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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부쩍 추워졌어요.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걷는 이들 뒤로 도시 곳곳 전광판에 ‘나눔’이라는 단어가 보여요. 바야흐로 나눔의 계절이에요.
“경제가 어렵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나눔을 실천하고 있어요. 다만 시대가 변했듯 나눔 문화도 달라졌죠.
온라인 기부 등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기부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유기 동물을 도웁시다’ ‘소방관 아저씨 힘내세요’ 등 구체적인 나눔 메시지가 새겨진 배지를 구매하는 기부도 등장했죠.
팬클럽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팬심’을 기부와 봉사라는 방법으로 표현해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나봤어요.
#마인드스마일챌린지 #제주특별자치도백혈병소아암협회 #기부캠페인
12월 6일 금요일 저녁,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누리소통망(SNS)이 이런 핵심어 표시(해시태그)로 뜨겁게 달궈졌어요. 이는 제주도에 있는 마인드 휘트니스에서 진행한 캠페인이었어요.
제주도 내 백혈병 소아암 아이들에게 밝은 웃음이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각자 환하게 웃는 사진과 해시태그 등을 자신의 누리소통망에 게시하고 세 명을 지목하는 방식이었어요.
센터 측은 12월 14일까지 게시글 1건당 1000원의 기부금을 제주특별자치도백혈병소아암협회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12월 7일 토요일을 지나면서 캠페인 참여자 수는 삽시간에 늘어났죠.
문정준 대표는 “연말이라 센터 이름으로 기부를 하려던 차였는데 온라인 채널을 통해 센터를 알리면서도 백혈병 소아암 환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아이디어를 내봤다”며 “이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어요.
이는 온라인에서 불고 있는 나눔의 방식을 잘 말해줘요. 전통적으로 나눔, 기부라고 하면 복지단체 등에 물품을 기증하거나 월정액 후원 신청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최근엔 디지털, 그것도 누리소통망 중심으로 재미와 의미를 더해 손쉽게 캠페인성 기부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는 재미(fun)와 기부(donation)의 합성어인 퍼네이션(funation)의 한 유형으로 부담스러운 나눔이 아닌 생활 속에서 쉽고 재미있게 나눔을 실천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디지털 퍼네이션은 2014년 얼음물을 뒤집어쓰며 루게릭병 환자들의 고통을 체험한 영상을 온라인 누리소통망 등에 올리고 다음 사람을 지목하면서 기부하는 방식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2019년의 나눔 트렌드에서도 ‘디지털’은 여전히 중요한 열쇠예요. 2030세대 가운데는 모바일을 이용해 기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걷기 기부 앱(빅워크)부터 간단한 터치 한 번으로 유기 동물에게 사료를 보내는 앱(올라펫)까지 아이디어가 넘치는 기부 앱도 다양하죠.
구세군 자선냄비도 예년과 비교하면 스마트하게 바뀌었어요. 올해부터 시민들이 쉽고 빠르게, 어디서나 자선냄비에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스마트 자선냄비’가 거리에 등장했어요.
스마트폰이나 후불 교통카드 기능이 있는 신용·체크카드를 스마트 자선냄비 화면에 터치하면 1000원이 기부돼요. 스마트 자선냄비 카드단말기 내 큐아르(QR)코드를 촬영하면 자선냄비 모금함으로 연결돼 온라인으로 편하게 기부할 수 있죠.
2018년 행정안전부가 사단법인 한국모금가협회에 연구 용역을 의뢰해 펴낸 ‘기부문화 인식 실태조사를 통한 기부제도 개선’ 연구 결과를 보면 ‘기부자가 선호하는 기부 요청 방식’으로는 ‘온라인 캠페인’(27.1%)이 ‘모금함’(18.4%)을 앞질러 1위를 차지했어요. 2018년 10~12월 전국 만 19세 성인 남녀 1052명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예요.
디지털 나눔 문화가 확산하면서 개인이 주체가 되어 관심을 가지는 이슈와 관련된 기부를 하는 것도 하나의 경향이 됐어요.
과거엔 ‘힘든 상황에 처한 이웃’을 돕는 단체에 주로 기부했다면 요즘은 ‘유기 동물’ ‘강아지공장 구조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북극곰’ ‘20대 미혼모’ ‘여성 인권’ ‘소방관’ ‘독거노인’ ‘여성 독립운동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보호종료아동’ 등 기부의 주제나 대상도 매우 다양해졌어요.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전현경 전문위원은 “우리 일상 속 소비나 교류가 디지털 중심으로 상당 부분 옮겨간 것처럼 기부 채널도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다. 이렇게 ‘채널’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기부, 나눔을 통해 일종의 ‘주체적 자기표현’을 한다”고 설명했어요.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경우, 이런 나눔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대표 성공 사례이기도 하죠.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와 관련된 기부를 하는 경향은 온라인 펀딩 채널의 활성화와 더불어 더욱 뚜렷해졌어요.
서울문화재단은 2014년 11월부터 재단 대중투자(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아트서울 기부 투게더’를 운영 중이에요.
그 가운데 ‘소소한 기부’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시민이 각 프로젝트에 후원할 수 있도록 진행하는 크라우드펀딩이에요.
소소한 기부 참여 프로젝트 및 모금액 추이를 보면 2018년 46건, 4439만 8000원에서 올해 72건, 1억 2123만 9000원으로, 참여 시민 수도 2018년 653명에서 1645명으로 크게 늘었어요.
서울문화재단 메세나팀 이승주 대리는 “올해 카카오페이 간편결제를 도입했고, 목표액 달성 시 재단의 추가 지원금을 최대 200만 원으로 상향하는 등 몇 가지 변화를 꾀했는데 이와 관련해 시민들의 반응이 더 뜨거워진 것 같다”고 분석했어요.
그는 최근 소소한 기부 펀딩 성공 사례로 은둔형 청년들과 지역민(성북구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협업’해 예술 작품을 개발하는, 리커버리 예술단의 ‘리커버리 필름’ 프로젝트를 손꼽았어요.
이 대리는 “이렇게 사회적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가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는 걸 보면서 이 의미 있는 사업을 계속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어요.
최근엔 펀딩 플랫폼들에서 만 18세가 되면 관련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야 하는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요.
텀블벅에서는 고려대학교 사회공헌 실전 경영학회 인액터스 소속 보담프로젝트가 진행하는 보호종료아동을 돕는 펀딩이 인기예요.
“보호종료아동이 건강한 자립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듭니다”라는 미션 아래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이들은 지금까지 텀블벅을 통해 ‘열여덟 팔찌’와 ‘열여덟 에코백과 배지’ 펀딩을 성공시킨 바 있고, 최근엔 ‘열여덟 목도리와 커피’ 펀딩도 진행했어요. 아름다운재단도 ‘열여덟 어른’이라는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을 하는 중이에요.
이 가운데 보호종료아동 당사자인 박도령 씨가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해 무대에 올리는 연극 <열여덟 어른>은 텀블벅에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티켓을 판매하고, 공연 수익금 전액은 ‘보호종료아동 자립 지원을 위한 아름다운재단 교육비 지원사업’에 쓰여요. 12월 28일(오후 1시, 5시), 29일(오후 2시) 양일간 공연해요.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온라인 유명 인사들이 기부에 동참하는 사례도 늘고 있어요.
인기 유튜버 허팝은 올해 강원도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기부를 비롯해 복지 센터와 보육원, 양로원 등에 기부를 많이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세이브더칠드런은 긴급구호가 필요한 재난 발생 때 ‘골든타임 72시간’ 안에 온라인에서 긴급구호 소식을 전파하는 재능 기부자 ‘골든타임 세이버’를 모집하고 있어요.
누리소통망 이용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요가소년(유튜브 크리에이터), 남궁인(작가·의사), 닥터들의 수다(정형외과의 유튜브 크리에이터 3인) 등 인플루언서들이 동참해 눈에 띄어요.
유튜브 ‘닥터들의 수다’ 채널의 정형외과의 홍경호 씨는 “세상이 온라인화하면서 온라인 속 콘텐츠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다”며 “그만큼 콘텐츠 제작자들의 ‘선한 영향력’을 기부 문화 발전에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어요.
요가소년은 “세이브더칠드런의 해외결연 번역봉사자로 활동하는 아내를 보며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작은 능력과 재능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꼭 돈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마음을 쓰는 활동으로 좋은 영향력이 발휘될 수 있고, 뿌듯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어요.
‘나눔’에 대한 생각을 묻자 요가소년은 “나눔을 위해 수많은 전제 조건을 대는 경우가 많다”며 “‘여유가 생기면 나눠야지’ 등 저도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 그 생각을 수정해가고 있다”고 말했어요.
“나눔이란 것은 생각보다 거창한 게 아니더라고요. 이것저것 셈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눔’이란 나의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채우는 태도입니다.”
디지털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나눔이 가능해진 시대.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 동기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전현경 전문위원은 “연구소에서 사람들에게 기부 동기를 물었을 때 온·오프라인 통틀어 응답들은 비슷했다”며 “10년 전에는 ‘불쌍한 이들을 돕기 위해’ 기부했다면 이젠 ‘시민으로서 책임감’으로 기부한다는 이들이 많아졌다”라고 말했어요. 바야흐로 사회공동체 시민의식과 나눔 온도계 눈금이 비례하는 시대가 온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