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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40-56, 믿음의 시련, 24.11.10, 박홍섭 목사
지난주에 우라는 광풍을 뚫고 호수 건너 이방 거라사 지방에 가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주님의 은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돼지 떼를 손해 본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가 주기를 청했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갈릴리에는 거라사 지방과 달리 많은 무리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중에는 회당장 야이로도 있었습니다.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기능과 더불어 학교와 재판과 같은 많은 사회적 기능들도 수행되었던 곳입니다. 회당 장은 이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그 지역의 안식일 예배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나 회당 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들은 유대 장로 중에서 특별히 뽑힌 자들로 사회적 존경과 종교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가 엎드려 간구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는 모습은 대단히 이례적입니다. 당시 거의 모든 회당 장들이 예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으므로 이 사람의 행동은 이례적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가 속한 유대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모든 명예나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주님의 발 앞에 나와 엎드려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외동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지키고 딸의 목숨을 잃는 것이 낫는가? 아니면 딸의 목숨을 위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간청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주위에 자신의 자리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딸의 생명이나 가족의 건강을 포기하는 아버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승진과 출세, 성공과 명예를 위해서 오히려 딸이나 가족을 희생시키는 비정한 아버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자신의 사회적인 명예와 신분, 그리고 재정적인 안정을 포기할 각오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12살 어린 외동딸이 있는 집으로 와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속으로 조용히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적으로 ‘왕따’당할 각오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드러내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회당장 야이로가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좀 힘들어도 시간만 지나면 호전될 수 있는 문제로는 좀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이런 애걸을 하지 않습니다. 야이로도 보통 때 같으면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은 절박한 상황에 부딪혀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나마도 하지 않은 강퍅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이 참으로 힘들고 아픔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얼마나 필요한 고통인지요? 옛날 청교도들이 고통과 역경을 변장 된 축복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절박한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님 앞에 나왔겠습니까? 그는 지금 오직 한가지 사랑하는 딸의 생존을 위해서 “주님 제발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제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 집에 오셔서 딸을 만지시고 딸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소리치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절박한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그와 함께 죽어가는 딸이 있는 집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나의 문제가 있는 곳으로 나와 함께 가신다면 그 문제는 끝난 것 아닙니까? 주님이 내가 가진 절망의 현장으로 나와 더불어 가고 계신다면 그 절망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죽음의 현장으로 나와 더불어 가고 있다면 그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우리의 문제를 내어놓고 겸손하게 주님의 발아래서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딸의 치료를 위해 가는 그 소망의 과정에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밀려와 예수님과 자신의 행렬을 둘러싸고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 ‘밀려들다’라는 단어는 숨통을 막았다는 뜻입니다. 이들 때문에 한시가 급한 행로가 마치 숨통이 막히듯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교통체증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자동차 행렬에 버금가는 지체입니다. 거기에 더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출현입니다. 가뜩이나 무리로 인해 지체하고 있는데 이 여인 때문에 더 지체됩니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간입니다. 빨리 예수님을 모시고 죽어가는 딸이 있는 집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주님의 옷자락 끝을 만졌습니다. 그 순간 즉시 출혈이 멈추었고 12년이나 낫지 않았던 그 지긋지긋한 불치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길을 멈추어 누가 내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다.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의도가 있죠. 주님은 지금 믿음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혈루증 여인을 드러내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면서 그녀의 믿음을 제자들과 무리들 앞에서 가르치십니다.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어떤 의도입니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는 의도도 있지만 야이로의 딸이 죽기를 기다리는 의도입니다. 지금 주님은 혈루증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그녀로부터 치유 받은 과정을 드러내신다고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아까운 시간을 다 허비하고 계십니다. 회당장의 12살 딸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이요 혈루증 여인은 이미 12년째 그 병을 앓아온 만성질환자입니다. 당장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그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굳이 그 여자를 찾으시고 또 대화를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나은 과정을 설명하게 하시면서 시간을 지체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주님께 나아가 간구했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문제에 개입하셔서 희망이 보입니다. 절망의 끝이 보이고 희망의 시작이 느껴집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밝은 미래가 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가던 길을 멈추십니다. 잘 진행되는 것 같았고 이대로 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은데 갑자기 주님께서 모든 것을 스톱하십니다.
이때 들려오는 소식을 보십시오. 49절입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밀려든 무리들과 갑자기 등장한 혈루증 여인 때문에 딸을 고치러 가는 길이 지체되었고 과정 중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집니다. 지금까지 그가 체면과 지위와 자존심을 다 밀쳐놓고 예수님을 찾아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한 이유는 오직 한가지 그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고 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님의 딸로 살아났지만 12년을 살았던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모든 상황 끝입니다. 지금 야이로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식 가운데 가장 비참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망과 고통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주님이 나의 절망에 개입하셔서 희망의 길로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이런 기대와 희망도 없었을 텐데 잘 가던 중간에 혈루증 여인이 나타나 갑자기 가던 걸음이 멈추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모든 상황이 끝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원망하면서 혼자 빨리 집으로 가서 장례준비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집으로 가는 길을 지체케 했던 혈루증 여인에게 이 모든 것이 당신 때문이라고 분노를 쏟아내어야 할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왜 이렇게 죽음으로 끝날 일을 괜히 기대만 부풀게 해서 엄청난 실망과 상처로 끝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믿음의 행렬에 이런 시련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5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원망도 말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지도 말고 또 두려워하지도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생각처럼 상황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보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은 바로 지금부터 진짜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상황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때 계속해서 주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모든 상황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생이 경험하는 최후의 절망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삼킵니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노인들도 삼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의 상황 끝이 새로운 상황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을병을 살리는 의사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장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 이미 완전히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서 정상적으로 살려내려 하십니다. 덜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완전히 죽어서 곡하는 사람들이 와서 곡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고 아이를 살려내십니다. 52-56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달리다굼)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사람은 한번 죽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죽음의 강은 돌아올 수 없는 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강을 건너오실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을 그 죽음의 강 건너편으로 데리고 오실 수도 있습니다. 이미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부르고 있는 주님을 보십시오. ‘달리다굼’ 마치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죽었던 아이를 그 죽음에서 깨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 능력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회당장의 딸이 죽기까지 지체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게 하시는 엄청난 믿음의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은혜보다 훨씬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복을 주시며 더 큰 영광을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세계가 있으며,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살리러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고는 바로 가시지 않고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가시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죽어버렸습니다. 이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오늘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지체하지 않고 여기에 바로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도 너희가 믿으면 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순간 여전히 주님을 믿으면 마침내 주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믿으면 내 영광을 볼 것이라” 바로 그 말씀을 오늘 야이로와 우리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러니 믿음의 길을 가다가 시련을 당하면 이제 상황 끝이라고 좌절하고 원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을 때 바로 그때 주님을 더 신뢰해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을 통하여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기 때문에 야이로가 받은 복은 딸이 그냥 치료되었을 때보다 훨씬 큰 복입니다. 간단하게 중병에서 치유되는 것하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하고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충격적인 믿음의 시련을 통과해서 마침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깨우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때때로 우리를 위기의 순간 속으로 밀어 넣으시고 가시던 길을 때때로 멈추시곤 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데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믿음의 시련이 올 때가 있습니다. 광야의 뜨거운 동풍이 있고 죽음 같은 절망이 있고 사막 같은 가뭄이 있고 내 뜻과 다른 하나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이것이 나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믿음의 시련임을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여겨질 바로 그때 하나님의 상황은 시작됩니다. 낙심하지 말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끝까지 믿음으로 따라가서 주님이 준비해놓으신 영광을 경험하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