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읽기36/벼랑/이금이/푸른책들/2008
내가 이상한 애가 된 건 온전히 학교 책임이다. 나는 고등학교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개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힘은 들지만, 그 고개를 넘으면 얻는 것들로 성취감이나 뿌듯함이 느껴져 스스로 대견해지는 그런 것. 그런데 고등학교는 대학이라는 목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는 눈도 귀도 막아야 하는 곳.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이상한 곳. 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 같은 아이를 이상한 아이로 몰아 제물로 삼으려는 거다. 나는 차창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뱀파이어가 피를 찾듯 매연 속에서 싱그러운 자유의 냄새를 맡으러 킁킁거렸다. (18~19)
혜림이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날 확률이 제로인 외고에 합격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3월 초에 온 전화도 시큰둥하게 받았다. 그렇게 혜림이와 연락이 끊겼다. 나는 비로소 만년 2등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아직 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중학교 내내 혜림이에게 느꼈던 뿌리 깊은 열패감이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56)
그 뒤로 스튜디오는 난주의 새로운 아르바이트 장소가 되었다. 헤어지자는 규완에게 용돈을 많이 받는다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알바 덕분이었다. 대가가 돈일 때도 있지만 디지털카메라나 옷 또는 신발 같은 것일 때도 있었다. 감각이 세련된 그로부터 받는 선물도 좋았다. (109)
‘노는 애’가 비브랜드 교복이나 임대 아파트 같은 거라면 ‘이상한 애’는 낡은 트레이닝복이나 반지하 방 같은 것이다. 비브랜드 교복이나 임대아파트는 어쨌거나 교복이고 아파트지만, 낡은 트레이닝복이나 반지하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111)
---이 소설집에는 <바다 위의 집>, <초록빛 말>, <벼랑>, <생 레미에서, 희수>, <늑대거북의 사랑>의 단편이 실려있다. 소설속 주인공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 위의 집>은 ‘이상한 애’ 나은조가 화자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은조의 이야기다. 자퇴를 하는데 미네르바, 혜림의 죽음이 크게 작용한다.
<초록빛 말>은 나는 혜림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다. 혜림은 자살하고 나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간다. 어학연수에서 일탈을 통해 필리핀 청소년들의 삶을 견주어 보고 혜림과 자신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반문한다.
<벼랑>은 난주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다. 몰입도가 있다. 파국을 맞는 이야기다. 주변에는 어른이 없다. 규완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잘못된 선택은 결국 난주를 벼랑끝으로 몬다.
<생 레미에서, 희수>는 희수와 현우의 상큼한 사랑 이야기다. 현우의 생각, 이제까지의 기준을 흔들어준 희수는 혼자이지만 당당하다. 고통을 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으며 포용하고 이해하고 사랑한 고흐의 흔적을 찾으며 성장하는 희수가 멋있다. 사람을 이해하는 기준과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편이다.
<늑대거북의 사랑>은 민재의 이야기다. 예전에 사라진 애완용 늑대거북을 찾으러 과외선생님 집으로 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혜림의 고모이자 민재의 영어과외 선생이었던 효진샘은 민재에게서 그 선택권을 뺐지 않았다. ‘나에게 좋은 것’이라는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효진샘 남편의 조언, 선뜻 돈을 빌려준 현우, 울프에 대한 선택을 하게 한 효진샘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