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2> 인경 스님
“차이점 인정하고 근기맞는 수행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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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0년 10월24일 본지와 조계사 공동주최로 열린 ‘간화선 대토론회’ 모습. 당시 참석자들은 이 토론회가 간화선법 대중화에 크게 일조했다고 평가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본지가 마련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교리적 근거와 차이’라는 주제의 쟁론(爭論)에 동국대 강사 조준호씨가 지난주 기고,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 아니다. 마치 시대가 다르면 옷을 달리 입듯 의장은 달라보이지만 내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선상담연구원 인경스님이 “점진적 수행과 돈오직관은 분명하게 다른 수행법”이라는 내용의 반론을 보내왔다. 비판과 반론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며 전문을 싣는다.
위빠사나는 번뇌 끊기… 간화선엔 번뇌가 존재 안해
점진적 수행과 돈오직관은 분명하게 다른 수행법
부처님 말씀을 따를지 마음을 본받을지는 선택 문제
조준호씨의 칼럼은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주장하는 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위빠사나를 낮은 단계의 분별법이나, 소승의 수행법으로 오해하는 것은 위빠사나가 초선(初禪)이나, 초선 이전에서 이루어진다는 이해에서 비롯된 문제이며, 둘째는 초기경전에 기초한 진정한 위빠사나는 사선(四禪)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수행이 성취되고, 이때야 비로소 간화선과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성격
이런 주장은 양 수행론의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초점이 어긋난 논의라고 본다. 왜냐하면 위빠사나가 초선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사선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논증하는 것은 초기불교 내부의 과제이지, 그것이 그대로 간화선과의 교두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핵심은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위의 논의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성격을 사선과 같은 선정에서 찾고, 그 교두보 역시 선정에서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든지 불교의 성격을 지혜의 종교라고 알고 있다. 이점은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모든 수행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온 수행모델이다. 부처님의 경우도 전통적인 선정주의를 비판하였고, 인도의 용수보살, 중국의 혜능선사, 뿐만 아니라 송나라의 대혜스님까지도 당시의 선정주의인 묵조선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수행론을 세웠다. 때문에 우리 토론의 주제인 ‘간화선과 위빠사나, 교리적 근거와 차이’에 대한 효과적인 논의와 함께 양 수행문화의 교두보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초선이나 사선과 같은 선정의 문맥이 아니라, 바로 지혜의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위빠사나는 선정 곧 사마타 수행은 아니지 않는가.
진리의 기준
간화선이란 ‘문답(話)을 보는(看)’ 것을 의미한다. 위빠사나(Vipassan)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본다(passan)’는 의미를 함축한다. ‘본다’는 것은 통찰이고, 지혜를 뜻한다. 하지만 보는 대상과 접근방식은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본다고 하는 대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기초한 현상들, 곧 법(法)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일단은 가르침을 듣는(聞)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대승에 기초한 간화선에서 본다는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라, 견성성불에서 보듯이 그 대상은 성품(性)이다.
초기불교와 위빠사나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하지만 대승불교와 간화선은 가르침보다는 ‘부처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말씀이 아니라, 말씀 하시는 근본적인 마음자리를 문제 삼는다.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범부의 성품, 여기에 대승불교도의 관심이 있다. 또한 이것이 간화선의 출발점이다. 진리의 기준은 부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평등한 성품인가.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면, 위빠사나가 교(敎)라고 한다면, 간화선은 선(禪)에 해당된다.
실천의 방식
다음으론 행법의 차이점을 들 수가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가르침의 내용으로서 법을 몇 가지 범주(身受心法)로 분류하고, 위빠사나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따라가면서(anupassan) 개별적으로 관찰한다. 하지만 간화선에서는 보는 대상으로서의 성품을 결코 분류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분류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본질을 묻는 질문, 화두에 의해서 문득 발생하는 직관의 대상이다. 전자는 초기경전에 기초한 점진적인 수행이고, 후자는 대승경전에서 설한 성품에 대한 급진적인 돈오 직관이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경전의 기초를 부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치’시켜나간다. 하지만 간화선은 자신의 성품에 기초한 수행이기에, 경전을 참고로 하되,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설과는 별도로 전한다’는 교외별전적인 입장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설해진 무아설이나 십이연기론에 기초로 한 수행이다. 하지만 간화선은 화엄의 법계연기설에 기초하면서도, 오히려 교설이 자신의 성품을 자각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본다. 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임제선사의 가풍은 역설적으로 참다운 부처의 본질을 드러낸다. 진리의 기준을 ‘말씀’에만 두고서 초기경전만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대승경전을 비불설이라든지, 혹은 힌두이즘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그야말로 자신의 ‘본성’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번뇌와 고통
마지막으로 검토할 문제가 번뇌와 고통의 문제이다. 위빠사나에서 대상이란 무상이고 고통이고 무아라고 전제한다. 때문에 그 주요한 목표는 바로 번뇌를 끊는 일이다. 이때의 무아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법을 세우는 인무아(人無我)를 의미한다.
하지만 대승불교에 기초한 수행은 현상으로서 대상, 법 자체마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만들어놓은 방어체계로서, 법집(法執)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열반경〉은 ‘번뇌를 끊는 것이 열반이 아니라, 번뇌가 발생하지 않음을 열반’이라고 정의한다. 혜능선사는 ‘마음에는 끊어야할 대상이 본래부터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대승경전의 법무아(法無我) 입장이다.
물론 이들 두 무아설은 서로 위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초기경전의 인무아설은 세간으로부터 출세간의 초월을 지향한다. 하지만 대승의 법무아설은 초기불교나 아비담마의 법체계뿐만 아니라,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면서, 활달한 지혜의 작용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방식을 표현한다. 거기에 ‘고통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고통으로 규정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 자아가 여전히 그곳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이 간화선을 탄생시킨 배경이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살펴본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몇 가지 차이점들은 역사적 전개의 결과로, 결코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우열을 논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방편이 아닌가. 우리는 양자의 장단점과 그 적용범위를 분명하게 알아, 근기와 인연을 따라 잘 사용하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문화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인경/ 선상담연구원 원장
[출처 : 불교신문 2014호/ 3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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