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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2(목) |
3월 들어 처음 행하는 순례다. 오늘 찾을 곳은 두 곳. 청도군 운문면에 있는 구룡공소와 울산시 중구에 있는 울산병영 순교성지다. 참여 단원은 6명. 1차 진목정 순례때 갔던 김 바오로 대신 이성희 안토니오 형제다. 원래 구룡공소는 진목정 성지와 30분 거리에 있어 진목정 성지와 함께 순례할 계획을 하고 연간 계획에서 뺐는데 진목정 순례 때 실행하지 못하여 오늘 일정에 넣었다. 그렇다 보니 두 성지가 경주를 중심으로 각각 동북쪽과 서남쪽, 서로 반대편에 있어 이동관계상 효율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
6명이라 승용차 두 대가 필요했다. 8시30분 성당에 모여 마당의 성모님께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를 합송하고 바로 출발.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구룡공소 - 하늘 아래 첫 공소 |
네비게이션이 등장한 후로 길 찾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쉬운 대신 반대급부도 있다. 지도로 찾아갈 때는 경유지나 방향에 대한 정보를 다각도로 습득해 가지고 출발한다. 그리고 길손의 입장에서 가는 도중에 사람들을 만나 묻고 대답하는 배려와 인정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오로지 목적지 중심이다. 따라서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도 배제되어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없는 면도 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 같다.
구룡공소의 지도상의 위치
오늘 역시 네비게이션 아가씨의 지령(?)에 따라 가다보니 산내 의곡리까지는 아는 길이다. 그 후엔 낯선 길을 가는가 했는데 어느새 잿길을 오르고 있다. 구룡마을로 가는 길이다. 마치 석굴암 오르는 길과 같다. 한참 오르다 보니 구룡공소로 가는 표지판과 표지석이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좁은 길을 택함
구룡공소는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가리킨다. 사전 정보대로 길이 매우 좁다. 오르고 내리는 차가 서로 만나면 어느 편이든 약간의 여지가 있는 공간으로 후진해야 교행할 수 있다. 이런 길을 약 2km, 꽤 먼 거리다. 어느 단체에서 25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올랐다는 순례기를 읽고 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 알고 보니 길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지 말고 바로 좀 넓은 길로 우회해도 구룡공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25인승 버스는 그 길로 올랐을 것이다.
길이 매우 좁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내려오는 차가 없어 무사히 도착. 구룡공소 신앙유적지 표지판이 나타난다. 경주 출발 약 1시간 남짓 만인 9시 40분 경 도착했다.
표지판 부근 조립식 주택 식당 앞 공터에 주차를 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이다. 상호는 하늘아래 첫 동네 구룡공소 회장님 댁에서 이 식당을 운영한다는데 닭백숙이 주 메뉴다. 오늘 이 식당에 점심 예약을 했는데 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식당 운영하는 자매님 연락처로 전화를 연락을 했더니 용성본당에서 레지오 회합 중이라면서 마치고 와서 식사준비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일단 언덕 아래 보이는 공소로 내려갔다.
내려다 보이는 공소 모습. 마주보이는 건물이 경당이고 오른쪽은 정문
내려가는 도중에 야외 성전이 있다. 예수님이 못 박혀 매달린 커다란 십자가 밑에 바위 제단이 있고 빙 둘러 앉을 수 있는 판판한 바위들이 일정 간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참 멋진 곳이다. 꽃 피고 새울 때, 녹음이 싱그러울 때 여기서 미사를 드리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야외 성전
구룡이 승천한 마을
청도읍 자료에 의하면 구룡마을은 구룡산(675m)의 정상 부근 650m 지점에 위치한 산기슭 오지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9마리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기 위해서 1,000년 동안 기도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는데 한 도승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구룡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산은 구룡산, 마을은 구룡마을이다.
구룡사는 한때는 아홉 마리 용의 원력으로 1,000여 명의 승려가 머문 큰 절로 번창하였으며, 그때 승려들이 먹기 위해서 세운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물방골(물방아골) 안에 약수가 있는 데 이름이 용천(龍泉)이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면서 떠나기 아쉬워 흘린 눈물이 샘이 되었다고 전한다. 철분이 많은 약수로 약효가 있어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구룡(九龍)의 전설은 구룡포를 위시하여 전국 도처에 있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인데 그 수가 아홉이니 더욱 상서로움을 더한다. 아홉이란 가장 많은 숫자이다. 구만리 장천(長天)이니 구천지하(九天地下)니 하는 말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구룡마을 교우촌의 역사
이 마을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영남지역에 제한적으로 일어났던 1815년 을해박해를 계기로 신자들이 들어오지 않았나 추정한다.
경산과 영천 그리고 청도의 경계 지점인 이곳은 높은 산 위에 있는 오지라서 관청의 으로부터 눈을 피하기가 쉽고 천수답 다락논일망정 쌀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 먹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봉화의 우련전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처음에는 구룡산 바로 아래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당시 자인현에 속한 마을(큰골)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다래덩굴을 헤치고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이 지역에 공소도 세 곳이었는데 구룡공소 이외에 큰골공소와 부붓골 공소도 있었다고 한다. 큰골공소(현 경산군 용성면 매남리 430번지)는 신자들이 남쪽으로 가장 먼저 내려와 형성한 교우촌의 공소다. 나중 신자수가 늘고 박해 위기가 커지자 일부 교우들이 분가하여 현 구룡공소(청도군 운문면 정상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룡공소에서 교우부부 한 쌍이 다시 분가하여 부붓골 공소(청도군 용성면 매남리 348번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1888년 김보록(로베르)신부의 사목방문 기록을 보면 당시 교우수가 구룡공소가 62명, 큰골공소가 35명, 부붓골공소가 23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구룡공소만 남고 다른 두 공소는 없어졌다.
그후 이곳을 찾은 사제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인데 그는 1893년 11월, 언양 상선필, 산내 진목정 공소 등을 방문한 후 이곳 구룡공소와 매남리 큰골공소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고 한다.
기록상 구룡공소가 세워진 해는 1921년이라고 하는데 이해에 대구대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로마 성모대성당의 성모님을 주보(主保)로 정한 뒤, 준성당으로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구룡공소의 신자들
이 지역의 신자로 기록상 가장 확실한 사람은 살티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인데 그는 병인박해(1866∼1873) 때 울주 간월리에서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 나라의 경사로 인해 풀려났다. 그후 용성면 매남리 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살티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아 생긴 상처로 3년간 더 고생을 하다가 1875년에 그 후유증으로 치명하였다.
또한 병인박해 중에는 영천군 대창면 효일 부락에 살던 이규일(1835∼1880)이라는 신자가 박해를 피해 단신으로 이곳 구룡공소에 와서 살다가 18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무렵에 경산 무학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임춘 신부의 증조부인 이종건(1837-1900)도 산 아래 용성면 매남리에 살다가 이곳 구룡공소의 박씨 집안의 딸과 혼배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이종건의 친척인 이종선 가정과 김종화 야고보 회장 가정, 그리고 최순집 회장의 부친인 최팔영 아오구스티노 가정도 이곳으로 피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구룡공소의 현재
공소 앞에 이르니 큼직한 대문채엔 천주공교회 성당(天主公敎會 聖堂)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명칭이 한자로 쓰여져 있다. 하지만 ‘공교회’는 초기교회 당시부터 사용된 용어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보편된 교회’, 또는 ‘공번된 교회’를 뜻한다. 대문의 마룻대(종도리)에 「天主降生 壹千九百三十三年 陰九月三日 立柱上樑」이라고 붓으로 쓴 건립 날짜가 있다. 立柱上樑(입주상량)이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린다는 뜻으로, 그러니까 1933년 음력 9월3일에 건물을 지었다는 뜻이다.
구룡공소 정문
대문채 상량문
물론 지금 공소 건물은 90년 전 당시 건물은 아니다. 2015년 5월 용성성당에서 구룡공소 성역화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관련 역사자료를 대구대교구에 제출하며 시작됐다. 그리하여 2018년 11월에 보수공사를 완료하여 조환길 대주교님께서 오셔서 축성하시고 신앙유적지로 선포하셨다고 안내문에 밝히고 있다. 건축 양식을 보면 보수(補修)라고 하지만 개축(改築)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와를 올린 이런 훌륭한 집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보수(補修)니 복원(復原)은 원형에 가까울 때 쓰는 용어들이다.
그 동안 구룡공소는 공소의 역사처럼 그 소속이 기구하다. 용평본당(1907), 하양본당(1928), 금호본당(1963)을 자인본당(1972)거쳐 1995년 이래 용성본당 소속이 되었다.
공소 안에 들어서니 대문 오른쪽 옆에는 죄인을 문초하거나 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구(刑具)인 항쇄돌이 있다. 다리를 묶는 것을 족쇄(足鎖)라고 하듯, 목을 묶거나 큰 칼을 씌우는 것을 항쇄(項鎖)라고 부른다. 포도청 담장에 구멍을 뚫고 이 항쇄 구멍에 밧줄을 넣어 죄수의 목에 걸고 반대쪽에서 당겨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쇄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사용되었던 비공식적인 형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은 지역 관아에서 재판하여 상부 관찰사 감영에서 형을 확정 짓고,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여 윤허를 받아 집행을 하는 일종의 삼심제였다. 하지만 병인양요 무렵에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을 죽이다보니 그럴 겨를이 없어 이런 비공인된 조악한 형구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추정된다. 그것도 선참후계(先斬後啓)라하여 일단 형을 집행하고 그 숫자만 조정에 보고했다니 천주교인은 죄인 대우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참혹하고도 억울한 죽음이었다.
담장 속의 항쇄돌
그런데 이 항쇄는 관청에나 있을 법한 것인데 왜 이곳에 있는지 의아했는데 오석으로 된 안내문 끝부분에는 놀랍게도 경주 감영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경주 감영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박해를 가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경주 관아 순례자들을 위해서는 이 항쇄가 제 위치를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공소 성전(경당)
10시가 되었는데도 순례객은 물론이고 교우나 주민도 한 사람도 없다. 마당을 가운데로 하여 공소 경당은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는 복원된 옛날 사제관이 있고, 맞은편 가운데에는 현재 사제관 및 접객실로 활용되는 건물이 마치 자기가 주전(主殿)인양 뽐내며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주일마다 용성본당 신부님이 올라와서 미사를 봉헌한다고 하는데 그때 여기서 쉬기도 하고 공소 신자들과 식사도 하고 회의도 한다.
복원된 옛날의 사제관
현재의 사제관
성전 내부
경당 안에 들어가서 제대 앞에서 주모경를 바치고 일부 형제는 비치된 방명록에 기록을 남겼다. 경당 내부는 참 아담하고 단아했다.
앞쪽에는 녹색 카펫트를 깐 제대가 벽에 바싹 붙어 있고 감실은 초롱모양을 하고 불을 밝히고 있다. 제대 좌우에는 각각 독서대와 강론대가 자리하고 있다. 간막이 앞 바닥에는 전례용 동종과 봉헌함, 방문자용 애긍함 등 있을 것은 모두 갖추었다.
천정은 마감재로 차단하지 않아 굵직한 보와 도리, 그 위에 걸쳐진 서까래 모두 드러내어 목재 향이 풍기는 것 같다. 바닥은 마루인데 뒤쪽엔 벽에 붙여 놓인 벤치가 있고 그 옆 오른쪽에는 책자와 사무기기가 있는 책상이 놓였고 왼쪽에는 마룻바닥 용 방석과 간이의자가 포개져 있다.
성전 내부
양쪽 벽면에는 크지 않은 몇 개의 창은 녹색, 빨강, 주황의 격자무늬가 스테인글라스를 대신하고 있고 그 위에는 십사처가 알맞은 사이를 두고 걸렸다. 모두 목제 틀로 되었는데 흰 옷 입은 예수님과 관련 인물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액자형이었다.
액자형 십사처
제대 감실
그런데 이곳도 진목공소에서와 같이 제대가 앞벽에 바싹 붙어 있고 제대와 교우석 사이에 간막이가 있어 차단되어 있다. 이런 배치는 예전에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례 집전자와 교우들이 같은 방향으로 전례를 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공소의 전례도 나중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전례 집전자가 말씀의 전례까지는 신자를 향하여 집전하고 성찬의 전례는 교우들과 같이 제대를 향해 봉헌한다고 한다. 어쩌면 전례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상 옆 뒤쪽 벽에는 공소 초기 촌락 모습이 사진으로 책상 위에 걸려있고 책상 앞 벽에는 공소 안내판이 또 하나 있는데 대문 앞의 안내판을 보완하는 듯 좀 자세한 내용이었다.
관리자용 책상
초기 구룡마을의 모습
봉헌함 동종
애긍함
성모상
구룡공소 특징
이 안내판에 의하면 구룡공소가 일반 공소와 다른 특장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공소는 심산유곡 척박한 오지에서 옹기를 굽거나 나무를 하거나 숯을 구워 팔거나 하여 생계를 삼았는데 구룡공소 신자들은 계단식으로 천수답일망정 다락논을 일구어 쌀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런 논의 형태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둘째는 이곳은 순교자가 한 분도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서로 믿고 의지했기에 밀고자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해기간 동안 신앙 선조들 보호해준 곳이라는 뜻이라고 이곳 교우들은 믿고 있다.
실제 한국 전쟁 동안 신자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공소를 지켰는데 1952년 10월 이영조 가밀로 회장을 중심으로 공소예절을 거행하기 위하여 모여 있을 때 빨치산 12명이 침입하여 총을 쏘았는데 기적 같이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하느님의 가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공소 주변의 모습
공소를 나와서 공수 주변 환경을 돌아보았다. 뒤편을 돌아드니 피정의 집과 낡은 종탑이 있다. 피정의 집은 코로나 기간 동안 사용을 하지 않아서인지 닫힌 상태로 있고 종탑은 사용하지 않아 목이 쓸어 폐품이 되었는데 그래도 한때는 구룡마을 전역에 복음의 종소리를 크게 울렸을 것이다. 비록 유물이지만 유물은 유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 마을의 공소의 역사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부근에 신자들의 집이 몇 채가 있고 멀리 산기슭에도 집의 형태가 군데군데 보인다. 현재 이 공소의 가구는 10가구 10여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에 한때는 60여 명의 교우가 살았으며, 후손들로 경산 무학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이임춘(펠릭스) 신부 등 8명의 사제와 4명의 수녀가 탄생했다니 놀랍기만 하다.
피정의 집
종탑
폐가
마을 전경
아쉽게 돌린 발걸음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 일행만 공소를 돌아보았는데 10시 반에 채 되지 않았다. 우리가 예학한 점심식사 시간은 12시-12시반이다.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넉넉하여 마을 주변을 혼자 둘러보고 식당 앞에 왔더니 미리 온 일행들이 의견을 모아 다음 일정을 하기 위해서 식당 운영 자매님께 전화로 양해를 구하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로 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러기로 했지만 나로서는 퍽 아쉬운 감이 들었다. 예약할 때 공소회장님과 인터뷰식으로 설명을 듣기로 했는데 그것이 취소된 것이다. 여행지나 순례지를 다닐 때는 드러난 여행지 정보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곳 주민이나 관리자와 직접 만나 설명을 듣고 의문점을 해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답사기나 순례기를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쉽지만 차를 돌렸다. 울산 병영성지로 향한다.
울산 병영 순교성지 - “들어간다 들어간다 천국에 들어간다” |
구룡공소에서 차를 몰아 울산 병영으로 오는 도중 언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언양 하면 언양불고기가 유명하다기에 불고기 식당을 찾았다. 언양불고기는 언뜻 보기에는 마치 떡갈비처럼 보이나 떡갈비처럼 고기를 갈아서 만들지 않고 얇게 썰어서 배즙이나 양파즙으로 재워 육질을 부드럽게 하여 석쇠 숯불에 구워낸다. 그래서 불향내와 함께 맛이 달달하면서도 고유의 고기 맛을 낸다. 메뉴판에 가격을 보니 1인분 180g에 22,000원. 그리 비싸지도 않다. 이래저래 여행 다니면 그 지방의 특식을 맛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식사 후 느긋하게 울산병영 순교성지 성당에 도착하니 오후 1시 50분. 순교자 현양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전 앞마당에는 순교자 현양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기념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세 분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순교자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뒤에는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에 들어간다.”는 허인백 야고보 순교자가 마지막 남긴 말이 쓰여 있다.
순교자 안내 게시판
게시판의 뒷면
병영 장대벌
울산 병영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 兵馬節度使)의 병영(兵營)이 있었던 곳이다. 병영이라는 일반명사가 현재는 고유명사로 바뀌어 행정구역 명칭이 되었다.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높은 대(臺)를 말하며,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장대벌은 군인들의 주둔지이면서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넓은 연병장 터다. 그뿐만 아니라 장대벌은 간혹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쓰인다. 당시 울산 병영 장대벌이 그랬다. 울산시 중구 남외동에 위치한 울산병영 장대는 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경신박해(庚申迫害)는 1859년(철종10)에서 1860년(철종11)에 걸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인데 좌, 우 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과 신명순(申命淳)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반감으로 자행되었다.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이 교우촌을 급습하여 약 30여명의 신자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으나 조정의 중단 지시로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신백해는 병인박해의 서막일 뿐이었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가장 격심했던 탄압이었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는 이 박해는 1866년에 일어나 1872년까지 6년 동안이나 진행되어,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약 8,000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1868년 독일계 유태인 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부채질을 하여 박해의 불길이 더욱 거세어 깊은 산속까지 샅샅이 다니며 색출 하여 체포했다.
너무 수가 많다보니 정식 재판이나 보고(報告)도 생략된 체 전시(戰時)에나 적용하는 임시 군법인 선참후계(先斬後啓), 곧 먼저 죽이고 나중 보고하는 방식으로 무참히 죽였다. 원래 사형수는 국왕의 사전 재가가 있어야 집행이 되었지만 무시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곳 울산병영 장대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은 소위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참수된 이들의 머리를 장대 위에 매달아 두어 일반 백성으로 하여금 경계를 삼도록 하는 대단히 가혹한 처형 방법이었다.
병영 성지의 순교자
울산 병영의 알려진 순교자로는 경신박해 때의 오치문과 병인박해 때의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였다.
울산병영 장대의 첫 번째 순교자로 알려진 오치문은 언양 사람으로 해주(海州) 오(吳)씨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는 1801년 이곳 언양에 귀양 온 강이문에 의해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학자이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외교인들과도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오로지 산골에서 숯을 굽는 교우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며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1860년 체포되어 울산병영 장대에서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했다. 백지사형이란 손을 묶고 얼굴에 물 묻은 창호지를 발라 숨을 못 쉬게 하여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1822-1868)은 김해 출신으로 언양 간월로 이주해 살다가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고백하였다. 경주로 이송되어 8개월 동안 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조정의 명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 후 허인백은 간월보다 더 깊은 산중의 대재[죽령]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충청도 공주에서 박해를 피해 온 김종륜과 대재 공소회장이던 이양등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 -1868)은 서울 태생으로 박해를 피해 울산의 대제공소(죽림굴)로 내려왔다. 본디 성품이 선량했다고 한다.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으며 대재공소회장을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허인백, 김종륜 가족과 함께 경주 산내면에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함께 체포되어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하였다.
김종륜(金宗倫 루카, 1819-1868)는 충청도 공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 루카는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으며 평소에 이웃들과의 화목을 강조하며 생활하였다. 박해 시기에는 상주 멍애목(현 문경시 동로면)에 거주하다가 조부가 현감으로 있는 언양에 내려와서 간월을 거쳐 대재공소에 내려와서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와 만나 이들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더 안전 한 곳을 찾아 경주 진목정 부근 소태골 범굴에서 함께 목기를 만들어 팔며 피신생활을 이어가다가 끝내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관아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중죄인은 상급감영으로 호송하는 관례를 깨고 절도사가 주둔하는 이곳 경상좌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뼈가 드러나는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결국 1868년 9월 14일에 군문효수 되었다.
마지막 날 허인백은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으로 들어간다. … 너희들 저 두 사람의 목을 먼저 베고 내 목을 맨 나중에 베되, 머리를 각각 제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 다오. 훗날 부활할 육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이들과 함께 체포된 간월 교우촌의 김영제(베드로)는 경주 진영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지뼈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심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어 가족들이 있는 살티(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교우촌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형벌로 생긴 상처 때문에 고생하다가 6년 후에 선종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은 지금 살티 공소 인근에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세 순교자의 무덤 이장 내력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朴召吏)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동천강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5월말 허인백의 손자 허명선과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에 의해 대구 감천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다. 1962년에는 대구 가톨릭청년회 주선으로 감천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유골을 안장했다가 또다시 1973년 10월, 대구시 동구 신천동에 있는 순교자 기념성당인 복자성당 구내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순교 성지조성의 결실 복산성당(전 울산 성당)에서는 1957년에 동천강변의 새치벌에 작은 팻말을 세워 순교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고 하는데, 강변 정비로 지금은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다. 이후 순교터를 보존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1977년 동천강변에 순교지 535평을 매입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9년 9월, 복산본당 사목회가 중심이 되어 성지 개발에 착수하여, 순교자 현양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그리고 야외 돌 제대를 설치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1988년 복산성당에서 분가하여 병영성당이 설립되면서 순교성지에 대한 관리를 담당해 오던 중 울산병영 순교성지가 울산 중구청의 ‘테마 관광가도 사업’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부산교구는2012년 11월 설계를 완료하고, 2013년 4월 14일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 기공식을 갖고 2층 규모의 성당 신축에 들어가 2014년 3월 15일 부산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울산 병영 순교성지 성당
계단을 통해 성당 입구에 오른다. 계단은 지그재그로 휠체어가 오르는 길이 겯들여져 있다.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시설이다. 성당 입구에는 동굴 같기도 하고 감옥 같기도 한 봉헌대가 있고 그 위에 촛대 3개가 놓여 있다. 아마 세 분 순교자의 고난을 말해주는 의미인 것 같다. 봉헌대 양쪽 측면에 출입문이 있다. 봉헌대 앞면 벽에는 103위 성인의 동판화가 조각되어 걸렸다.
성당 오르는 지그재그 계단
감옥 모양의 봉헌대
103위 순교성인 동판화와 촛대 3개
성당 안에 들어가니 내부 전체가 원형이다. 그 원형 가운데에 제대가 있다. 천정에는 십자가 모양의 창을 통해 하늘에서 순교의 영광이 빛으로 내려와 바로 아래 제대와 조응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공동 기도가 모여져 분향하듯 하늘로 올라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성당 내부
중앙제대 앞 김대건 신부 유해함
유해함과 사진
제대 앞에는 사진과 함께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여기 안치된 유해는 척추뼈 조각의 일부라고 한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성지 등 전국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으나 울산지역에서는 유일하다. 제대 앞면에는 못이 3개가 새겨졌는데 이 역시 세 분 순교자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성당 전면 널찍한 벽에는 비둘기가 날고 그 아래로 7개의 불꽃이 타오른다. 물론 이 비둘기는 성령을 나태내고 7개의 불꽃은 성령 칠은을 상징한다.
전면 벽의 왼쪽에는 성모님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 쪽에는 감실에 불이 빨간데 자세히 보니 감실 주위가 모두 못으로 얽혀져 잇다.
비둘기와 불꽃
성모상
감실
벽 위에는 둘러가며 십사처가 자리하고 있다. 목각으로 된 얼굴상들인데 공통된 표정은 고뇌에 모습이다.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개 섞였다.
목각 십사처들
벽 한 군데는 왠 동양화가 걸렸나? 했는데 자세히 화제의 제목이 ‘울산 장대벌’이었는데 장대벌에서 순교자를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순교자 처형 장면과 구경꾼들
작을 글씨로 나타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산 남외동에 위치하고 동천강가에 자리잡은 순교터 장대벌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언양 산골에서 숨어살다가 체포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배드로 등이 1868년 8월 14일에 참수된 곳이다. 이들은 순교하는 장면을 보려고 모여든 많은 사람 앞에서 마지막으로 차려준 음식을 담소하며 먹었고 칼을 받기 전에 태연하게 군중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성호를 그었다. 특히 허인백은 멀리 언덕에 서서 지켜보는 부인을 행해 손을 흔들고 삼종기도를 바친 다음 웃는 얼굴로 참수를 받았다.
그림 안의 설명 부분
다시 밖에 나와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기념상이 있는 언덕에 오르니 그 너머 동천강이 흐르고 있었다. 박조이 부인이 세 순교자의 유해를 묻었던 강변이었다.
김대건 신부 상
동천강변
마지막 가는 곳은 병영성(兵營城) 터이다. 행인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네비게이션을 작동시켜 가르켜 주는 대로 약 5분 정도 달리니 지하도가 나타나고 이를 통과하자마자 성터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런데도 네비게이션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안내한다. 계속 달리다가 넓은 길을 만나 좌회전, 유턴을 되풀이 하여 와보니 조금 전 났던 지하도가 다시 나타난다. 알고 보니 지하도를 지나 좌회전을 할 수 없어 이렇게 둘러온 것이다. 행인 없는 도로인데 그냥 횡단하면 될 것을 네비게이션은 이처럼 정직하다. 고지식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불법은 추호도 용인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우리 인간들보다 낫다. 조금의 불편도 감수하지 못하고 불법, 무법을 저지르는 일상에 너무 습관이 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다.
병영성터(사적 320호)
이 성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진영성(鎭營城)으로 조선 태종 때에 쌓았다. 성의 위치는 해발 40여m의 낮은 구릉을 두른 포곡식(包谷式) 성으로 조선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진영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축조 방법도 사방에 옹성(甕城)을 갖춘 문을 두었고, 성벽 위에는 치성(雉城)을 갖추었다. 발굴 결과 성 밖에 너비 8m, 깊이 2m의 크기의 해자(垓字)가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우물, 도랑, 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성벽은 임진왜란 중에 울산왜성을 쌓을 때 많이 없어졌으나 기단부는 대부분이 남아 있다.
경상좌도는 경상도 중 낙동강 동쪽 지역을 지칭한다. 물론 경상우도는 이와 반대다. 여기서 좌우라고 하는 것은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본 관점이다. 병영성(兵營城)은 ‘병영이 있는 성’을 의미하고 병영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이다.
조선시대에는 행정조직으로 8도를 다스리는 관찰사 이외에 따로 군사조직을 두어 적을 막고 질서를 유지했는데 그것이 바로 병마절도영이고 이를 총괄하는 직위가 종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이다. 일명 병사(兵使)라고도 한다.
병영성은 임진왜란 이후 축조된 것이다. 기록에는 성벽 길이가 1.2km, 높이는 3.7m정도였다고 한다. 무너져 내린 것을 일부 복원하였으며 지금도 발굴 중이었다.
복원된 성벽에 올라보니 사방에 아파트와 건물들이 오히려 성처럼 에워싸고 있어서 성 다운 느낌이 들지 않지만 성벽을 좀 걷다가 발길을 돌렸다.
병영성벽 위에서 참여자 모두
발굴 중인 병영성터
치성
마무리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오늘의 순례 일정이 끝났다. 순교자가 없음을 오히려 자랑삼고 있는 구룡공소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병영 장대벌 어느 편에서든 오늘의 우리의 신앙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뜨거운 자취였다.
구룡산 기슭에 엉겨붙은 구룡공소 신자들의 척박한 삶이 오늘날 우리 신앙전통을 이어주었고, 장대벌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교회를 지켜준 것이다. 불과 한 세기 반 이전 우리 신앙선조들이 이룩한 열매를 오늘의 우리가 따 먹으면서도 그 맛에만 도취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60여 신자가 흥성(?)했지만 다들 떠나고 40여년간이나 공소를 지키고 있다는 구룡공소 회장님과 남은 10여명의 신자님들, 그리고 주일마다 잿길을 오르내리며 빠짐없이 미사를 드리는 용성성당 주임 신부님을 위시한 관계자님들께 각별히 감사들 드리고 싶다. 그리고 덧붙여 오늘 식사 예약을 하고도 우리 사정으로 결국 노쇼가 되고 만데 대해서도 사과를 드린다. 이 또한 사전 시간 계획이 치밀하지 못했기에 초래된 것이기에 이 역시 앞으로의 일정계획에 도움을 삼고자 한다. 이 순례기의 일부 내용은 식당 자매님과 늦게나마 전화인터뷰로 이루어진 점을 밝힌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한번 만나서 여러 가지 신앙체험담을 듣고 싶은 마음이다. 더욱이 가을 단풍이 익어갈 때 야외 성전 바위 제단 앞에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나누며 그곳 교우분들과 친교를 가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구룡공소의 슬로건 ‘하늘 아래 첫 공소’를 다시 생각해 본다. ‘하늘 아래 첫 공소’는 공소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는 말도 되지만 ‘하늘나라와 가장 가까운 공소’라는 뜻도 된다. 높을수록 하늘에 가까우니 말이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리고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병영성지 순교자의 말이 귀에 자꾸 맴돈다.(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