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도독부와 취리산 회맹에 관한 이야기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취리산 회맹(就利山 會盟)..
낯선 단어이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이지만,
그냥 넘기기엔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이라 할 것이다.
아들아, 신라와 당이 공동의 적인 백제와 고구려에 맞서 연합을 결성했을때..
물론 양국이 서로 감춘 본 뜻이 있었겠으나, 일단 공식적인 그들의 합의사항은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땅은 신라가 그 이북은 당이 차지하기로 했다고 해.
그래서..먼저 1차적으로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먼저 660년 7월 백제를 공격,
멸망시켰다. 그리고 의자왕을 비롯해 부여 융, 부여 태, 부여 효 등 여러 왕자들과
왕족,귀족들은 당으로 끌려갔단다
당 고종황제 (한국사기 中)
당(唐)은 백제를 정벌한 이후..오래지 않아 곧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해.
신라에 평양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애초에 지킬 의사도 없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신라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단다.
한마디로..당이란 대제국이 드넓은 자신의 영역도 모자라서 한반도까지 통째로
삼키겠다 이런 말이었지.
아들아, 신라는 어땠을까?
신라의 문무왕은 이런 당의 속셈을 곧 알아차렸지.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기록은 이렇다.
문무왕의 고민..(한국사기 中)
문무왕이 이와 관련해서 군신회의를 열었는데...태대각간 김유신(金庾信)이 이르기를
'개는 주인을 두려워 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는다면 개는 주인을 무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 주인을 물어야 할 때이다.'고 했고,
'신라의 군사들에게 백제군복을 입혀서 당군을 기습하자'는 의견도 나왔지.
한마디로 신라는 강경책, 결사항전의 의지를 비쳤단다.
원래 당군 대총관 소정방은 백제를 평정한 이후, 이어 신라를 취하려 했는데..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이런 분위기를 알고, 신라침공계획을 포기했단다.
소정방이 귀국하자..당 고종이 왜 신라를 침공하지 않고 그냥 왔느냐 질책하자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아버지나 형을 섬기듯 하니, 비록 나라가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했다고 전하고 있어.
당연한 일이다.
소정방은 신라의 결전의지를 읽었고, 신라가 상하 단결이 잘되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신라가 당의 의중을 훤히 읽고 대비하고 있으니..
신라를 공격해도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음을 알았던 탓일 것이다.
나당전쟁도
소정방은 660년 9월, 백제 의자왕과 왕족, 귀족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을
당으로 끌고 가버렸고, 백제 땅에는 장군 유인궤를 남겨 다스리도록 했지.
이게 바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사비성과 웅진 등 일부에만 당의 지배력이 통할 뿐 대부분 힘을 쓰지
못하는 명목상의 군정기구에 지나지 않았지.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은 그들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단다.
백제를 정벌한 후 요동에서 그리고 남쪽 신라에서 동시에 고구려 공략을 시도했지만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버티는 고구려에게 번번히 당하고 있었고,
백제 땅에는 왕족출신으로 무왕의 조카인 귀실복신과 달솔 흑치상지, 승려 도침 등이
주축이 된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곳곳에서 당군의 보급과 길을 끊고 끊임없이 공격하니
당군은 위기에 몰렸어.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 귀실복신
사비와 웅진도 백제부흥군의 공격에 시달리는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거든.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점점 불어나고 일본에서 왕족인 풍(豊)을 데려와
왕으로 세우고, 일본을 움직여 전쟁에 끌어들였지.
그러다 663년즘에 접어들어 정세는 또다시 변하고 있었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주춤해지더니, 백제 부흥군 내부에
심각한 내분이 발생하여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또다시 풍왕이 복신을 죽였단다.
일본에서 온 2만7천의 구원군을 실어온 함대가 백강 하구 기벌포에서 나당연합군
함대에 대패하고 백제부흥군의 최대 거점인 주류성이 함락되었으며..
흑치상지가 또 배신하면서 임존성마저 함락되며 백제부흥운동은 그렇게 좌절되고
말았단다.
아들아, 그러나 당의 한반도 지배야욕은 집요했어.
그들은 앞서 당의 한반도 지배기도는 한번 좌절되었지만, 한층 더 영리해지고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드러내었지.
부여 융(한국사기 中)
어떻게? 아들아, 당이 백제에서 끌고 갔던 사람들 중에 태자 부여 융이 있었지..
부여 융이 다시 돌아와.
그래서 그는 백제 왕족으로서 당군의 장수가 되어 백강전투에 참전했고,
또 백제부흥군의 장수 흑치상지를 배신하게 만들어 임존성을 함락시키게 만든 자가
바로 부여 융이었어.
당은 당나라 사람이 아닌 백제 태자였던 부여 융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아
백제 유민을 포섭하고 신라와 교묘하게 대립시키는 전략으로 나왔어.
그리고 신라 문무왕에게는 계림도독(鷄林都督)의 벼슬을 내렸지.
제라회맹단터 (충남 공주시)
아들아,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백제도 신라도 모두 당의 제후국, 당의 간접지배를 공식화하려는 뻔한 의도였지.
당이 백제땅을 신라에 준다는 약속을 깔아 뭉개겠다는 의도였지.
당은 신라에게 계림도독이니까 같은 당의 제후국인 웅진도독과 당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서 그의 뜻에 따라 회맹을 가지고 화합하라고 강요해왔고,
신라는 664년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을 대표로 하여 웅령회맹을 맺었고, 신라왕이
직접 나오라는 당 황제의 조칙에 못이겨 665년 웅진의 취리산회맹을 맺게 되었단다.
취리산 회맹 (한국사기 中)
아들아, 그러나..생각해 보아라.
신라의 문무왕과 수많은 군신들 그리고 백성들이 어떻게 이를 받아 들였을지를.
어떻게 문무왕과 망국의 태자인 부여 융이 동등한 입장에서 설 수 있단 말인가.
이만한 수치와 굴욕이 또 있을까.
문무왕의 자존심에 크게 상처나고..신라인들은 당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온몸을
떨었지.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 회맹..
웅진도독 부여 융과 신라의 문무왕이 마주 서고
그 중간에 당의 칙사 장군 유인원이 섰고
왜와 탐라 등의 사신이 또 증인이 되어 섰다.
당의 칙사가 황제의 조칙과 제문을 읽고 문무왕과 부여 융은 제물인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눠마셨다.
취리산 회맹 (한국사기 中)
그 피를 마시며 문무왕은 오냐..지금은 참지만 이 굴욕을 곧 되돌려 주리라,
당을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다짐 했겠지.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부여 융은 문무왕의 서슬에 질려서 안절부절하지 못했고,
그 해에 다시 당으로 건너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단다.
당은 자신감이 넘쳐서 인지..아니면 욕심이 많아서인지 신라에 대한 요구가
자꾸 도를 넘쳤고, 신라는 당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높여갔단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은 고구려 땅에 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당이 신라와 나당동맹을 맺을때 했던 약속을 깨고,
신라까지 기미주(羈縻州, 속국, 제후국..일종의 식민지)로 삼아..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야심을 드러내었음을 신라는 확인하게 되었단다.
문무왕은 이때 당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뒤로는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고
백제인들을 포섭해가며..
당의 웅진도독부의 영역을 은밀히 조금씩 야금야금..잠식해 들어갔단다.
그리고 은밀히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과의 전쟁을 준비했지.
당이 이런 신라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노발대발하자, 문무왕은 또 김흠순과
김양도를 당에 보내 사죄하며 잠시 숙였다가..
곧 김양도가 당에 억류되어 죽음을 맞고 귀환한 김흠순에게서 당의 야욕을
확인했단다.
유일 초강대국 당에 대한 굴복이냐, 아니면..모든 것을 걸고 투쟁을 벌이느냐..
고민 끝에 결국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을 택했단다.
아들아, 이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670년 당의 행군대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선전포고와 함께
황제에 대한 불충을 탓하며 항복을 요구했지.
따르지 않으면 신라의 사직을 끊겠다는 아주 오만한 글이었어.
아들아, 이 서신을 받은 신라는 강수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를 보내어
당이 신라에 대해 했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약조를 깬 것은 당이고,
신라가 당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는 공을 세우고,
또 당군의 위기를 도와 푸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당이 신라를 치려함은 부당하다고
분명히 지적하였단다.
아빠가 '답설인귀서'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구절은 당군이 고구려에게 패하고
백제부흥군에 몰리어 고립되고 굶주릴때 어려운 형편에 목숨을 걸고 싸워 구원하고
그때의 일을 짚어주며 피를 토하듯이 던진 한마디였단다.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먹지 못했는데,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다.
신라는 계절마다 장기 주둔한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다.
1만명의 당나라군이 지난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다.
당나라군의 가죽(皮)과 뼈(骨)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血)와 살(肉)은
신라가 길러준 것이다."
설인귀의 서신과 신라의 답설인귀서가 오가고..드디어 신라는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671년 6월..옛 백제땅 사비 인근 석성에서 장군 죽지(竹旨)가 이끄는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 당군 3500여를 참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니..
아들아, 이것이 바로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고 대동강 아래의 땅에서 통일을 이룬
나당전쟁의 서전(緖戰)이었다.
나-당전쟁도
나-당전쟁에서 패배한 당은 결국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 땅 건안성으로 옮겼지.
당이 한반도에서 물러났다는 상징적 사건이었어.
아들아, 웅진성 관내 있던 야산인 취리산에서의 회맹은..
강대국인 당에 굴복해 맺은 신라에게 있어 치욕스런 역사였다.
그러나, 문무왕은 이 치욕을 딛고 그 순간을 감내하며 실력을 기르고 준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냈으니..그는 과연 대왕이라 할만하다. 문무대왕.
문무대왕
문무대왕, 그리고 그때 선인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한반도가 중국이 아닌 한민족의
땅으로 남게 되었으니..이부분 만큼은 크게 평가하고, 존경의 뜻을 표해 마땅하다.
그러나 아들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 우리가 잃어야 했던 것이 그 얼마나 많았더냐.
또 그 동맹 같지도 않은 동맹국 모시느라..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어야 했고
그 수난을 감내해야 했더냐.
신라와 당의 이때의 역사는..그리고 나-당전쟁에 이르는 그때의 역사를 보면..
분명한 것은 동맹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힘이 없어 휘둘리게 되면 어떤 재앙을
맞게 되는지 보여준다.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어느 순간에서는 단호한 결의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의 생존과 절체절명의 이익을 위해서다.
우리 주위의 강대국,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은 버려라.
우리가 힘이 없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온갖 수난과 나라 잃은 설움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앞으로 언젠가 우리가 통일을 위해 나아갈 때,
우리 주위의 강대국을 너무 믿고 의지하지 말고, 또 휘둘리지도 말고..
우리의 힘과 단호한 결의만을 믿어야 한다고 네게 말해주고 싶다.
나-당전쟁의 역사는..
우리가 통일(統一)을 이룰때에 외세가 개입하는 역사가 되어서는 안되는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아들아, 너는 이 역사를 새기고 또 새기거라.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