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님, 참고하십시오. 누군가는 써야할 것 같아서 기다리다 원고 마감일이 다가와서 급히 썼습니다. 혹 동의하시면 필요한 경우 수정 보완해 주십시오.
<추모의 글>
나눔을 행하고 본향으로 돌아가신 은사(隱事)를 기리며
이성교
<‘암병원 병원학교 건립에 1억 원 기부 - 홍명재 이사장님 조의금’>
이 글은 2024년 5월 22일 자 의학 관련 신문에 난 기사의 제목이다. 나는 이 기사의 제목을 보는 순간 홍 이사장님께서 살아오신 그동안의 삶을 모두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사의 제목을 첫머리에 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른 말장난으로 홍 이사장님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가족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다.
내가 홍 이사장님의 흔적을 화순문협의 연간집에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장례 미사 예배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리던 중 원고 마감을 앞둔 새벽 시간을 깨워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홍명재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70년대 중반 아니 정확히 말하면 1976년이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졸업생에게 주는 상장과 상품을 소개하는 사회자의 공지를 통해서였다. 희미한 기억으로는 상품비를 후원하고 학교장 명의로 상장을 주었던 것 같다. 그때 사회자의 소개 중 후원하신 분은 은행에 근무한다는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분이 정치에 뜻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홍 이사장님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잘못된 주관적인 판단이 홍 이사장님을 얼마나 모독하는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홍 이사장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화순문학회를 창립한 이후이다. 그래서 당시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정영기 고문님의 소명감으로 1988년 11월에 화순문학회 발기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1월 창립총회를 했다. 그리고 1996년 6월 사단법인 한국문협 화순지부 창립총회를 열고 정관과 화순문학상 운영 규정을 통과 했다. 그때 내빈으로 오신 홍 이사장님을 처음 뵈었는데 자리만 지키셨을 뿐 축사는 사양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재정으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화순문학상을 화강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제정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영기 고문님과 홍 이사장님은 도곡면에서 뜻이 같은 사람들이 만나 도우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어 함께 활동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1995년에 화강문화재단을 설립하자 홍 이사장님께 화순문학상의 필요성을 말씀드렸고 지부 창립총회와 함께 화순문학상을 제정할 수 있었다. 참고로 문학상은 당시 전남의 군 단위 문학단체에서는 구례, 무안에 이어 세 번째의 일이다. 그 후 2005년에 한림문학재단에서 발간한 문학단체 동인 사전에는 여전히 그대로 일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문학상 시상식에서 홍 이사장님을 1년에 한 번씩은 뵙게 되었다. 그러나 홍 이사장님에 대해서는 화강문화재단 이사장님으로 우리 화순문협에 고마운 분이라는 사실 하나만 더 추가로 알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홍 이사장님의 초대로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영기 고문님과 문병란 교수님 외 대여섯 분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때야 홍 이사장님의 자택이 도곡면 모산리 라는것과 사는 집도 재단 소속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뒤로도 몇 차례의 초청을 받았는데 어떤 때는 일정이 겹쳐 함께 하지 못했지만 홍 이사장님의 검소한 삶의 흔적들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홍 이사장님을 소개했다. 다음은 사회활동을 통해 드러난 객관적 사실을 중심으로 은사(隱事)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내가 홍 이사장님을 은사(隱事) 즉 ‘숨겨 두고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일을 하신 분’으로 규정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졸업식장에서 시상식에 수여하는 상장에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상품비만 후원하신 일이다. 그리고 지부 창립과 화순문학상 제정총회에서 축사도 사양하셨다. 그후 일관적으로 문학상 시상식에서도 수여자로 자리만 지키셨다. 그 외에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라’는 말씀에 따라 행한 일이 많다. 그러나 중앙 언론사는 물론 지방의 언론사 어디에서도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첫머리에 소개한 기사 제목과 같이 도움을 받은 관련 단체의 매체나 SNS 정도이다.
어렵게 찾은 인터넷 매체인 광주일등뉴스에 제30회 군민의 상 수상 소식을 실은 기사를 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사에서는 공적 중 하나로 재단을 설립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광주은행에 1968년 입사하여 26년간 재직 후 퇴직금 2억 9천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출연, (재)화강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해 오고 있다.’ 이 기사도 끝부분에서 ‘군 관계자’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군에서 제공한 공적조서를 취재원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항상 온화한 얼굴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셨다. 현직에서의 직위는 물론 퇴임 후 설립한 재단 이사장 정도면 자기도 모르게 권위적인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원죄를 짓고 태어난 사람의 특성이다. 그런데 홍 이사장님은 늘 자기의 말은 아끼고 주로 경청하시는 편이었다. 그래서 첫 대면에서도 상대에게 평안함을 주고 끌어안는 듯한 힘을 느끼게 하셨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셨다. 홍 이사장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 : 6)는 명령에 순종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소개한 광주일등뉴스 기자는 화순군민의 상 공적 중에 자녀들의 공헌을 소개하고 있다. ‘자녀 6남매도 서울대 출신으로 장학재단에 든든한 후원자로 길러내어 지역 인재 육성 및 문화 창달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는 등’이라고 쓰고 있다.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 기사를 읽고 처음 안 것으로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다만 홍 이사장님은 평소에 다른 사람을 대하실 때의 모습 그대로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 첫머리에 의학신문의 기사의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이제 발인 당일 참여하면서 느낀 감정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발인예배식장인 능주성당에 들어가서 홍 이사장님의 영정 사진을 대면하면서 깜짝 놀랐다. 화려하고 가장 잘나갈 때의 모습이 아닌 현재 그대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떠나가는 사람을 이별하는 자리가 아닌 이 세상 여행을 마친 나그네가 본향으로 가는 축하의 자리라는 생각에 예배자로 참여했다. 그리고 식사하면서 그러한 감동을 나누었다.
끝으로 내 마음을 울린 것인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는 유가족 대표의 인사였다. 유가족 대표로 가냘픈 여인이 인사를 했는데 신문 기사를 보고 장녀인 홍창원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뒤에 앉은 나는 어디에서나 흔히 하는 인사 정도로 생각하고 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동안 참았던 슬픔을 참으며 울먹이면서 하는 말이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여러분 OO합니다. 아버지께서 말씀은 안 하셨어도 분명 OO를 원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때는 “죄송합니다”와 “원하지 않으신” 일이 무엇인지 앞말을 듣지 못해 그냥 넘겼다. 그러나 신문 기사의 제목을 보고 생각해 보니 조의금 받는 문제로 유가족과 재단의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동안 홍 이사장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뜻을 거스르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홍 이사장님께서도 10 수년 전에 암 치료를 받으시고 이겨내신 적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요? 이사장님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홍명재 전 이사장님, 대단하신 분입니다
오로지 후학들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이사장님게 하늘에서 평안을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홍수연 이사장님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장로님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