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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제가 교수님을 면담 요청한 가장 큰 이유는 명상이 중요하다고 알려진 것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인데요 명상에서의 핵심은 몸과 마음에서 경험되어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인데 그것을 빨리어로는 Sati라 하고요. 그런데 알아차림을 측정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계를 만드셨다고요?
김교수: 불교에서는‘찰나’를 말하거든요.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하루는 648만 찰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를 요새의 시간단위로 계산하면 75분의 1초가 됩니다. 물론 물리적인 시간은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100분의 1초, 200분의 1초와 같이. 그러나 찰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고 심리적 시간의 최소단위입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시간이 75분의 1초라는 말입니다. 75분의 1초보다 더 짧으면 인지되지가 않아요. 마술사들의 손놀림은 그것보다 더 빠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75분의 1초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시간의 제일 작은 단위에요. 예를 들어서 영화 필름의 경우 1초에 정지화면 커트를 22장을 이상 집어넣어야지만 매끄럽게 보이거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에는 1초 동안에 60장이 들어가야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월트디즈니 만화에 보면 부드럽죠. 일본만화를 보면 딱딱하죠. 일본만화는 한 15장 들어간답니다. 값싸게 만들기 때문에. 60이라는 숫자가 75랑 비슷하잖아요.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최소단위는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각 말고 촉각일 경우에 찰나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가장 짧은 촉각을 얼마쯤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구사론'볼 때부터 저에게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구사학'(김동화 저)이라는 책을 통해서 찰나 이론을 85년도에 처음 접했습니다. 촉각일 경우에 제일 짧게 느끼는 최소 단위가 얼마인지 항상 의문이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측정할까 생각을 하다가, 몸에 여러 개의 촉각 자극 장치들을 붙인 다음에 그것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예를 들어서 촉각 자극 장치를 2개 붙이면 짧게 자극해도 2개 모두 느낄 겁니다. 그러나 그 개수를 점차 늘리면 어느 개수 이상부터는 동시에 모두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때 우리가 촉각의 영역에서 인지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시간을 계산할 수 있을 거라고 가설을 세웠습니다. 기계를 만들 게 된 계기는 그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자: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요, 몇 개까지 알고 모르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김교수: 예를 들어서 0.1초 동안 10군데의 촉각 자극만 인지했다면 0.1 나누기 10하여 구한 0.01초가 촉각 인지 시간의 최소치일 겁니다. 즉 촉각 영역에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의 최소단위, 즉 찰나는 0.01초가 되는 것이지요.
기자: 사띠기계는 집중력 향상에는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김교수: 그러나 처음에 기계를 만든 목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집중력 향상도 아니었고, 통찰도 아니었고, 짧은 시간 동안 촉각 자극을 몇 개까지 알 수 있나 측정하는 것, 그게 목적이었어요. 촉각의 세계에서, 촉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알 수 있는 시간의 최소단위가 얼마일까, 그런 생각에서 기계를 고안했었습니다. 30년 전에 생각만 하고 있었죠. 강의 중에도 이런 고안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촉각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
기자: 사람들이 촉각을 느끼면서도, 대부분의 경우에 닿는 것에서의 경험을 놓치고 살지요.
김교수: 지금도 발바닥이 땅에 닿고 있고, 머리가 간지럽고, 등에 옷이 닿아 있는 등등 여러 가지 촉각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 내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 인지하고 다른 촉각은 모두 무시하든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 몸에 접촉한 것들 가운데 소수의 촉각만이 파악된다는 말입니다. 그 개수를 세어서 찰나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촉각의 세계에서.
기자: 그 기계는 촉각의 경험만 알 수 있는 건가요?
김교수: 원래는 촉각의 최소단위만 알기 위해서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4년 전의 일입니다. 현재 상용화 한 것은 개량을 되풀이 하여 최종 제작한 네 번째 기계입니다.
기자: 더 향상된 기계도 만드셨네요.
김교수: 처음 만들었던 Version1의 경우 기계도 커다랗고, 촉각 자극기가 20개나 달려있습니다. 자극의 세기를 조절하는 볼륨도 있고, 자극의 시간을 조절하는 타이머도 있고요. 촉각 자극기의 경우 이어폰 속에 작은 진동모터를 집어넣어 만들었습니다. 진동모터는 휴대전화 진동기능에 사용하는 소형 모터입니다. 값싼 이어폰을 구입하여 분해한 다음에 스피커를 버리고 소형 진동모터를 집어넣어서 만들었습니다. 몸에 붙일 때에는 반창고를 사용했고요. 이렇게 20개를 제 몸에 붙이고 첫 실험을 해 보았는데 촉각 자극기 개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모두 인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극기를 10개로 줄인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진동모터의 경우 이어폰에 넣지 않고 그냥 노출시켰습니다. Version2를 만든 겁니다. 그 후 다시 아이디어를 내서, 소형 모니터를 장착한 Version3를 제작했습니다. 모니터에는 기계에서 발생시킨 촉각 자극의 개수와 순서 등이 숫자로 표시됩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여 상용화 한 후 현재 보급하고 있는 것이 Version4입니다. 처음에 만들었던Version1의 경우에는 Sati명상과 무관합니다. 그런데 Version1으로 자가 실험을 되풀이하다 보니까 “이것이 Sati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Sati기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작정을 하였고 Version2, 3이 나오게 된 거에요. 시작은 촉각의 세계에서 시간의 최소단위인 찰나를 구하려고 하다가 나중에 바꾼 겁니다. Sati와 원리가 똑같기 때문에. Sati-Meter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인 겁니다.
기자: 찰나의 시간을 실제적 촉각을 통해서 추정하거나 규정하시려고 하셨다고 이해해도 됩니까, 그러시다, 사띠기계로 바뀌면서 실제적으로 사띠를 갖는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교수: Sati 수행, 위빠사나가 많이 보급이 됐잖아요. 크게 보면 사띠고, 그 중의 일부가 위빠사나거든요. 위빠싸나 수행 가운데 고엔카 수행도 있고, 마하시도 있고, 파욱도 있고, 쉐우민도 있는데 공통점은 촉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들의 수행에서 “보이는 것에 집중하라.”, “소리에 집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숨이 코로 들어가는 느낌, 배가 움직이는 느낌. 발로 땅을 밟는 느낌,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이런 느낌들 모두 촉각입니다. 수행의 시작은 호흡에서 일어나는 촉각이지만, 나중에는 온 몸에서 일어나는 촉각에 대해서 주시하게 합니다. 위빠사나의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촉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숨을 쉴 때, 걸어갈 때 근육이 움직이는 느낌들입니다. 그와 달리 Sati-Meter를 이용한 명상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은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촉각들입니다. 기계를 누르면 몸에 부착한 소형 진동모터가 떨면서 촉각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촉각은 어디서 일어날지 모릅니다. 몇 개가 발생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인지 여부도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Sati-Meter에서 발생하는 인위적인 촉각은 자극 개수와 자극 시간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10곳을 자극할 수도 있고, 5곳만 자극할 수도 있으며, 자극의 순서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극의 개수, 시간, 순서 등의 패턴이 전부 모니터에 나타나기 때문에 자극이 객관화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인지된 자극의 패턴과 실제로 모니터에 나타난 자극의 실제 패턴을 비교하여, 촉각 자극에 대한 나의 인지능력을 측정합니다. 촉각 자극의 개수를 점차 늘리든가 자극 시간을 점차 줄여가다가 인지에 착오가 생기는 지점이, 현재 나의 촉각 주의력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 때 착오가 생긴 패턴을 고정시키고 반복하여 자극을 발생시킴으로써 나의 인지 착오를 시정하는 훈련을 합니다. 피드백 방식으로 촉각자극에 대한 인지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기자: 작동 스위치를 눌렀을 때에 경험되는 촉감은 열 개이든 한 개이든 똑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잘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하는 차이는 어떻게 해서 생기죠?
김교수: 그것은 촉각 주의력에 개인차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의 집중과 산만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자: 사띠(알아차림)가 잘 되었는가 아닌가를 몸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매우 유용한 기계가 되겠습니다.
김교수: 불교 수행의 과정을 계, 정, 혜 삼학으로 구분하는데, 이 기계의 경우 그 가운데 주의집중에 해당하는 ‘정’만 훈련합니다. 지혜까지 계발하지는 않고 철저하게 집중하는 힘만 키웁니다.
기자: 사띠기계의 가격은 얼마입니까?
김교수: 현재 상품화 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판매하진 않고 주로 실험용으로 사용하는데, 소량 생산하기에 좀 비쌉니다. 한 대에 253만원입니다. 미화로 2000달러 좀 넘을 것 같습니다.
기자: 미국에서도 판매 가능합니까?
김교수: 미국에서도 쓸 수 있게 상품화 하였습니다. 전자기기의 경우 각 나라마다 전자파 인증을 받아야 시판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전자파인증을 받았습니다.
기자: 불교학을 하시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기계를 만드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김교수: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습니다. 물리학을 좋아하고 잘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도 있었어요. 그런데 나보다 수학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물리학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만들고 고치는 것을 좋아했기에,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도 많이 그리고 조소 작품도 많이 만들었는데, 고2 때 미술대학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반대로 포기한 후,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치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2년 이후 1999년까지 손을 쓰는 직업인 치과의사로 17년을 일했습니다. (여러 미술작품들 사진을 보여주심) 현재는 불교학자, 인문학자로 활동하지만 지금도 육체노동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노동을 존중합니다. 4년 전 안식년을 받아서 1년 쉬는 동안 촉각자극분배장치 Version1을 만들었습니다. 온갖 도구와 부속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주문을 할 수 있기에 제작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불교학자로서 가장 좋은 점은 하고 싶은 게 있는 경우 뭐든지 해도 다 불교학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윤리에 관심이 있으면 불교생명윤리에 대해 연구할 수 있고, 정치학에 관심이 생기면 불교정치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든 기계 역시 전기전자공학적인 것이지만, Sati명상을 객관화 시킨 기계이기에 응용불교학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구사론'을 공부하면서 촉각의 영역에서 찰나의 길이가 얼마인지 측정하는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에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제가 직접 만들게 된 겁니다. 그래서 Version1까지 만들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 기계의 원리가 Sati명상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일이 커져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 기계가 널리 보급되면 사람들의 심신안정과 불교포교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상업화하기 위해 특허출원을 하였고 재작년 9월에 특허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등록까지 하였습니다. 또 ‘명상과학사’라는 이름의 회사도 설립하여 판매용 제품인 Version4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자: 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시고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내시는 군요.
김교수: 이번에는 명상에 도움을 주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근 10년 동안 제가 근무하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에서 포교용 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수업을 담당하여, 불교콘텐츠가 담긴 여러 편의 영상물을 제가 직접 만들기도 했고, 학생들에게 제작 방법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기자: 교수님께서, '중론' 즉 공사상 체계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주석서를 내셨는데,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공’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교수: 공이란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방에 처음 들어가려고 방문을 여니까 방이 큽니다. 그런데 그 큰방이라는 생각은 방에 들어가기 전에 염두에 두었던 작은방과의 비교를 통해서 생긴 겁니다. 이와 반대로 머릿속에 더 큰 방을 염두에 두고 방문을 열었다면 작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실제로 그 방의 크기가 원래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 염두에 둔 것에 의존해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의 크기는 실체가 없고 공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공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예가 되겠습니다.
기자: 의식에서 인식하는 현상에 대해서는요?
김교수: ‘크다’,‘작다’는 사실은 바깥에 절대 없죠. 머리가 만든 거죠.
기자:‘방’이라는 공간적 대상이 있고, 그것에 대한 크기의 관점에서 크고 작은 것은 없다는 것은 비교에 의한 개념이라는 것은 이해됩니다만..
김교수: 조금 전의 설명은 크기의 세계만을 예로 든 겁니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분석해야 방이 공함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물이든 사태든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머리가 의미를 부여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공합니다. 즉 실체가 없습니다. 바깥세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기자: 지금, 교수님께서 물잔을 만지시는데, 잔이 유리래서 차갑다거나 매끄럽다거나등의 촉감이 유리잔을 만지면서 경험하는 것으로 유리잔, 손, 닿음, 차거움 등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공’을 이해하기는 어렵겠네요.
김교수: 지금 그렇게 확실하게 생각하는 게 어느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에요. 차갑다 따뜻하다, 유리다, 등등의 생각이 모두 머리가 만든 착각입니다. 관점이 달라지면 또 다르게 보일 수도 있고요.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공하다는 점을 여기서 다 얘기할 수는 없기에 공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예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공사상에서는 시간도 공하다.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만난 적이 없어요. 단 1초 전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지 않은 시간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단 1초 후도 직접 대면 못합니다. 그렇다면 항상 대면하는 것이 현재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현재가 몇 초냐고 할 때 1초라고 해도 너무 길어요. 또 0.1초라고 해도 너무 길어요. 현재는 잘라지고 잘라지다가 나중에 증발해서 사라집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보면,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틈에 껴서 있을 곳이 없다고 합니다. 과거와 미래도 실재하지 않지만, 현재도 없어요. 따라서 시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시간뿐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그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다 머리가 만드는 겁니다. 마음이 만들었다고 해도 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해도 됩니다. 바깥세계에서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기자: 뇌(머리)에서 인식하는 것이 없다는 거죠, 물리적으로? 그러면 무엇으로 가능한 겁니까?
김교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하듯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세상만사는 다 각자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 속에만 있습니다.
기자: 그러면 깨달음을 이뤘다고 할 때에, 깨달음은 뭐고 이뤘다는 것은 무엇이 아는 것입니까?아무 것도 없다면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의 체득도 없다는 거에요?
김교수: 물론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는 '반야심경'의 경구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사상 가운데 나중의 얘기입니다. 세상만사가 공함을 먼저 알아야 하고, 나중에 그런 앎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고 놓아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깨닫는다는 게 어떤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깨달음은 어떤 체험이 아닙니다. 탐욕, 분노, 고정관념 등의 번뇌를 그저 지우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을‘무위법(無爲法)’에 포함시킵니다. 이와 반대인 ‘유위법’은 연기하는 것이고, 조건이 만든 것이고, 체험입니다. 그러나 ‘무위법’은 체험이 아니고 조건이 만든 게 아니고, 연기한 게 아닙니다. 허공이 무위법이고, 열반이 무위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의 크기의 경우 큰방, 작은방 이라는 것이 실제 있는 줄 알았는데 통찰해 보니까 외부세계에 없어요. 그러면 큰방, 작은방이라는 생각의 속박에서 해탈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이외의 세상만사에 대해서는 아직 다 속박되어 있어요. 공사상을 올바로 체득하려면 세상만사를 하나하나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아까 검토해 봤듯이 시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도 실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큰방, 작은방, 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다섯 가지 개념에서 해탈한 것입니다. 공사상에서는 세상만사를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하나하나 증발시킵니다. 말하자면 실재의 세계에서 소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거하기 쉬운 개념도 있고, 소거하기 어려운 개념도 있습니다. 수학문제 풀 때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가 있듯이.
기자: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과,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인식적 이해로 의한 체득이 실제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김교수: 공사상을 배우기 전까지는 고정관념들이 있거든요,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 세계관 역시 고정관념의 일종입니다. 공사상, 공의 논리를 익히고 나면 그게 다 지워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열립니다. 예를 들어서 장기나 바둑, 화투 등의 게임을 할 때 이기려고 욕심을 내면 오히려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훈수, 코치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어디에 두면 좋은지 훤히 보입니다. 공사상이 바로 이런 겁니다.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나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고 생각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항상 가장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게 해 줍니다.
기자: 있는 그대로라는 실상은 또 무엇인가요?
김교수: 불전에서 말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것인데, 나한테 만약에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할 경우에, 평생 돈 때문에 허덕이면서 돈만 추구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돈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질 경우에 돈이랄 것도 없지만, 또 거꾸로 모든 게 다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의 정체가 뭐냐 할 때에, 이제 돈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을 때에는, 실제 돈의 기원을 보면 물물교환을 하다가 나중에 화폐가 생기잖아요. 돈이 뭐냐 할 때에 종이가 뭐냐 할 때에 종이가 돈이냐 하면 이것도 아니에요. 동전도 있고, 금도 있고, 그렇게 하다보면 세상에 돈 아닌 게 없어지게 됩니다. 갖다 팔면 돈이 되거든요. 인신매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도 돈이잖아요. 옛날에는 수돗물 그냥 먹었는데 물도 이제는 돈 주고 사먹습니다. 또 심지어 공기도 요즘에는 돈이에요. 약국에서 심장병환자를 위한 소형 산소통을 판매합니다. 돈의 정체를 알고 나면, 돈이랄 것도 없지만 거꾸로 모든 게 다 돈이라는 통찰이 생깁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욕심도 없어지지만은, 마음만 먹으면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 수도 있을 겁니다. 다 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상의 효용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40평짜리 집에 살고 있는데 이 집은 작은집 보다는 크고, 큰집보다는 작습니다. 그런데 내 집이 크다거나 작다는 생각을 가지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크다거나 작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경우에 그런 감정들이 사라집니다. 다시 얘기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자동차를 갖고 있는데 그 모습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바깥에서 보는 내 차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핸들 잡고 보는 모습입니다. 내 차가 렉서스입니다. 벤츠보다는 값이 싸고, 소나타보다는 비쌉니다. 이게 상대적인 관점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이 차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있을 때에는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가 모두 절대유일의 것들입니다. 핸들도 하나밖에 없고, 백미러도 하나고, 기어도 하나고, 내비게이션도 하나입니다. 이 때에는 우월감이든 열등감이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공사상을 체득하여 고정관념이 사라진다는 얘기는 남이 주입한 생각들, 객관화시킨 생각들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 때 내가 체험하는 것 모두가 다 절대로서의 제 자리를 찾습니다. 사람들은 개인마다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다 달라요. 같은 인간인 이상 90% 정도는 겹치겠지만, 10%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성격차이가 있고 추구하는 게 다른 겁니다. 그런데 공사상을 체득하면 모든 고정관념들이 다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에 맺혔던 한이 다 풀립니다. 그 전까지는 나를 구심점으로 삼아 살았는데, 모든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한이 다 풀린 후에는 삶의 구심점이‘나’에서‘남’으로 바뀝니다. 즉 괴로운 사람, 힘겨워하는 사람을 구심점으로 삼아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보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공사상을 체득하여 인지가 해체된 후 감성도 서서히 변합니다. 해체됩니다. 이런 과정을 불교전문용어로 돈오점수라고 합니다.
기자: 교수님께서 번역하산 책도 있으시고 또, 책을 쓰셨는데 '눈으로 듣고 귀로 읽는 붓다의 과학이야기'라는 책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교수: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을 불교의 시각으로 풀어 본 책입니다.
기자: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과학이란 무엇이기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결하셨나요?
김교수: 제가 그 책을 쓴 목적은 전략적인 데 있습니다. 현대과학 가운데 최첨단 분야가 뇌과학과 진화론이거든요. 앞으로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이 점령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지금도 이들 학문의 이론들이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언어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원시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입니다. 이런 학문의 흐름 속에서 불교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뇌과학이나 진화론의 용어로 불교를 재해석해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저술한 책입니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의식 하에 미래의 주역이 될 젊을 세대를 위해 만든 책입니다. 뇌과학의 경우 뇌와 관련한 실험을 통해 얻어진 온갖 데이터가 다 있지만 아직도 확정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의 정체입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하듯이 불교가 그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기자:“인간의 뇌 속에 종교적인/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요, 이점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신다면,
김교수: 그러니까 본능 중에 하나, 종교본능이 있습니다.
기자: 본능, 종교본능과 불교의 ‘무아설’과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교수: 종교본능도 그게 신비의 세계라든지 이게 아니고요. 유발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 보면 나오죠. 인간이 집단생활을 영위하면서 발생한 것이 종교인데,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종교와 다를 게 없다고 합니다. 종교적 본능이 있다고 하겠죠. 종교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그 답이 여러 가지입니다. 서구종교의 경우 절대자에 대한 의지라든지 절대자와의 합일을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불교는 이와 다릅니다. 불교에서 불성이라고 할 때 이는 기독교의 영성과 달라요. 불교의 불성은 불이중도(不二中道)를 말합니다. 흑백논리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중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중도불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런 의미에서의 불교에서 추구하는 종교적 본능을 얘기할 수 있지만 중도불성은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뇌의 속박에서 벗어남으로써 체득됩니다. 띠리사 뇌 속에 종교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불교적인 종교본능에 대한 말이 아니고, 서구적인 종교, 좀 차원이 낮은 종교에 해당하는 얘길 겁니다. 그런 종교본능의 경우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에서는 이타주의도 다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들이 큰 병에 걸렸다가 나으면 착해지거든요. 예를 들어서 암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 가운데 평생 봉사만 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진화생물학으로 해석하면 아주 간단한 것이거든요. 사람은 개체(Individual)이기도하지만 유전자(Gene)을 가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체 중심의 삶은 이기적 삶이고, 악(惡)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유전자 중심의 삶은 동족을 위한 삶이고, 이를 선(善)이라고 부릅니다. 이타성이란 유전자 중심의 삶에 근거한 나온 도덕적 감성입니다. 우리가 ‘개체’로서 살아갈 경우 죽으면 없어집니다. 그런데 유전자 중심으로 살아갈 경우 내가 죽어도 나와 유사한 동족의 유전자는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유전자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큰 병에 걸리면 죽음을 의식하게 되고 병이 나은 후, 개체의 삶을 삶이 아니라 유전자를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게 무슨 신기한 얘기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일개미는 새끼를 못 낳거든요. 그런데도 목숨 바쳐서 여왕개미를 지킵니다. 동족의 유전자를 위한 지극히 이타적인 삶입니다. 꿀벌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의 선행에 대해서도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용어를 사용한 유물론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구성원이 적절한 이타성을 갖는 종족들만이 번성을 했거든요. 구성원들이 개체로서만 살려고 했을 때는 그 종족은 멸종합니다. 그런데 동족의 유전자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순국열사와 같은 분들입니다.
기자: 최근에 자기 종교적인 이유로 영국에서 테러사고가 일어난 것을생각해보면 종족본능 자체에도 집단이기심의 표출일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교수: 그럼요.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선을 어디에 긋는가에 따라서 개체적 삶과 유전자적 삶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가족, 친척, 민족 등이 피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어쨌든 양면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요. 이타성조차도 진화론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불교에 대해서도 뇌과학과 진화론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미래 세대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구성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과학의 시대거든요. 진화론이나 뇌과학과 기독교는 갈등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듯이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울 빛을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붓다의 과학이야기'는 이런 목적에서 저술한 책입니다.
기자: 사람들에게 불교를 친숙하게 한다거나, 경험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에 그런 책을 쓰셨군요.
김교수: 진화생물학은 철저한 연기법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형태가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조건에 의해서 빚어졌다는 이론입니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서. 이런 통찰은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에 다름 아닙니다. 연기와 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사상을 알려면 생명체의 모습에 대해 연기론적으로 해석하는 진화생물학을 알아야 합니다.
기자: 젊은이들을 위해서, 수업에서는 불교를 어떻게 가르치시는지요?
김교수: 저는 불교와 진화생물학을 접목하여 강의할 때 “왜 얼굴에 이목구비가 몰려있는가?”, “왜 대부분의 동물은 좌우대칭인가?”라는 식으로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짐승의 이목구비가 얼굴에 몰려있는데 요점만 말하면 모두 입주변에 포진한 먹이탐지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체의 모습이 좌우대칭인 이유는 앞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찾으려고 진행하면서 풍경을 좌우로 균등하게 가르기에 감각기관도 좌우로 갈라져 포진하고 몸의 모습도 좌우대칭으로 갈라집니다. 감관이 한 쪽에만 있으면 다른 쪽을 간과하기 때문에 약자가 되어 멸종합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감각기관이 좌우에 쌍으로 포진합니다. 인공물의 경우도 자동차든 비행기든 앞으로 진행하는 탈 것들은 다 좌우가 대칭입니다. 앞으로 진행하면서 양쪽을 균등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자: 그것이 연기론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교수: 어떤 신이 만든 그런 것이 아니고 ‘먹이탐지’, ‘진행함’ 등의 조건들로 인해서 ‘이목구비의 모임’이나 ‘좌우로 갈라짐’등의 결과가 빚어지는 겁니다. ‘연기’란 여러 가지 조건이 모여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다윈의 진화생물학은 생명체 형태에 대해 연기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 교수님은 원래 치과의사셨는데 어떤 계기로 불교학을 공부하게 되셨는지요?
김교수: 고등학교 때에 원래 미술대학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미술에 소질이 있는데 고등학교 때 수업만 끝나면 미술반 교실로 가서 그림 그리고 조소작업 하다가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하니까 부모님도 그랬지만 조소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조차 말리시더군요. 배고파사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과 소속으로 미술을 좋아했으니 공과대학의 건축과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화학 선생님께서 자기 친구 중에 치과의사가 있는데, 오전에 2시간 근무하고, 점심 먹으러 가서 2시간 쉬었다가, 오후에 2시간 근무하고 집에 가는데 돈도 많이 벌고 참으로 행복하게 산다고 하시더군요. 그 때 “야! 바로 저 직업을 가지면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서 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얼마 있다가, 지금의 관악구청 뒤에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아틀리에를 차렸고, 근 2년을 운영했습니다. 마지막에 종로3가의 예총화랑이란 곳에서 전시회도 했고요. 그래서 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가, 편안하게 미술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전업 작가는 되지 못할 테니 미술평론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초년생 때 미술비평에 대한 책, 철학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능엄경'을 봤습니다. 그 전에 노자의 '도덕경'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능엄경'을 읽어 보니까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미술이든 평론가든 철학이든 모두 내려놓고서 앞으로 평생 치과의사라는 생업과 함께 불교공부를 하고 불교수행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불교학과에 학사편입하려고 동국대학교에 갔던 적도 있습니다. 12월인가에 찾아가서 내년 3월부터 학사편입을 하고자 한다고 했더니 편입생 모집기간이 벌써 지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음 해로 미뤘는데,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대학원을 직접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들어가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미술대학에 가려다가 주변의 어른들이 못하게 해서, 치과대학가서 미술활동하려다가 중간에 불교를 만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운이 좋았습니다.
기자: 불교를 만난 것이 그럼 '능엄경'을 통해서였네요.
김교수: 그 전에도 물론 죽음의 문제라든지, 영혼의 문제 등을 풀기 위해서 불교적 사유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온갖 책을 뒤지다가 '능엄경'을 보니까, ‘보는 힘’은 변치 않는다는 구절을 보고서 감탄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은 항상 변하지만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그것이 죽지 않는 그 무엇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후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위를 받은 후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기자: ‘공’을 설명해주시고, “인식체계를 벗어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라 하신 교수님은 누구십니까?
김교수: 글쎄요. 답이 있는 건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은 흔히 있는데 …. 저는 지금도 그렇고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일시: 2017년 5월 26일
장소: 엠베서더 호텔(장충동) 커피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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