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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건축학회 회지 월간 <건축> 2001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에는 ‘건축과 타 장르’라는 주제로 특집이 편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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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 양식이 그러하듯이 건축 또한 시대와 사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유럽의 중세와 바로크 시대를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두 시기야말로 한 시대의 문화와 사회가 건축에 미친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에 속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먼저 중세를 보기로 하자. 서양중세사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 로마제국 멸망 직후의 중세초기(early Middle Ages, 600~1050), 중세 유럽문명이 활짝 꽃을 피운 중세전성기(High Middle Ages, 1050~1300),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던 시기인 중세말기(later Middle Ages, 1300~1500) 등이 그것이다. 중세 초기의 서유럽은 인접한 비잔티움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에 비해 물질적, 지적 성취의 수준이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전성기 서유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유럽인들은 이 시기에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키고 국민국가를 수립했으며, 대학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을 출발시키는가 하면 위대한 문학과 예술을 창조했다.
중세전성기는 무엇보다도 종교 분야에서의 개혁운동과 신앙적 부흥이 강렬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전 시대에 널리 성행되던 성직 매매(simony), 성직자의 축첩 행위 등 종교 부패를 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1세기 후반에 일련의 개혁 교황들이 등장함으로써 성직자들의 도덕성이 쇄신되고 교황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대표적인 개혁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73~1085 재위)는 성직자들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순결을 요구했다. 그를 반대한 일부 성직자들은 그가 성직자들로 하여금 천사처럼 살 것을 요구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에 대한 광범한 개혁 조치를 바탕 삼아, 국왕과 황제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했다. 국왕과 황제는 교황의 명에 복종하여 세상을 개혁하고 복음화 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레고리우스는 세속 군주들이 순수한 세속적 문제들에 대해서만은 지배권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교황의 ‘궁극적인 최고권’을 받아들일 것을 희망했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으로서의 활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가 교황이 되기 얼마 전인 1046년에만 해도,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가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제각기 자신이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교황을 추방한 다음, 자신의 시종 중 한 사람을 교황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사실 1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의 임명권(서임권)은 철저히 세속 군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오랜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세속지배자의 성직 서임권을 거부했고, 그 결과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의 커다란 반발을 사게 되었다. 성직자를 임명하고 통제하는 일은 황제의 오랜 관행이었고, 그것이 없다면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자 교황은 즉각 황제를 파문하고 세속 군주로서의 모든 권력을 정지시켰다.
교황의 이러한 대담한 조치에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 황제들은 955년에서 1057년 사이에 재위했던 교황 25명 가운데 5명을 폐위시키고, 12명을 새로 임명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교황이 감히 황제의 파문을 선언한 것이다!
1077년 한겨울에 하인리히 4세는 허겁지겁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서 교황 앞에 부복했다. 그는 사흘 동안 내내 성문 앞에 서서 맨발에 허름한 옷을 입고 교황의 위로와 도움을 간청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황제와 교황의 관계가 극적으로 역전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동시대인들에게 교황의 황제 파문 이상의,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엄청난 사건으로 비쳐졌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유럽인들은 길쌈하던 아낙네와 작업장의 직공들마저도 이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화제로 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적 부흥의 열기가 없었더라면 ‘십자군운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095년 11월에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가 프랑스의 클레르몽 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운집한 군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며 너무나 열렬히 외쳐대는 바람에 교황이 연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둘러 동방으로 향했다. 대략 10만 명의 인원이 십자군 주력부대에 가담했는데, 당시의 인구를 감안할 때 그것은 엄청난 숫자였다.
11세기 후반에 시작된 종교적 열기를 이어받은 12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제도와 관행의 대부분이 성립된 시기이기도 했다. 7성사(seven sacraments)의 교리가 확정되고, 성체 성사에서 성직자의 기적적 권능―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꾸는―이 크게 강조되었으며, 마리아 경배가 교리로 정착되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마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역사를 4백년으로 잡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정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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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마리아 경배가 카톨릭 교회에서 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문학 장르상의 변화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중세전성기의 초기에만 해도 속어(俗語) 문학의 대부분은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되었다. 이 서사시들은 거칠고 남성적인 전사들의 사회를 묘사했다. 유혈이 낭자하고, 전투용 도끼로 해골이 쪼개지는 장면이 나오며, 그 주제는 으레 영웅적인 전투, 명예, 충성 등이었다. 설령 여성이 등장한다 해도 그들은 으레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마리아 경배가 카톨릭의 교리로 자리 잡으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종교적으로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아를 묘사한 예술가와 문인들은 여성다움과 인간성의 부드러움, 그리고 가정생활에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예술 및 문학 양식을 부드럽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학에서 ‘서사시’를 대신하여 ‘로망’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 설화시들은 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할만한 것들로서,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인물 묘사에서 탁월했고, 그 주제는 대개 사랑과 모험이었다. 종교적 변화의 영향으로 여성적인 요소가 문학 작품들 속에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켈트족의 영웅 아서 왕(King Arthur)과 그의 기사들을 다룬 것들이었다.
종교적 부흥과 열정으로 특징 지워진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건축양식은 고딕 양식이었다. 그러나 고딕 양식을 다루기에 앞서, 중세전성기에 고딕 양식보다 먼저 있었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소개한 다음 이것을 고딕 양식과 비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0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완숙된 것은 11세기 및 12세기 전반이었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개혁운동에 힘입어 수많은 새로운 수도원들 및 대형 교회들이 건축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모든 건축적인 디테일을 획일적인 체계 속에 엄격히 종속시킴으로써 교회 건축물을 통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12, 13세기를 거치면서 전 유럽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 양식으로 대치되었다. 두 양식은 물론 인과적인 연결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양식은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실로 두 양식은 문학 장르에서 ‘서사시’가 ‘로망’과 다른 것처럼 현저히 달랐다. 두 양식의 차이를 서사시와 로망의 차이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딕 양식은 ‘로망’이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인 12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해 한층 여성적이고 세련되고 기품 있고 우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여성적인 특징은 ‘로망’을 ‘서사시’에 비교해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종교와 사회가 문학과 건축 양식에 얼마나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이 시대에 새로이 건립된 대성당들은 모두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이었다. 노트르담(Notre Dame, ‘우리의 귀부인’ 즉 ‘마리아’를 의미함) 성당은 파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 랭스, 아미애, 루앙, 랑 등 프랑스 각지에 수많은 ‘노트르담’ 성당이 건립되었고, 두 말 할 나위 없이 이들 대성당은 모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고딕 양식의 급격한 수용과 발전은 12세기가 현대에 못지않게 실험적이고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수호성인의 성소이자 역대 프랑스 국왕의 묘지로 존중되어 오던 성 데니스(St Denis) 수도원 교회는 1144년에 전혀 새로운 고딕 양식의 훨씬 규모가 큰 교회를 짓기 위해 헐렸다. 그것은 마치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미스 반 데어 로에(Mie van der Rohe)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초현대식 건축물을 짓는 것에 견줄만한 일이다.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아마 엄청난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12세기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것도 별 저항 없이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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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건축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를 우리는 바로크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출발점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바로크 양식이 활짝 꽃핀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그러나 17세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바로크 시대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음악 면에서는 그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다.) 그러므로 바로크 시대의 절정기는 대체로 1650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양식들이 그러하듯이 바로크 양식에는 아무런 통일된 특징이 없다. 비유를 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사상과 감정의 공통 영역 안에서 작용하는 두 개의 자극(磁極)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의 공통 영역은 운동성, 강렬함, 긴장, 힘 등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라파엘로(Raphaello) 회화의 눈부신 조화에 나타난 르네상스 양식의 경쾌한 세속성과는 대조적으로, 바로크 양식은 대립과 극단 속에서 회의하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포만하고 무분별한 감각적 쾌락이 아닌, 양심의 가책을 수반하는 수척한 관능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바로크 시대는 양극단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전 시대의 격렬한 관능적 쾌락은 조야한 물질주의와 육욕적인 방탕으로 바뀌었고, 휴머니즘의 철학적・학문적 탐구는 회의주의와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졌다.
긴장과 강렬함은 음악이나 회화에서는 썩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건축이나 조각 같은 정적인 예술에 있어서는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된다. ‘바로크’란 말은 그로테스크하고, 지나치게 장식적이며, 사치스럽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바로크는 사실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로크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고전 미학의 규범을 통해서만 보려고 할 경우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한 고전 미학의 규범들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600년경에 이르러 그 규범들은 폐기됐다. 회화와 조각과 음악에서 그러한 접근 방식은 효용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는가? 무슨 강렬한 충동이 있었기에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는가?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창조적 충동의 지성소(至聖所)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그 앞마당까지는 가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유럽인들이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면서 겪었던 낯선 경험들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갖게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결과로 출현한 양식은, 말하자면 파괴적 폭발력을 지닌 중심부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외적으로 투사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을 등장시킨 시대의 폭발력은 부분적으로는 ‘우주적’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우주적인 면에서 폭발력이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을 통해 획득된 경험을 말한다. 그의 발견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단지 우주 속의 한 점 티끌일 뿐이며, 광대한 우주의 주변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천동설에 입각한 지구 중심적인 우주관의 한가운데에서 누리던 편안함과 안락함은 사라지고, 대신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길 잃은 보잘것없는 고독한 인간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발견과 더불어, 바로 그 새로운 과학을 통해 새롭게 얻어진 막강한 힘에 대한 의식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원거리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는 힘(망원경의 발명)이었고, 천체의 조화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로 해석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법칙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법칙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무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의 경험에 더하여, 정치 세계에서 또 다른 힘이 추가되었다. 16세기 종교전쟁의 혼돈 속에서 출현한 근대 국가는 붕괴된 봉건 질서를 대신하여 그 위상을 확립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상비군으로 대변되는 근대 국가는 하나의 새로운 질서였다. 엄청난 인구를 조직화하여 장악하고, 에스파냐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 제국 등의 형태로 세계를 석권하면서, 이 새로운 국가체계는 전대미문의 막강한 권력을 구현하게 되었다.
성벽 안에서 긴밀하게 조직화되었던 성읍 공동체는 무너져 버렸고, 그와 더불어 성벽 안에서 견지되던 봉건 귀족들의 독립성도 무너졌다. 지역적 자부심과 지역적 권력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보루가 힘없이 무너지자, 새롭게 등장한 막강한 권력 앞에서 또다시 철저한 무력감이 엄습했다. 여기서도 역시 사람들은 고독과 소외와 절망이라고 하는 새로운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역사상의 몇몇 위대한 양식들은 심각한 양극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그 양식들이 성립하는 바탕이 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내적 모순 때문이다. 바로크 양식을 바로 그러한 심각한 양극성을 바탕으로 등장했다. 한편으로는 막강한 힘의 경험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힘의 결핍 즉 무력감의 경험이 있다. 권력의 경험과 무기력의 경험, 이 두 경험이 바로크 시대 사람들이 그들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보이는 새로운 반응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바로크 양식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크 시대 속에 전 생애를 보낸 한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이다. 바로크 양식 건축물의 선구자격인 로마의 일 제수 교회(Il Gesù, 1568년에 자코모 다 비뇰라에 의해 명명된 예수회의 로마 모교회로서, 이 건물은 바로크 시대에 세워진 많은 가톨릭 성당들의 원형이 되었으며, 예수회 건축양식의 원천이 되었다.)가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588년에 태어난 그는 ‘죽어야만 종식되는 부단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성찰하다가 1679년에 사망했다. 마치 일-드-프랑스(Ile-de-France, 프랑스 중북부의 주(州)들로 이루어진 지방을 말하며 중심 도시는 파리 시이다.)가 고딕 양식의 중심이듯이, 로마와 이탈리아는 바로크 양식의 영감의 원천으로서 17세기 말까지 전 유럽의 예술과 삶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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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바로크 양식의 특징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양식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고 단일한 특성으로 유형화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조적인 양극의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특징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인이 겪었던 권력의 경험―그것은 바로크의 근원이 되었다―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에는 제한이 없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불가능’에 도전했다. ‘운동’과 ‘힘’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은 과거에 시도되지 않았던 형태와 재료를 대담하게 실험했다.
많은 연구자들은 바로크 예술가들이 비단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도 강하게 집착했음을 강조해왔다. 그들은 심지어 공간적 관계에 대해서도 시간적 차원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 그리고 시간이 가져다주는 냉혹한 파괴에 대한 감각은 바로크 시대의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폭넓게 나타났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이 가장 잘 구현된 것은 오페라에서였다. 오페라 형식이 처음 고안된 것도 바로 이 시대의 일이었다. 여배우들의 연기와 의상은 물론, 건축을 회화, 조각, 시, 음악 등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대한 오페라 상연에 관한 극적인 서술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오늘의 독자들은 바로크 음악 세계의 호화로운 장려함과 광채―비록 덧없는 것이기는 하지만―를 다시는 되살려낼 수 없음을 깨닫고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또한 그러한 양식은 추악하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결과물들을 산출하기도 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종 우스꽝스러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특징들은 무절제한 일부 교화 건축물들, 베르사유를 조악하게 모방해 만든 도금된 실내 장식들 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까닭에 조악한 건축물들을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라 치부해 버리고, 이 시대가 산출해낸 수많은 탁월한 예술품들의 존재를 외면하기 쉽다.
바로크 건축 양식은 장식이 풍부한 파사드, 완만한 곡선의 계단, 먼 곳을 볼 수 있는 탁 트인 장식용 정원 등을 낳았다. 계단을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르네상스 건축은 계단을 감추려고 애썼다. 계단은 움직임을 연상시키며, 또한 시간의 흐름을 말해준다. 그러나 계단의 극적인 형상에 매혹된 바로크 건축가들은 실로 서양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계단을 창조해냈다.
바로크 계단의 아름다움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다. 파사드라든가 극적인 세부묘사에 있어서는, 탁월한 바로크 작품들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Saint Peter's Basilica)의 콜로네이드(Colonnade), 베르사유 및 그에 버금가는 궁전들, 특히 뷔르츠부르크(Würzburg)의 주교 관저, 비스(Wies)・피어첸하일리겐(Vierzehenheiligen)・멜크(Melk)의 수도원 교회, 그리고 런던의 성 바울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 등이 가장 뛰어나다.
이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들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로부터, 망사르(Francois Mansart, 1598~1666)와 노이만(Balthasar Neumann, 1687~1753)을 거쳐, 써 크리스토퍼 렌(Sir Christopher Wren, 1632~1723)에까지 이른다. 이 바로크 건축가들의 명단에 우리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이름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 등 탁월한 작품들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을 초월하여 다가오는 양식상의 혁명을 예고해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