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4. 분쟁의 땅 스리나가르
제4결집 있었던 '대승불교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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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교사원 샤히함단 모스크> |
인도대륙에 발을 디딘지 한 달이 되던 2002년 4월8일. 인도 수도 델리에서 인도·파키스탄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땅’ 스리나가르로 날아갔다. 잠무캐시미르 주(州) 주도인 스리나가르는 인도 대륙 최고의 휴양지이자 관광지로 유명한 곳. 쿠샨왕조(1세기∼5세기) 당시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이곳은 인도·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되던 1947년부터 ‘분쟁 지역’에 편입됐다.
분리 독립 당시 힌두교도였던 캐시미르주 영주는 인도 귀속을 ‘결정’했다. 반면 이슬람교도였던 대다수 주민들은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했다. 영주가 인도 귀속을 결정하고 그대로 진행되자 서서히 ‘분쟁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고, 결국 ‘씨앗’이 발아해 1965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고, 당시 스리나가르는 첨예한 ‘분쟁 현장’이 됐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재발하고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스리나가르엔 한층 많은 군인들이 주둔했으며, 검문검색이 강화됐다. 이후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터지기만 하면 세계인의 이목은 자연스레 스리나가르에 집중됐다.
지난 4월8일 11시15분 델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스리나가르 공항에 내리자 곧바로 군인들의 검문이 시작됐다. 시내 곳곳에 군인들이 총 들고 버스를 세운 채, 검색하고 있었다. 기후도 인도의 다른 지방과 달리 추웠다. 현지인들은 망토 비슷한 두꺼운 옷들을 걸치고 있었다. 예약한 ‘보트하우스’(Boat House), 스리나가르 시내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달 호수 위에 있는 수상(水上)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에서 시내를 일별했다. 인도인보다는 파키스탄 사람들과 인종적으로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이슬람 사원의 뾰족한 첨탑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하고 무굴제국(1526∼1858) 3대 황제 악바르(재위 1556∼1605)대제가 하리바르바트산에 건립한 악바르성으로 갔다. 산 위에서 본 스리나가르 시내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시내 곳곳에 이슬람 사원만 보였다. 불교의 ‘ㅂ’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 스리나가르를 통치한 쿠샨왕조의 호불왕(好佛王) 카니쉬카(3대. 재위 132∼152.)대제가 환생한다면 뭐라고 말할까. 스리나가르가 이렇게 이슬람(85%)·힌두교(15%) 일색으로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공항서부터 무장군인들 삼엄한 검색
스리나가르가 어떤 곳인가. 마가다국에 머물던 불교가 마투라를 거쳐 북서쪽 각지로 전파될 때, 인도 서북부 불교의 거점도시 아니었던가. 그런 이곳에 불교의 흔적은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이외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념에 빠졌다. 부처님 입적과 바이샬리에서의 제2결집(기원전 3세기 전반) 이후 불교는 서북인도로 전파됐다. 당시 마투라 등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부파(部派)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마투라에서 캐시미르·간다라 등 서북인도로 불교를 전파시킨 주역이었던 설일체유부는 후일 대승불교 및 여러 힌두교파와 논쟁을 벌이며,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불교를 퍼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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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왕국과 스리나가르> |
마투라에서 캐시미르·간다라로 전파된 설일체유부는 시간이 흐르고 교단이 발전하자, 변화를 겪는다.
‘마투라 설일체유부’와는 또 다른 ‘캐시미르 설일체유부’와 ‘간다라 설일체유부’의 성립이 그 것. 캐시미르 설일체유부는 쿠샨왕조 시대 큰 발전을 이루며, 이 때가 되자 ‘캐시미르 설일체유부’는 마투라 등 중 인도에 남아있던 설일체유부 및 간다라 지역에 있던 설일체유부 그룹과는 일종의 경쟁의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자 마투라 등 중인도에 남아있던 설일체유부는 본가(本家)임을 의식해 스스로를 ‘근본설일체유부’로 명명하게 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사실 사상적으로는 같은 계통이었으나 캐시미르 설일체유부가 〈십송율〉을, 마투라 근본설일체유부가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라는 율(律)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파로서는 별개의 존재가 돼 버린 셈이었다.
인도 서북지역 불교가 이런 내적 발전을 겪고 있는 사이 서력기원 4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쿠샨왕조를 건립하고,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카불, 캐시미르 지방, 간다라 지방, 남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2대 비마 카드피세스도 정복을 계속해 펀잡지방과 마투라 등 서북인도를 손에 넣는다. 중앙아시아 호탄에서 태어나 쿠샨왕조 3대 왕으로 등극한 카니쉬카는 선왕(先王)들의 유업(遺業)을 이어 파키스탄 폐샤와르에서 남으로는 인도 산치, 동으로는 바라나시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불교 거점 도시가 이슬람 도시로
〈마명보살전〉에 따르면 설일체유부를 지원했던 카니쉬카왕은 중인도를 공격하고 대가로 ‘부처님 발우’와 ‘아슈바고사’(마명보살)를 요구했다. 왕의 요구에 따라 아슈바고사 보살은 서북인도로 이주하여 불교를 널리 보급했는데, 당시 카니쉬카왕의 궁정에는 정치학자 마라타, 의사 차라카 등이 내왕하며 활약했다.
설일체유부의 파르스바 존자(협존자)에게도 귀의했던 카니쉬카왕은 캐시미르 쿤달라바나 계곡에서 파르스바 존자를 상수로 한 500인의 아라한들을 모아 삼장을 편찬했는데, 인도불교사에서는 이를 ‘제4결집’으로 부른다. 〈대비바사론〉 끝에 있는 당나라 현장스님의 발(跋)에 의하면 불멸 400년경 카니쉬카왕이 캐시미르에 500여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삼장을 결집했는데, 그 때의 논장이 바로 〈대비바사론〉 200권이라고 한다.
그러면 당시 카니쉬카왕은 무엇 때문에 불교를 신봉했을까. 일본의 저명한 불교사가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교수는 〈불교사1-인도·동남아시아〉(민족사에서 ‘인도불교’로 번역 출간)에서 세 가지를 댄다. △서북인도에 들어온 민족들은 카스트 관계로 힌두교도가 되기 어려웠다 △불교는 보편성과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가 높이 평가돼 널리 신앙되고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인도대륙에 들어온 다른 민족이 채용할 수 있는 적절한 종교가 불교였다”고 분석한다.
‘대비바사론’ 200권 탄생된 곳
카니쉬카왕의 사후 바시쉬카, 후비쉬카, 바수데바 등이 잇따라 왕위를 계승했지만, 쿠샨왕조는 점차 세력을 잃고 3세기 말엽엔 북인도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소왕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사이에도 불교는 발전을 계속해 서북인도에 착실히 뿌리 내리고, 캐시미르 → 파미르 고원 → 탁스쿠르간을 거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됐다. 현재의 동(東)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북방을 포함하는 지역인 간다라 지방을 통해 아프가니스탄(하다 → 카불 → 베그람 → 발흐)과 우즈베키스탄(옛 테르메즈 등 수칸다리아 지역)에도 전파됐다. 중앙아시아에 퍼진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고구려 집안(전진왕 부견이 전해줌)에 들어왔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불교의 직접적 원류는 바로 스리나가르 → 간다라 → 중앙아시아 지역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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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나가르 수상시장> |
사진설명: 스리나가르 시내 달호수에서 매일 아침 벌어지는 수상시장. 각자 배로 야채등을 싣고와 교환하거나 매매한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접고 하리바르바트산을 내려왔다. 산 바로 밑에 이슬람교도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질서정연한 듯 하면서도 불규칙하게 놓여있는 묘지들을 보았다. 거대한 이슬람식 공동묘지가 주택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은 지금 이땅의 주인이 이슬람교도임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 때 중국 당나라 현장스님도 머물며 교학을 배웠던 곳 스리나가르. 중국 동진(東晋)의 고승이자 〈불국기〉 저자인 법현스님도 거쳤던 이곳이 이제는 이슬람교도들의 땅이 돼버리고 말았다. 흐르는 것이 시간이고, 변하는 것이 땅의 주인이라지만, 불교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스리나가르 시내에 있는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을 보고 나오면서, 스리나가르 재래시장을 돌고 나오면서도 머리 속에 내내 맴돈 것은 ‘인도불교 재생의 방법은 없을까’였다.
** 스리나가르 박물관 **
산스크리트 필사본 경전 전시
스리나가르 시내엔 ‘캐시미르 불교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불상과 힌두교 신상 등이 박물관 밖 노천에 흩어진 채 전시돼 있고, 전시관 안에도 불상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힌두교 신상이다. 스리나가르 박물관에서 주목되는 불교유적은 파키스탄 길기트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 필사본. 20세기 초 발견된 필사본은 종려나무 잎에 산스크리트어로 경전 내용이 필사돼 있다. 모두 4권이 전시돼 있는데, 요청하면 손으로 직접 만져 볼 수도 있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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