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은 내가 정한다/ 우황후
우왕후는 고구려 9대 임금 고국천왕(재위 179~197)과 그의 동생인 10대 산상왕(재위 197~227)의 왕후로서 역사상 2번 왕비에 오른 매우 이색적인 여성이다.
우왕후는 고국천왕 치세 때 고국천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발기와 그 아래 동생인 연우가 두려워한 권력과 정치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당시 그녀는 직접 벼슬을 내리기도 하는 한편 친정인 연나부를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왕후의 일가에서 반역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연나부가 몰락하게 되었으며, 이 와중에 고국천왕까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때 우왕후는 임금인 남편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고는 고국천왕의 동생이자 자기에게는 시동생인 발기를 찾아가 왕위계승을 제안했지만 서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우왕후가 발기에게 임금이 되도록 돕겠다고 했지만 그는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는 왕위가 자신에게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자 상황인데 거래를 하려 든다며 거세게 화를 냈다.
그러자 우왕후는 곧바로 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이 때 연우는 발기와 달리 반갑게 예우하며 맞아들였으며, 그가 직접 요리를 하여 맥적(貊炙, 고구려인이 맥족인데 그들이 즐겨 먹던 고기구이 음식으로 나중에 너비아니와 불고기로 이어지기도 하였음)을 구워 대접했다. 그러자 우왕후는 이만한 인물이라면 안심하고 왕위와 자신의 몸을 의탁해도 좋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직후 우왕후와 연우 두 사람은 곧바로 고국천왕이 있는 궁궐로 향했으며, 다음날 아침 우왕후는 고국천왕이 다음 임금으로 연우를 지명했다는 유언을 발표했으며, 가짜 유언장까지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연우는 고구려 10대 국왕이 되니, 그가 산상왕이었다.
이에 발기는 반발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전세마저 수세에 몰리면서 그 자신도 자결해야 했다. 이후 산상왕은 우왕후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왕후는 한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2번 왕후가 된 여성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왕후와 산상왕의 맺음은 당시 행해지고 있던 형사취수제의 풍습인데, 이는 몽골을 비롯한 대초원문명 유목기마민족들에게는 공통으로 있었다. 원래 고구려는 물론이고 초원지대에는 사람 수가 적어 가장이 죽으면 그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을 통해 부인과 자녀들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산상왕은 관나부의 후녀(后女, 어머니가 임신중에 무당이 점을 쳐 왕후가 될 아이라고 말하자 아이 이름을 후녀라 지었다고 함)와 사랑을 하자, 이를 알게 된 우왕후는 군사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임신을 하고 있음을 알고서는 그만두었다. 고국천왕도 자신도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후녀는 아이를 낳았고 교체(郊遞)라 이름지었다. 이후 교체는 우왕후의 질시와 핍박속에 자라야 했으나, 227년 아버지 산상왕이 죽자 제위를 물려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11대 동천왕(재위 227~248. 휘는 우위거憂位居, 위궁位宮이라 함)이다.
234년에는 우왕후도 죽음을 앞두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유언으로 산상왕 옆에 묻어 달라고 하여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우왕후가 묻힌 다음날 무당이 동천왕을 찾아와 ‘꿈에 고국천왕이 찾아와, 우왕후가 산상왕 옆에 묻혀 창피하다며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동천왕은 고국천릉 앞에 7겹의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고국천왕을 기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