤로 하얀 비닐 마대가 떠내려간다. 혹시? 다시 한 번 고프로로 수중 촬영해보니 스크루와 러더 모두 깔끔하다. 비닐 마대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 거다. 운이 좋다. 홍해에 입수하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배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곧장 확인하자. 게으르면 큰 고생하게 된다. Rpm 1,600 선속 4.9노트 예상보다 엄청 느리게 수아킨으로 가고 있다. 244해리 남았다.
오전 11시 15분. 제법 커다란 돌고래 4마리가 다가온다. 리나를 번쩍 들어 돌고래 구경을 시킨다. 생후 19개월 19일차, 리나가 처음으로 돌고래를 보는 순간이다. 리나도 깜짝 놀랐는지, 고사리 손가락을 내밀어 오!오! 하면서 돌고래를 가리킨다. 잠시 후 고래가 떠난 뒤, 리나는 스프레이 후드 기둥을 잡고 돌고래를 찾는다. 최연소 고래 감시원이다. 2023년 3월 24일. 우리 리나가 처음으로 돌고래와 조우한 날. 다행이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있었다. 만세!
오후 3시. 낮잠에서 깨니 포트 60 에서 크로스홀드 바람이 들어온다. 풍속 8~10노트, 일단 쓰고 보자! 하고 메인 세일을 편다. 콕핏에서 시트를 당기니 안 나온다. 마스트로 달려가 감았다 풀었다 반복하며 메인 세일을 편다. 펄링 메인세일은 풍상을 맞추는 불편은 없지만 생각보다 잘 찝힌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많이 쓰자. 세일을 자주 폈다 접었다 하기엔 풀 배튼 방식이 나은 것도 같다. 문득 크레타 하니아의 요트 체험 장면이 생각난다. 풍속 17~20노트 강풍에도 집, 메인 모두 풀 세일을 하고 출항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선장과 크루 두 사람이 한조로, 고객들에게 그야말로 제대로 세일과 바람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인상 깊었다. 제네시스로 요트 체험은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선속은 속도감 6노트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4.8노트다. 오는 내내 역조류다. 수아킨에서 지부티까지도 마찬가지면, 최소 이틀이나 삼일을 더 생각해서 항해 계획을 만들어야겠다.
아내가 이번 항해를 기회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리나 낳기 전 52 키로였던 아가씨가, 애 낳고 12키로가 배 둘레에만 포진했다. 굳이 몰디브로 가서 비키니를 입어 보겠다고 한다. 좋다. 날씬해도 뚱뚱해도 내 마누라지만, 본인이 그런 결심을 했다면 나는 적극 응원한다. 며칠 전부터 우유에 콘 프레이크, 옥수수 콘 깡통만 먹었다. 그러더니 1시간 전부터 본인의 핸드폰에 촬영해 두었던 음식 타령을 한다.
아내는, 자신이 만든 김밥을 먹고 싶다. 한국가면 김밥을 질릴 때까지 먹자. 아아 나물 반찬 먹고 싶다. 콩나물 무침 먹고 싶다. 만두, 떡볶이, 튀김, 순대, 쫄면, 막국수 먹고 싶다. 자긴 뭐 먹고 싶어? 나? 짜장면. 탕수육. 안목반점이나 우리 동네 그 중국집. 그럴 거면 그냥 편하게 먹고 나중에 살 빼지? 그건 절대 안 된단다. 늘봄공원 갈비탕, 모닥불 삼겹살집, 왕실마차, 삼계탕, 무한리필 조개, 돼지고기 고추장 석쇠구이, 콩국수, 칼국수, 서부시장 감자전, 뚱보냉면, 임대균 선장과 먹던 송추계곡 쌈밥 집, 신사동 만복국수. 김00 기자님네 마당에서 구워먹던 고기. 이젠 우리가 술 안 마셔서 초대 안 해. 그래도 꼭 먹고 싶어요. 끝없이 음식 타령이다. 듣다보니 별 식탐 없이 주어진 대로 꾸역꾸역 먹는 나도, 갑자기 고향과 음식이 그리워진다. 내가 이러니 아내는 오죽할까? 아직 3개월 이상 남은 이야기다. 여러분 앞에 놓인 음식은, 이렇게 홍해 바다에서 김선장네 가족이 너무너무 그리워하는 한 끼입니다. 천천히 알뜰하게 잡수세요.
오후 4시 20분, 포트 쪽 크로스홀드 바람이 10노트를 오르내린다. 내가 집세일만 펴면 바람이 죽지만, 그래도 이런 바람을 놓칠 수는 없다. 축범하여 집세일을 펴자, 속도가 6노트를 오르내린다. 잘 됐다. 이대로 가다가 다음 웨이포인트에서는 빔리치가 되니까, 이 상태가 유지되기를 기도한다. 짚 시트가 텐더보트에 걸리지 않도록 로프를 설치했다. 저게 잘 작동할지, 더 어렵게 만들지는 집세일을 접어 봐야 안다. 여차직하면 풀어버리면 되니까. 일단 어둠 속에서 집세일을 접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선장은 참 소망하는 일도 많네. 그러나 잠시 후 바람이 풍상으로 바뀌면서 나는 집세일을 접고야 말았다. 홍해항해에서 바람은 무풍이거나 쓸모없었다. 새로 설치한 로프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하자.
오후 7시 35분. 준비한 초콜릿들이 모조리 녹았다. 냉장고에 넣는다. 벌써 낮에는 덥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리나를 씻긴다. 오늘은 딸기치약으로 치카치카도 했다. 아빠가 제대로 했다. 아내와 리나는 선실로 들어가고, 나는 야간항해를 준비한다. 인도양과 남중국해는 더위가 걱정이다. 초승달과 샛별이 나란히 떴다. 마스트 등이 한방에 켜졌다. 접촉 불량 맞다. 맞바람은 점점 강해지고, Rpm 1,600에 선속은 4.4노트다. 이쯤 되면 뭐, 일요일 밝을 때 들어가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항로에 홍해는 진짜 불친절하다. 물론 파도가 높지 않아 다행인데, 이 말을 하면서도 또 재수가 없을까 걱정이다. 다음 웨이포인트에서는 Rpm을 좀 더 높여볼까? 수에즈와 이스마일리아에서 만난 대부분의 선장들은 5노트를 기준으로 항해한다고 했다.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다니려고 노력중인데, 이 역조류와 맞바람은 진짜 어쩔 수가 없다. 수아킨에 가면 다른 선장들의 홍해와 인도양 운항 정보를 더 얻어야겠다.
Jazz 곡들을 들으며 저녁을 연다. 문득 Once in a bluemoon의 임재홍 사장님이 떠오른다. 그분이 Jazz club을 다시 여시면 좋겠다. 이젠 수트를 입고 몬테크리스토를 커팅하거나, 코냑 1온스를 홀짝이는 일 없이도, Jazz가 귀에 잘 들어오는 나이가 되었다. 임사장님 덕분에 빛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분이 앨런킴 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장미와 Jazz 의 밤’ 은 지금도 뚜렷하다. 이젠 니취하지 않는다. Jazz를 즐기며 그런 분들과 함께 차분히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네시스로 초대 드려야겠다. 오, Take Five. 나도 5분간 쉬며 레이더를 한 번 더 살피자. 그건 쉬는 게 아니라 일하는 건가? 아무렴 어떤가? 무료해서 달밤에 체조도 할 판인데.
오후 8시 30분. 갑자기 선실 문에 그림자가 비친다. 리나가 계단을 올라왔다. 들어 올려 잠시 안아준다. 콕핏에 눕힌다. 연신 하품하고 눈을 비비면서도 발로 장난치며 잠을 자지 못한다. 함께 놀아준다. 리나의 탄생은 내 인생의 최대의 사건이다. 내 삶의 방향을 정한 모티브가 되었다. 나는 이 행성의 순례자에서 아빠가 되었다. 광야를 떠도는 유목민에서 가정의 울타리에 든 정착민이 된 거다. 한 남자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 작고, 연약한, 사랑스러운 존재. 리나는 아빠와 잠시 놀다 일어나 다시 선실 문 앞에서 선다. 엄마 곁으로 가고 싶은 거다. 안고 선실로 내려가 침실의 엄마 곁에 눕힌다. 리나는 오늘 밤, 얌전히 잠들 거다. 나는 내 딸 마리 스텔라를 위해 기도한다.
3월 25일 오전 2시. 파도가 배 바닥을 치는 펀칭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밤 11시부터 야간 견시를 하던 아내가 분주하다. 좌현 가까이로 대형배가 지나간다. 맞바람이 12노트다. 선속은 4.3 노트, 펀칭 할 때마다 3.8 노트까지 떨어진다. 최대한 정면 바람을 피하려고 코스에서 3~4도 벗어나게 스타보드 쪽으로 침로를 바꾼다. 바람보다도 역조류가 대단하다. 수에즈에서 남쪽으로 홍해 운항 시엔 평속 1,600Rpm 에 5.0 노트 이상 잡기가 어렵겠다. 아내에게 선수쪽 해치들을 닫으라고 한다. 파도가 넘어 들어갈까 우려해서다. 아내는 나와 교대해 선실로 돌아간다. 잠을 잘 수 있을까? 마치 홍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둣, 수아킨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별은 총총한데 달은 사라지고 없다.
오전 3시 40분. 맞바람 16노트. 펀칭이 심해 배 방향을 더 우현으로 돌린다, 바람과 파도를 30도가량 비스듬하게 맞도록 한다. 선속은 3.0노트를 오르내린다. 토요일 내내 이렇게 고생할 듯 싶다. 선실 속 아내와 리나가 걱정이다. 펀칭이 더 심하면 콕핏으로 나오라고 해야겠다. 어제 세일을 모두 접고, 기름을 채운 건 옳은 판단이었다.
선속이 30 노트를 오르내리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이대로 바람이 잦고 파도가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는 것. 배 속도를 높여 다음 웨이포인트까지 34해리를 좀 더 빨리 가서 우현으로 더 방향을 틀어 바람을 측면으로 받게 하는 것. 생각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이다. 순간적인 변화로 전체적인 모양을 바꾸긴 어렵다. 선실로 들어가 열려있는 선실과 화장실 해치들을 닫는다. 우현 화장실들은 파도가 넘어 들어왔다. 이번 항해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항해다. 엔진 잘 작동하고, 피항을 결정할 정도의 파도도 아니다. 지중해 항해 때보다는 파도도 작고 펀칭도 강하지 않다. 다만 가야할 거리가 속이 탈 정도로 줄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기다리면 배는 수아킨으로 갈 것이다. 엔진 Rpm 1,600. 나는 이대로 방향만 최대한 역풍을 덜 받도록 침로 조정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앞으로 더 장거리 항해 구간이 많다. 풍랑도 이보다 더 심할 수 있다. 지금은 홍해가 어떻게 심술을 부리는지 지켜봐야할 때다.
오전 5시 33분. 펀칭이 너무 심해 배속도가 0노트가 나왔다. 역풍 20노트다. 콕핏으로 파도가 들어온다. 일단 펀칭을 피하기 위해 변침한다. 목적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펀칭과 역풍을 피하기 위한 임시 변침이다. 일단 이렇게 몇 시간 버텨보자. 선속은 4.0 노트다. 이번 항해 들어 처음으로 오토파일럿이 코스 이탈을 한다. 선속 0노트라니. 이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바람과 파도가 변할 것이다. 펀칭을 맞는 것보다는 일단 피해가자. 모로 가도 수아킨만 가면 된다. 이렇게 피하며 바람이 잦을 때까지 기다리자. 이런데도 선실에서 멀미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내가 훈련이 많이 됐다. 구름이 연하게 보인다. 새벽이 오려나보다.
오전 6시 10분. 방향을 육지 쪽으로 돌린다. 이왕이면 원래 항로 기준으로 육지 방향 삼각 항로를 만들어 태킹을 반복하며 지그재그로 가자. 그편이 더 짧은 항로다. 그러다보면 바람과 파도가 잦아 들지 모른다. 날이 밝으면 파도의 방향이 뚜렷이 보인다. 파도 1미터 내외, 무척 거칠다. 피항 항로로 펀칭 없이 진행하니, 아내와 아기가 잠시라도 편히 잘 자기를 기도한다.
이번 역풍을 맞아 보니, 영국선장 마크가, 바람이 맞지 않으면 Bab al-Mandab Strait를 나갈 수 없다. 는 말의 의미가 절실히 와 닿는다. 홍해 입구엔 항상 바람이 강하고, 그 바람을 잘 타지 못하면, 아예 오늘처럼 0노트가 되는 거다. 만일을 대비해 홍해 입구의 피항지를 알아봐야겠다. 수아킨에 나와 같은 항로로 가는 선장을 찾아보고 그와 의론해야겠다. 결코 쉬운 항로가 아니다. 파도가 나를 덮쳤다. 얼른 노트북을 닦아야겠다.
어차피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니 집세일과 메인 세일을 축범해서 전개했다. 바람은 20노트, 엔진을 중립에 두고, 선속은 2.9 노트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진행하며 시간을 벌자. 배가 너무 느리니 파도의 영향이 더 크다. 집세일과 메인세일을 좀 더 편다. 크로스홀드 풍속 22노트, 선속 5.5노트. 엔진은 중립. 모처럼 세일링 같은 세일링 한다. 오늘 역풍으로 선속 0노트를 맞고 보니, 선속 5노트는 감지덕지다. 아내는 가벼운 멀미. 오늘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한다?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가 무섭다.
오전 7시 30분. 풍속이 24노트다. 선속은 5.7노트, 바람이 더 세지면 오토파일럿은 안 된다. 오트파일럿은 풍속 30노트까지 사용하라고 한다. 25노트 이상 넘어가면 더 축범 하자. 메인세일 시트를 풀어 바람을 좀 풀어준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선장의 고민도 깊어간다.
파도가 높아진다. 1.5미터 정도. 파도가 포트 쪽으로 넘어 들어온다. 리나는 빵을 주니 먹지 않는다. 리나도 속이 좋지는 않을 거다. 잠을 좀 자면 아빠 맘이 편하겠는데, 자지 않는다. 바람은 계속 22노트다. 해안까지는 15해리 정도 남았다. 5해리 정도 남기고 태킹하자. 앞으로 2시간. 아내와 아기가 좀 쉴 수 있기를 바란다.
오전 9시 40분 태킹 했다. 방향이 24번 웨이포인트 쪽이다. 좋다. 이대로 진행한다. 바람이 좀 잦아들고 파도는 그대로다. 리나 아침 식사를 필사적으로 만들어 몇 수저 먹였더니 다 토한다. 멀미 하나보다. 흔들리는 배에서 이것저것 다 닦고 재운다. 어제 외부 파도가 들이쳐 해치를 모두 닫고 자는 바람에, 선실이 엄청 더워서 잠을 못 잤다고 한다. 지금 리나와 엄마는 잠이 보약이다. 아내와 의론한다. 앞으로는 배 속도 날 때 무조건 많이 달리자. 도착 시간 맞춘다고 여유 부릴 이유가 없다. 이대로 24번 까지 갔다가 바람이 잦으면 기주하자.
여기서 정리. 홍해는 조류가 상당하다. 남에서 북쪽으로 1~4노트 사이로 흐른다. 기름은 무조건 가득 채우고, 여유분도 많이 싣자. 수에즈에서 수아킨까지 5일 동안 잘 오고, 마지막 하루가 난관이다. 그러나 이게 이틀이 될지, 사흘이 될지는 날씨에 달렸다. 6일 계획 항해가 7~8일이 걸릴 예정이다. 그러므로 수에즈에서 수아킨으로 오는 배는 연료, 물, 식량을 적어도 10일 치 이상 넉넉히 싣고 다니자. 아내와 리나가 고생이다. 미안하다.
오전 11시. 풍상 10노트로 줄었다. 파도도 얕아졌다. 얼른 세일을 다 접고 방향을 25번 웨이포인트로 직접 향한 뒤, 엔진 Rpm 1,600으로 밀어본다. 선속 3.5에서 4.0이 나온다. 좋다. 이대로 계속 가자. 바람만 더 잦아 들면 4.5 노트도 바래 볼 수 있다. 남은 거리 144해리. 평생 기억에 남을 멀고 먼 144마일이다.
또 하나 실험을 해본다. 볼보펜타 D2-75 엔진 자료에 보면, 1,600 Rpm 일 때 시간당 2.7리터를 소모한다. 1,800 Rpm 일 때는 3.7리터를 소모한다. 1,600 Rpm 일 때는 41시간 110.7리터. 1,800Rpm 일 때는 33시간 122.1리터. 겨우 11.4리터 차이다. 이탈리아에서 검사원 루카가, 이배의 엔진은 최대 2,800 Rpm로 제한 되어있고, 주행은 2,000 Rpm으로 하라 했다. 그러니 1,800Rpm이면 충분히 여유 있는 거다. 해서 1,800Rpm으로 속도를 높여 봤더니, 펀칭이 너무 심해진다. 실험은 실패! 파도가 세지 않을 때는, 가끔 1,800 Rpm 운행도 해봐야겠다. 속도로 시간을 벌면 연료 차이는 크지 않다.
오후 12시 32분, 풍상 10노트, 선속 4,0~4.2 노트, 140해리 남았다. 이대로 라면 하루하고 12시간 정도다. 지금 상태라도 좋다. 바람이 강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리나에게 이집트에서 산 치즈 2장과 요구르트 300 미리를 먹였다. 힘이 나는지, 벌떡 일어나 사고 칠 준비 중이다. 아내는 수면 중.
오후 1시. 파도가 더 낮아졌다. 남은 거리 138해리. 다시 1,800 Rpm 으로 운항해 본다. 선속 4.5노트, 예상 운항 시간은 하루 하고 7시간. 총 31시간이다. 연료는 114.7리터 소모한다.
오후 2시. 아내는 옥수수 콘 1개. 리나는 맨밥과 물, 나는 부대찌개와 양상추로 늦은 점심을 한다. 엔진 Rpm 1,800, 선속 5.4노트, 이대로만 간다면 딱 24시간 후 도착이다. 연료 88.7 리터 소모다. 낮에 도착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수단 해안엔 암초가 많다. 혹시 몰라 피항지를 찾아보니 근처에 한 군데도 없다. 섬이 많은데 너무 깊거나 너무 낮다. 암초 표시 아니면 Unsurveyed 다. 항로를 벗어나면 좌초될 위험이 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로를 준수하자. 가는 도중에도 나비오닉스를 줌인 해 가며 암초지대를 확인하자. 근데 직선거리 10해리면 수단 해안인데 왜 아무 것도 안보이지? 해무가 옅게 끼었나보다.
오후 3시. 제네시스는 6.0노트의 무서운(?) 속도로 쾌속 주행 중이다. 바람은 8노트, 포트 크로스홀드. ETA 는 내일 오후 1시. 리나와 아내는 짝짜꿍 놀이 중. 리나 키가 선실 문과 같기에 재보니 77Cm. 많이 자랐다.
오후 4시 15분. 10마일 밖의 아프리카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해도 상의 등대는 정확히 나타났다. 수단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등대는 바늘 같다. Abington reef 위에 있다는 등대. 레이더에도 잡혔다 사라졌다 한다. 나는 풍랑을 만난 탓에 거리를 좁히려 육지에 가까이 운항하지만, 원래는 30~50해리 이상 이격하여 항로를 잡았었다. 포트수단이나 수아킨으로 가는 배들은 충분한 이격 거리를 두고 항해하기를 권유한다. 암초가 많다.
멀리 섬 그림자가 보인다. 아프리카 수단이 얼마나 안전한지는 잘 모르겠다. 남수단은 여행금지 구역으로 안다. 애초에 항해하면서 인터넷으로 조사 확인하려는 계획 자체가 다 엉망이 되었다. 한국 빼고 고속 인터넷은 없었다. 촬영한 동영상을 보낼 방법이 없다. 이집트부터는 핸드폰 로밍이 전부다. 10기가에 8만원짜리다. 수단은 육지가 빤히 보여도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 만약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는 게 답이다. 나와 보니 한국은 상당히 괜찮은 나라였고, 중동과 아프리카는 믿을 수 없이 낙후 되었다. 수아킨에서 직접 보고 자료를 남겨야겠다.
월요일 오후 1시에 떠나 일요일 오후 1시에 도착하면, 정확히 6일이다. 날수론 7일. 144시간. 예상 연료 사용량 316.8리터. 수아킨에서 정확하게 확인 해 봐야겠다. 역류와 풍랑으로 예상보다 12시간 더 항해했다. 앞으로도 이런 연장항해는 비일비재할거다. 연료량을 잘 체크하자. 그리고 아덴만 지역을 지나갈 때, AIS 끄고, 무선 통신 하지 말고, 야간 항해등을 켜지 말라는 데, 사실인지 확인필요.
오후 8시 45분. 엔진 Rpm 1,800, 선속 5.6 노트, 수아킨 까지 96.8 해리, ETA 26일 오후 2시 5분. 파도도 높지 않고 운항 여건이 아주 좋은 상태다. 오늘 새벽 풍랑에 대면 하늘과 땅, 지옥과 천국이다. 내일 오후면 빨래와 샤워도 하고, 보급품을 챙길 수 있다. 계획은 수아킨에 3일 정도 머물고 출항할 계획이지만, 수아킨에서 요트 선장들과 기상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의견 나누어봐야겠다. 같은 항로 선장이 있다면 선단으로 운항해도 좋겠다. 그나저나 앵커링으로 마리나에 머무는 건 처음인데, 또 바닥에 걸릴까봐 앵커 내리는데 트라우마가 있다. 지난번 앵커 손실 이후, 윤태근 선장님께 앵커 회수 밧줄 설치하는 것을 배웠는데, 이번에 반드시 잘 설치해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야겠다. 앵커 회수 밧줄 설치, 잊지 말자. 앵커링 마리나에서 기름과 물, 식료품 공급은 어떻게 하는지도 잘 보고 배우자. 유럽식 무어링부터, 이번 항해에서 처음 해보는 게 참 많다. 한국에서는 절대 해볼 일 없는 상황들. 아프리카 수단 해안선엔 불 빛 하나 없다. 초승달이 공허한 바다를 밝게 비춘다.
오후 11시 30분. 선체가 파도를 일으킬 때마다, 플랑크톤이 빛을 낸다. 제네시스는 후미등이 너무 밝아 플랑크톤 보는 덴 현측이 낫다. 홍해의 플랑크톤은 크고 뚜렷하구나.
3월 26일 일요일 오전 2시 30분. 배가 6.9 노트다. 풍하 15노트, Rpm 은 1,800 그대로다. 조류가 바뀐 모양인데, 포트 수단 근처만 이런 지 확인해야겠다. Rpm을 1,500으로 줄인다. 선속 5.9 노트가 됐다. 지나는 배들이 많다. 레이더 위치 데이터가 나갔다 들어온다. 레이더 고장 중 하나인가?
오전 4시 13분. 레이더 가드존 알람이 울린다. 좌현으로 배들이 많다. 풍하 15노트, 선속 5.9. 포트 수단 앞 바다를 지나는데 해안선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야간 접근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 수아킨까지 51.8 마일 남았다. 날이 다시 차다. 선실 안도 쌀쌀하다. 배안에 무시동 히터가 장착되어 있지만, 아내는 이탈리아에서부터 ‘공기가 탁해 진다’며 사용하지 않는다. 메인세일 붐카 소리가 시끄럽다. 수아킨에 가면 자기 융착 테이프를 감아 두어야겠다. (엄청난 진단 미스)
오전 4시 40분. 우측 Sanganeb Reef의 등대 불빛이 깜빡인다. 여기에 아주 작은 앵커링 마리나가 있다. 위급 시 피항처다. 아름다울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지나친다.
오전 5시 40분. 풍하 20노트다. 맞바람 이었으면 어제 새벽 같은 풍랑 상황이 벌어질 뻔 했다. 운이 좋다. Rpm 1,500 에 선속 6.1노트다. 조류가 멈추고 뒷바람이면 속도가 이 정도다. 지부티까지의 바닷길이 궁금해진다. 조류와 바람. 세일요트에겐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지대한 항해 요소다. 이제 2시간 30분 후면, 스타보드로 침로 변경하여 수아킨으로 진입한다. 입구의 Al Farana (Seldom breaks) 가 있는 TOWARTIT REEFS를 주의하여 지나야 한다. 온통 암초에 Unsurveyed다. 포트 수단 앞바다에 여명이 밝아온다.
오전 6시. 여명에 갑판으로 나가 붐카를 확인해보니 저런! 붐카와 메인세일 펄링 시트를 연결하는 샤클의 볼트가 풀렸다. 다행이 샤클과 볼트는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얼른 손으로 대충 조여 놓고 돌아온다. 날이 밝으면 플라이어로 제대로 조여야한다. 강풍에 저게 풀려 날아갔으면 대형사고 날 뻔했다. 정상이 아닌 소리가 나면 무조건 확인 또 확인이다. 자기 융착 테이프? 어이없네.
갑판에 나가보니 팥알만한 벌레들이 갑판에 쫙 붙어있다. 무척 많다. 열린 해치로 실내에도 들어갔을 것 같다. 일단 선실로 들어가 열린 해치들을 다 닫는다. 사람에게 해로운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 이렇게 몰려왔을까? 지중해 항해 때도 그랬지만, 아프리카 쪽으로 오면 벌레들에 대한 대비도 해야겠다. 아내는 질색한다. 아무도 이런걸 말해 주지 않았다고 투덜댄다. 그들은 벌레가 없을 때 왔거나 별 신경 안 썼겠지. 여기서 코미디. 아내는 갑판의 벌레들을 보고 바닷물 청소로 싹 밀어 냈으면 좋겠다고 한다. 수아킨에 도착하면 그러자고 답한다. 지금 하면 안되냐? 고 한다. 참 상식에 반하는 말이다. 나더러 지금 갑판에 가서 죽으라는 말이냐? 반문한다. 그건 아니란다. 그럼 왜 이렇게 흔들리는 배에서 갑판 물청소를 하라는 거냐? 물으니, 지금 못하는 거냐? 고 묻는다. 더 할 말이 없다.
오전 7시 50분. 거대한 카고들이 양쪽에서 오고 있다. 선실에선 압력 밥솥에 밥이 거의 다 되고 있다. 풍하 17노트, 뒷파도 1.5미터. 배가 많이 흔들린다. 수아킨 마지막 코스는 하늘이 돕는다. 고생 할 만큼 했단 뜻인가? 재빨리 압력밥솥 가스 불을 끄고, 우현 배를 살핀다. 아직 거리가 있다. 우리가 통과할 수 있다. 다시 좌현 배를 본다. 충돌 가능성이 높다. 포트로 20도 침로 변경해서 카고의 스턴으로 조정한다. 카고는 생각보다 빠르다. 우리 앞을 유유히 지나간다. 포트 수단으로 들어가는 배 같다. 잠시 긴장했다가 리나에게 햄 계란 볶음과 안남미 밥을 먹인다. 밥알이 날아다닌다. 그러나 리나는 잘 먹는다.
핸드폰 GPS가 자주 미친다. 그럴 때마다 8자로 흔들어 보정을 한다. 점점 더 자주 이러니 불안하다. 항해 전엔 핸드폰도 신형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2년 넘은 전화기라 슬슬 말썽이다. 수아킨까지 25.1해리. ETA 오후 1시 30분이다. 벌레를 잡다보니 귀뚜라미도 나온다. 역시 아프리카는 동물의 왕국이네. 잔모래 먼지도 자욱하다.
수단은 어떤 나라일까? 20마일 앞인데도 전화불통, 해무에 가려 뭍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상의 암초지대를 피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진행 중이다. Rpm 1,500. 선속 6.0 노트. 롤링과 요잉이 심하다. 14 마일 전방에서 핸드폰 위치가 엉망이 된다. 10초에 한 번씩 나비오닉스 진행 방향이 360도 빙빙 돈다. 인터넷이 안 되니 문제점 해결을 찾아 볼 수도 없다. 예비로 가져와 리나의 뽀로로 시청에 쓰이는 삼성 패드를 급히 투입한다. 하필이면 암초 지대 한가운데서 핸드폰 GPS가 엉망이 되다니. 예비 삼성 패드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야간에 이랬다면 죽은 목숨이었겠지. 혹시 구글 맵으로 방향을 찾을 수야 있겠지만(안 되려나?), 암초지대가 표시되지 않으니 별 무소용이다. 장거리 항해엔 나비오닉스 프로그램도 2대 이상의 폰이나 패드에 깔아야 한다. 또 하나, 오토파일럿의 COG 각도를 늘 기억하고 있다가 GPS가 오작동 할 때 참조하여 조향해야 하겠다.
11시 10분. 9.5 해리 남았는데도 육지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문자가 막 날라 온다. 전화가 터진다! 인터넷은 아직 안 된다. 서둘러 부모님께 전화한다. 역시 염려를 많이 하고 계신다. 이렇게 탯줄처럼 부모님 음성을 들으니 힘이 난다. 근데 시간을 어디다 맞춰야 할까? 여기는 다시 10시 15분이다. 홍해에서는 11시 15분이었는데. 뭐 느린 요트 타고 세계일주하는 입장에서 1시간 차이가 세상을 말아 먹지 않으니 그냥 핸드폰에 나오는 대로 적자.
앵커 스위치를 켜고, 앵커를 시험해 본다. 잘 작동 된다. 앵커 회수 줄과 노란 참외부이를 단단히 묶었다. 이젠 앵커가 걸려도 잡아 다녀 회수할 수 있다. 다신 앵커를 잊어 먹지 말자.
수아킨이 안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대단한 도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지막한 구릉에 불과하다. 수로 양쪽으로 표시 기둥들만 보인다. 여기는 핸드폰 데이터 로밍이 안 된다. 전화만 된다.
오후 1시. 아무도 채널 16번으로 답을 하지 않는 가운데, 제네시스는 수단 수아킨 digna port로 들어왔다. 좁은 수로를 한참 들어가서 다시 콜하니 제네시스 채널 68번으로 대기하라고 한다. 아마 에이전트 모하메드에게 연락 해 줄 모양이다. 멀리 세일 요트들의 마스트가 보인다. 앵커링 장소로 가는데 갑자기 수심이 낮아진다. 1.5미터, 급히 우측으로 돌아가니 수심 6미터다. 폭이 겨우 20미터도 안되겠다. 양쪽에 다 부서진 건물들이 보인다. 전쟁이라도 한 건가? 완전 폐허 들이다. 바람이 강한 가운데, 적당한 곳을 찾아 앵커를 내리니 앗! 앵커 설치를 잘못했다. 앵커를 처음 보자마자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연결했는지 알 수 없었다. 써 보니 잘 못 된 걸 알았다. 그러는 사이 강한 바람에 밀려 배가 떠내려간다. 옆의 독일 요트와 충돌할 뻔했다. 아내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다. 어찌어찌 다시 앵커를 올리고 아내에게 배를 앵커링 장소에서 천천히 돌아달라고 말한다. 그러는 사이 미국 요트가 저쪽에 대라고 큰 소리로 알려준다 나는 지금 장소가 아니라 앵커가 문제라고 외친다. 아내는 자신이 없다며 휠에서 손을 뗀다.
혼자서 앵커를 다시 매는 사이 배가 막 떠내려간다. 바람은 계속 강하고 배는 밀리고 앵커는 사용할 수 없고, 난감한 상황. 옆에 프랑스 요트에 배를 대고 앵커를 수리하려고 부탁하니 그러란다. 그런데 우리배가 너무 크다. 바람에 배가 휙! 돌아가 선수가 프랑스배 옆구리로 간다. 충돌할 뻔하고 다시 떨어진다. 갑자기 딩기보트가 한 대 온다. 독일인 마르코 선장이다. 톨스와 비슷하게 생긴 북유럽 사내다. 그가 배에 올라 앵커를 보더니. 일단 이곳에 앵커를 내리자고한다. 나는 앵커가 문제라고 하니, 알겠다며 릴렉스 하란다. 아내와 내가 어지간히 소란스럽게 한 모양이다. 일단 앵커를 내리고 배를 정박한 뒤, 앵커의 문제점을 살핀다. 그가 쉽게 문제점을 파악한다. 앵커 사슬에 밧줄을 매어 고정 한 뒤, 사슬 뒷부분을 전부 빼서 제대로 끼운다. 큰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역시 대단한 선장이다. 앵커 샤클이 약하다고 자기 것을 준다고 한다. 정말 고맙다.
마르코는 내가 좁은 수로를 잘 통과해 왔다며 며칠전 2대가 모래톱에 좌초됐고 그중 한대는 터그선을 불러 빠져나갔다고 한다. 내가 앵커 회수 부이를 띄운 것을 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한다. 저배는 10년째 항해 중, 저 미국 배는 4년째 항해 중. 보니 주변 7대중 회수 부이를 설치한 배는 없다. 회수부이를 하면 지나가던 배에 걸려서, 그 배는 스크류에 문제가 생기고 내 배는 앵커가 들려서 떠 내려 간다. 두 배 모두 문제가 생기는 거다 라며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나 홀로 앵커링할 때 써야겠다. 나비오닉스로 배가 떠내려가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돌아갔다. 그런 사이 에이전트 모하메드가 왔다. 그는 샤프한 사람이다. 내게 필요한 내역을 확인하고 달러로 쫙 정리한다. 여기는 카드도 안 되고 ATM도 없단다. 내가 웨스턴유니온으로 모하메드에게 돈을 보내면, 달러로 바꿔 사용한다고 한다. 내일 아침 같이 해보자.
3시가 넘어 간단히 점심을 먹는다. 손이 막 떨린다. 점심을 다 먹으니 마르코가 다시 왔다. 딸 마티아 (6세) 까지 같이 왔다. 너무 귀여운 아이다. 4년 전에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했으니 당시엔 마티아도 2살이었다고 한다. 리나와 인사하고 사진 찍고 논다. 나와 마르코는 앵커링 장소를 다시 찾아 이동한다. 마르코가 조정하고 내가 앵커 샤클을 교체한다. 마르코에게 배운 대로, 앵커체인을 당겨 밧줄로 연결해서 앵커모터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밧줄이 길면 길수록 텐션이 있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정석이다. 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길래, 내가 텐더 고무보트가 처음이다. 같이 한 번 설치, 운항 할 수 있겠나? 당연하지. 둘이서 텐더 보트를 내려 엔진을 싣고 시운전 해본다. 바닥에 물이 좀 새지만 문제없다. 잘 달린다. 노를 찾아 설치해야겠다. 또 다른 문제는? 응 선상 무전기가 고장이다. 한번 보자. 무전기 마이크 줄 부분이 덜렁거린다. 마이크를 열어보니 연결 커넥터가 빠졌다. 끼우고 VHF 68 번으로 마르코의 부인을 부른다. 잘 된다. HI/LO 기능도 배웠다. 원 이런 천사 같은 친구가!
그러는 사이, 모하메드의 직원이 고무보트를 타고 SIM 카드를 가져왔다. 연결하니 카카오톡이 된다. 숨 돌릴 틈 없이 시간이 지난다. 수아킨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장소 중 하나다. 그러나 신실한 이슬람들이라 밤에 다녀도 안전하단다. 그러나 밤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수아킨 시장엔 가격표가 하나도 없어 알 수 없단다. 1시간 거리인 포트 수단으로 가면 1인 택시 5달러! 거기엔 제대로 된 수퍼마켓이 있단다. 내일 오전 9시에 다른 선장들과 가기로 했단다. 나도 같이 만나 시장에 가기로 한다. 모하메드가 내일 오전 8시에 와서 비자와, 마켓서 쓸 현지 돈을 바꿔 준단다. 뭐든 어떻게든 해결되고 있다.
위성전화로 청해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도착 상황을 알려 준다. 인터넷이 되자 해수부에서도 연락이 온다. 마르코에게 물어 본다. 독일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번 체크 한다고 한다. 아덴만은 수많은 군함들이 있어 안전하지만 그래도 긴장해야 한다며, 상선들 가운데 코스로 가라고 한다. 톨스에게 들은 대로다. 덴마크 선장 톨스에 대해 물어 보니 잘 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다고 한다. 역시 인도네시아는 가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선장이 나와 같은 코스를 간다니, 내일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야겠다.
오후 7시. 이제야 간신히 짬이 난다. 오늘 무전기 수리, 앵커 수리, 텐더보트 시운전까지 마쳤다. 길에서 만난 친절한 선장들 덕에 고민이 해결되고 있다. 씨맨십을 제대로 실감하고 았다. 오늘은 침실에서 마음편히 푹 자자.
첫댓글 읽다보니 새벽 1시.......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