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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것을 나누라(2265.2024.9.1.교역자보건주일설교)
갈6:6-10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목사님도 사랑--옆사람과--사랑합니다.--
지난주간에 한려지방과 필리핀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에 가서 부흥성회에 참석을 하고 교역자회의 참석을 하고 대화를 하고 왔습니다. 선교지역은 시간이 없어서 둘러보지 못하고 나와서 금요일 성도여러분들과 함께 경주에서 삼남연회 남선교회에서 주관하는 평신도 수련회에 참석을 해서 은혜도 받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악수를 했더니 손이 얼얼 합니다. 일주일 내내 한려지방으로 필리핀지방으로 경주로 달렸습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해주시고 참여해서 운동 해 주시느냐고 고생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달째 이렇게 매일 몇군데씩 돌아다니고 있어 체력이 문제인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고 있고 잘 버티고 있습니다.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 흘러 발리 지나갑니다. 여름이라 덥나 싶더니 이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벌써 9월이 되었습니다. 9월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여름내 땀 흘려 지은 농사가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머잖아 황금벌판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애쓰고 힘써야 할 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요즘 날씨가 한낮에는 더운데 아침저녁에는 시원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7일은 절기상으로 맑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입니다.
옛부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한낮에는 따끈따끈하고 아침저녁에는 시원한 날씨가 되어야 출수(出穗=벼이삭이 나오는 것)도 잘되고 곡식들이 여물이 잘 든다고 하여왔습니다. 요즘 날씨가 바로 그런 날씨가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조심스럽게 풍년을 기대해 봅니다. 추석이 이달에는 있는데 벌초를 하러 가면 말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벌을 쏘이면 빨리 병원으로 가서 주사를 한대 맞아야 쇼크가 안일어납니다. 말벌에 쏘여서 죽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가을에 열매가 풍성하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지키는 ‘교역자 보건 주일’입니다. 교역자 보건 주일은 매년 9월 첫 주일로 정하여 지키는데 이날은 특별히 교역자 즉 목사와 사모의 건강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헌금도 하는 날입니다. 일년동안 목사님의 말씀을 먹고 자란 성도들이 목사님 사모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건주일 헌금을 해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병원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맛있는 것도 사 잡수고 하는 것인데 여러분이 지난 일년동안 받은 은혜대로, 목사님을 많이 부려먹은 사람은 많이, 적게 부려 먹은 사람은 적게라도 목사님 사모님을 섬겨보는 기회를 드려 보겠습니다. 맨날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데 아버지한테 대접할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교역자 보건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좀 더 장기적이고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자신의 건강을 잘 관리하여야 함을 다짐하고 교회는 목회자의 건강을 생각하고 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목회자는 흔히 하나님이 건강을 책임져 주시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너무 방치하고, 너무 과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챙겨주어야 합니다.
딤후4:20절‘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드로비모는 바울과 함께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 하여야 할 사람인데 병듦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밀레도에 머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건강해야 주님의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달에 감독과 감독회장 선거가 있는데 그 감독후보자 등록서류에 대학교 이상 병원에서 건강진단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잘 간수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방치하게 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고 합니다. ‘있을 때 잘해’ 하는 노랫말처럼 건강도 건강할 때 잘 지켜야 합니다. 교역자는 항상 헌신과 희생에 대해 설교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건강을 잘 볼보는 일이 마치 하나님께 죄송한 것처럼 여기고, 오직 사명과 헌신, 희생을 우선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신의 건강을 뒤로 미루고 교회와 성도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목회자의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건강을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목회자는 목회활동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는 건강에 최대의 적입니다. 딤전5:23절에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권면을 합니다. 연소한 디모데가 목회하면서 사역의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건강에 대한 생각을 바로 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도 하나님이 세우신줄 믿습니다. 목회자 보건주일에 목사가 참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시73:28절‘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도 쉽습니다. 하나님 이것, 하나님 저것,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멀어지면 우리의 삶이 얼어붙고, 불행해집니다. 예배를 빼먹고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면, 우리 주변은 하나 둘씩 얼어붙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열매를 거두고 시험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멀찍이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밀착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전에는 주님과의 교제가 즐거웠는데 지금은 그 교제가 시들해지신 분이 있습니까? 전에는 참 열심이었는데 요즘은 옛날이야기나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봉사도 거리를 두고, 헌금도 거리를 두고, 기도도 거리를 두고, 그것이 시험의 자리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을 한번 살펴보세요.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주님을 잊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기독교대한 감리회가 교역자들의 건강이 교회의 건강에 지대하기 때문에 정한 주일입니다. 교역자의 건강과 영혼이 늘 맑아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성도의 영혼을 보살피는데 활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해마다 건강진단을 하게하고 온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와 순종과 협력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목사로서 밖에 나가서 성도들을 무지하게 자랑을 합니다. 자랑거리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도 저와 집사람을 위해서 맛 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기도도 많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1년에 한 주간을 정해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평상시 기도하지 못하던 분들도 이날만은 담임 목사와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또 헌금도 해서 담임목사의 건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으는 주일입니다. 교역자와 그 가정의 건강을 위해서 특별히 헌금을 하는 주일입니다. 비록 헌금을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래도 저와 저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의 사랑에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으며 성도여러분의 가정에도 늘 주님 안에서 평강이 넘쳐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좋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목회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이렇게 성도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습니다. 민6:22-2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했습니다.
저는 상주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부족하지만 저를 만나서 신앙생활 하시면서 행복해 했으면 합니다. 목회자를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성도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 목회자들도 있는데 왜 목사님들의 다리는 거는지, 넘어트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리거는 힘을 가지고 목회자를 섬겨보시면 어떠할는지 그 힘을 엉뚱한데 사용하지 말고 목회자와 함께 하는데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그런면에서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들과 함께 주님의 일에 충성할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좀 쑥스러운 질문인데, 여러분들도 행복하시죠?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관계에 실패하는 사람은 그 신앙이 어느 한계선에서 더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꼭 중요한 문제에 걸려서 주저앉고 또 주저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 저교회 기웃거립니다. 그러다보면 신앙도 다 잊어버리고 맘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은 자녀가 평안하고 온전한 인격을 소유한 것을 보셨습니까? 신앙생활이 힘 있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는 하나님의 관계가, 두 번째는 목회자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될 때 신앙생활은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 보건주일에 목회자와 아름다운 관계를 개선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목사와의 관계가 불편하면 모든 것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살전3:12절에 목사를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유는 계속 은혜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가 언제입니까? 통장에 돈이 떨어졌을 때가 위기가 아닙니다. 애인의 사랑이 식은 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위기가 언제이냐 하면 말씀이 도무지 은혜가 되지 않을 때, 이때가 바로 우리 인생의 위기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남들은 다 은혜 받을 때 자기는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말씀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똑같은 말씀에 어떤 사람은 결단을 내립니다. 똑같은 말씀에 어떤 사람은 비전을 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똑같은 말씀에 대해서 더 악해지고 더 부정적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더 상처를 입고 떠납니다. 이런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왜 은혜를 받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목사와 불편한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보면 하나님과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목사와 불편하게 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말씀이 들려지고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목회자가 축복의 통로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목회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살전5:12절‘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라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씀은 ‘요청한다, 간청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간청하고 있습니까? 이어지는 말씀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여기서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또 ‘너희가 알아라’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일까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NIV성경에 ‘안다’는 말로 ‘respec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respect’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존경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2절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목회자들을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존경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존경’이란 말을 좀 더 쉽게 풀이해보면, ‘누구누구에게 가치를 둔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목회자의 가치를 인정하십니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젊은 목회자를 자기 자식 대하듯 허물없이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격의 없이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많이 사랑하시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해주고 싶으니까 그렇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기본적인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젊든, 대하기 편하든, 정말 자식 같게 생각이 되든 목회자로써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목회자들의 마음속에는 늘‘내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지’하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계(바운더리)가 침범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목회자들, 참 교만해졌다’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목사가 목회를 잘 하겠습니까? 아니면, 대충 생각없이 사는 목사가 목회를 잘 하겠습니까? 이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잘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회자를 존경한다는 것은 목사가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고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목사를 존경할 수 있도록 가르치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 혹은 학원 선생님은 존경합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스승의 날이다 뭐다 하면, 자그마한 선물을 사서 보내기까지 합니다. 물론, 요즘은 촌지문제다 뭐다 해서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하면, 뭔지 모르게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말하면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이상스럽게 목회자가 말하는 것은 잘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애야, 목사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지. 생활하면서 힘들 때 있지? 그럴 때 너는 친구를 찾아가겠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목사님께 찾아가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해! 목사님께 기도 부탁을 드려. 엄마·아빠도 너를 위해서 기도하겠지만, 목사님께서 너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주실 거야’ 여러분, 이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목회자를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부모가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이 자녀가 커서도 믿음을 지키고 힘들 때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도 요청하고, 또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존경하는 성도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를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살전5:13절‘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뭐라고 말씀합니까? 가장 귀히 여기라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목사님 소중한지 모르고 다른 교회 어느 목사님, 서울에 어느 교회 목사님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꼴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꼴들을 자꾸 찾아다닙니다. 그건 담임목사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가 최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상담해주는 것은 담임목사이지 서울에 유명한 목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를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음식도 밖에서 사먹어 보십시오. 한 두 번 사먹는 것은 물론 맛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내게 건강이 되고, 내 몸에 유익한 음식은 바로 내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섬기는 제단에서 우리 목사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어야 그것이 진짜 나에게 복이 되고 영적 건강에 이롭습니다. 가장 귀히 여긴다는 것은 ‘우리 목사님이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 부족해도 용납하고 이해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맞지 않아도 용납해주세요. 그것이 목회자를 가장 귀히 여기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2.왜,목회자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것을 나눕니까?
목사는 누구에게나 약자입니다. 목사는 조금만 잘못을 하여도 이것이 큰 화제 거리가 됩니다. 용납이 안 됩니다.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그럴 수가 있느냐’하면서 목사를 신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도 약합니다. 교회에서 집사가 뭐래도, 권사가 뭐래도, 아니면 평신도가 뭐래도, 지는 것이 목사입니다. 목사는 할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변명도 못합니다. 이것이 목사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큰소리 버럭 버럭 질러도 목사는 조금만 크게 소리 내도 혈기 부린다고 합니다. 또 툭하면 우리 목사님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주택 문턱이 높아서 주택을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툭하면 교회 안 나간다고 합니다. 툭하면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목회자 역시 여러분과 동일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회자와 성도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 사랑으로 용납하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혹 말과 행동에 있어서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크게 탓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용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회자에 대한 성도의 의식구조는 대개 비슷합니다.
목사가 나이가 어리면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고, 목사가 나이가 많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목사라고 합니다. 목사가 식구가 많으면 교회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식구가 없으면 그래서 가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목사가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하면 은혜가 없고 능력이 없다고 하고, 원고없이 설교하면 준비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목사가 가난한 사람에게 접근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제스츄어(gesture)를 쓴다고 말하고, 부유한 사람과 친하면 목사가 돈 많은 사람만 알아준다고 합니다.
목사가 예화를 많이 들어 설교하면 성경 실력이 부족하고 깊이가 없다고 하고,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설교가 딱딱하고 어렵다고 합니다. 목사가 죄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인신공격만 하다고 말하고,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않으면 정의감이 부족한 목사라고 합니다. 목사가 교인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목사라고 하고, 비위를 맞추면 줏대가 없고 타협적인 목사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옷을 잘 입고 다니면 너무 사치하다고 말하고, 옷을 허름하게 입고 다니면 교회의 위신과 명예를 떨어뜨리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목사가 밖에 나가 설교를 많이 하면 본 교회는 등한히 하고 밖으로만 나간다고 하고, 밖에 나가 설교를 안 하면 오죽 못났으면 초청하는 사람도 없느냐고 말합니다. 목사가 생활비를 많이 받으면 돈에 밝은 목사라 하고, 적게 받으면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교회 망신시킨다고 합니다.
목사의 사모가 교회 일을 많이 하면 여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고, 사모가 교회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에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목사가 심방을 많이 하면 설교 준비는 언제하고 주책없이 남의 집만 돌아다니느냐 하고, 심방을 안 하면, 교인들의 상태를 돌아보는 관심과 열성이 부족한데 어떻게 교인에게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 계속하려면 더할 수도 있지요. 성격도 다양하고 시각도 다양하고 요구도 다양한 교인들을 충족시켜 주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니까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들을 때 목사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은 이와 같은 행동이나 생각조차도 한 번도 하신 일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목회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노래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한번 노래를 불러봅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목사님 걱정마십시오. 우리가 밀어드리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목회가 신나는 교회인줄 믿습니다. 그런 교회는 소문나는 교회가 됩니다. 목회자가 좀 실수를 해도 덮어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심리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잘한다, 잘한다’고 말하면 정말로 잘하게 되는 행동변화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릅니다. 그 반대로 못한다고 자꾸 지적하면 그 말대로 문제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낙인효과’라고 합니다. ‘저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낙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는 것’ 운전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자꾸 잘못한다고 잔소리하면 화가 나서 어떤 사람은 핸들을 확 꺾어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믿음있는 지혜 있는 아내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활용하여 남편의 행동을 수정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없는 아내는 남편에게 불평하고 잘못한다고 꾸지람을 하다 보면 남편의 기를 죽이고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일에 있어서 목회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하는데도 기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은 주의 종이 즐거움으로 하도록 성도가, 교회가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양의 풍토가 잘 만들어 져야 합니다. 좋은 목양 풍토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들이 말씀을 잘 받아 들이는 순종의 풍토를 말하는 것입니다. 풍토가 잘 만들어 져야 그 교회는 부흥할 수 있고 그 교회 성도들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즐거운 목양(양을 치는 것, 목회), 건강한 목양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목양의 교회가 되려면 한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한 몸, 한마음 의식’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한 건물 안에서 예배드린다고 한 몸, 한 마음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고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한마음으로 고민하고 함께 풀어가야 그것이 한 몸, 한 마음이 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기쁨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며 주님이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한 몸 한 마음의 교회로 주님의 바램을 이루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한 몸이기 때문에 절대로 혼자서는 성공적이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하는 일이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의사는 한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받았을 때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런 말씀드리면 의사 분들이 조금 서운해 하실지 모르지만,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의사와는 사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얻습니다. 지옥 갈 영혼이 천국에 가는 축복을 얻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우리는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에게 우리가 봉급을 주니까 우리가 고용한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주시는 목사님 사례비가 사실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최근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님을 목사님으로 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목사님을 그저 교육받아 성경을 가르치는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운 종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힘든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누군가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찾아가서 기도를 받고 상담할 목사님이 여러분 곁에 없다면, 여러분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목자를 주셨는데 그런 목자가 곁에 없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는 어린양 밖에 뭐가 되겠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목자를 귀히 여기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복을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목회자는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겠습니까?
목회자는 십자가를 눈물로 져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에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지고 가셨는데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이 어찌 십자가를 웃으면서 지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 없이 질 수 없는 길이요 또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에 반대를 하시다가 옥중에서 순교를 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눈물 없이 못가는길 피- 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 멘.
십자가의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며 희생의 길입니다. 눈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골고다를 올라가는 심정으로 울며 울며 천국을 향하여 쉬지 말고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는 십자가를는 감사한 마음으로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구령 사업에 동참하는 축복된 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원망을 하시던가요? 불평을 하시던가요? 그래서 목회는 아무리 어려워도 불평이나 원망 없이 인내하면서 하늘의 상급만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빌4:6절‘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했습니다.
목회자는 십자가를 기도로 지고 가야 합니다. 눅22:40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쓴잔을 앞에 놓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시고 예수님도 친히 엎드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질 자격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교회에 충성하는 것 본 일이 있습니까? 그래도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도 하고, 봉사도 하고, 감사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주일성수도 하고,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주님의 권능으로 져야 하고, 주님의 권능은 성령이 임할 때 선물로 주시는 것이며,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약5:13절‘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기도는 능력을 받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받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자는 십자가를 죽음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죽을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생의 구원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10:15절‘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 된 목사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하였고 고전 15:31절에는 ‘나는 매일 죽노라’ 고 하였습니다. 행14:22절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바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지는 것이며 철저하게 자기를 죽이는 자라야 온전하게 승리의 십자가를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골고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지고 눈물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고 갈 때 주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된 주님의 종이 될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 목사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여러분들도 져야할 각자의 십자가가 있지만 목회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여러분이 지는 십자가보다 몇 배 몇 십 배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아무나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고 싶다고 아무나 질 수 없는 것이고 또 지기 싫다고 안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 잇는 것처럼(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갈6:6절‘말씀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성도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 즉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모든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마음껏 가르치실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 드리십시오.
여러분, 성도들이 목회자를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 드린다면 가장 우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목회자가 성도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또 마음껏 말씀을 준비하실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목회자의 말씀의 문이 막히면 누구 손해입니까? 성도님들 자신이 손해 아닙니까? 따라서 목회자가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려야 합니다.
어머니가 밥을 준비해도 맛있게 먹으면 어머니의 마음이 행복하듯이 목사님이 말씀을 굉장하게 준비하지 못했어도 ‘아멘, 아멘’으로 말씀을 받아먹을 때 그것이 목사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서로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회자를 위해 정말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가 기도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면 목회자를 위해 그 어떤 것을 해 드려도 그것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는 목회자 자신의 기도생활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을 위한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 신실한 목회자, 성도를 사랑하는 목회자, 겸손한 목회자가 됩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주면 목회자가 크게 쓰임받고 성도도 축복받습니다.
목사에게만 아니라 사모님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님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들은 무엇입니까? 대개의 교회가 목회자의 건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모에게까지 관심을 갖는 교회와 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모의 건강은 목회에 직접 영향을 미쳐 교회 성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모는 일반 여성들과는 달리 그 환경과 행동 양식이 비교적 특수하기 때문에 건강에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모는 감정의 분출구가 막혀있습니다. 사모는 자신의 감정을 어디에다가 풀 데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응어리진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자칫하면 정신적인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집사람을 볼 때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정말 잘 해주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데 고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살전5:13절‘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싸움은 자기들끼리 하고 책임은 목회자 보고 지라는 것입니다. 교인끼리 패가 나뉘어 싸우다가 나중에 교역자를 희생 양으로 삼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교인도 하나 되지못하게 하는 담임목사가 무능하니 나가라 말합니다. 누가 싸우라 했습니까?
성도 여러분, 목회자와 함께 있을 때에는 절대로 누군가를 흉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목회를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 앞에서 좋은 말만 해서 목회자의 눈과 귀를 막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교회는 결국 모든 성도들간의 화목을 목적으로 합니다. 물론 화목(和睦)을 도모하기 위해 잠시 서로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할 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판과 지적은 자신의 분풀이에 가깝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출발한 비판과 험담은 결국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로 이어집니다.
화목하셔야 합니다. 상대방 때문에 화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화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늘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교회 분위기 완전 망치지 않는 생각해보고 내가 내 주장을 내려놓고 화목하게 지내야지 하면 얼마나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분쟁의 불씨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성도간에 화목할 때 목회자는 힘 있게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듯 목회자에게도 순복하여 믿음의 분량을 더욱 크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십시오. 목회자들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도 부족하지만 잘 만났으리라고 보고 서로 화목하게 행복하게 신앙생활 해서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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