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영화배우]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 - 김지미 인생고백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PRE> 이 글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모든 이의 숭앙을 받으며 </PRE><PRE> 정점에 서 있던 여배우 김지미의 인터뷰중 숱한 스캔들과 </PRE><PRE> 연애사건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남성편력 부분만을 </PRE><PRE> 그대로 잘라 온 것임을 밝힌다.[에밀레]</PRE><PRE>
어떤 이들은 김지미(70·본명 김명자)를 남성을 파멸</PRE><PRE> 시키는 '팜므파탈' 의 상징이었고, 어떤 이들에겐 관습을 훌훌 벗어던진, </PRE><PRE>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였다.고 말한다.</PRE><PRE>
―1957년 덕성여고 재학 중, 명동에서 김기영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 되어 곧바로 영화 '황혼 열차' 의 주연으로 데뷔했다.
</PRE><PRE>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 로 스타 반열에 오르고, 영화를 연출했던
홍성기(1928~2001) 감독과 결혼했다.
18세에 결혼이라…. 너무 이른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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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의 아버지는 서울서 인쇄기계공장 및 인쇄소를 운영했고,
8남매 중엔 서울대 문리대, 서울음대 등 명문고·명문대 출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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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감독이 나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다.
사실 영화를 찍는 건지, 사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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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감독과 신인 여배우의 만남. 마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가 주연한
영화 '스타 탄생' 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아내는 가수로 승승장구하지만, 스타 남편은 슬럼프에 빠져 파경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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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씨와 내가 전속배우가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그 나이에 가정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보였겠나.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이혼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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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결혼 4년 만인, 1962년 9월 4일 이혼을 발표했다.
홍 감독은 "하룻벌이를 하는 지게꾼의 신세가 부럽다"고 했고,
김지미는 "어차피 맞을 소나기" 라고 했다. </PRE><PRE>
당시 편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던 김지미는
집 두 채 (600만원) 값을 남편 영화제작비용으로 댔다.
두 사람이 이혼할 무렵, 영화배우 최무룡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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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최무룡씨와는 어떻게 간통사건으로 얽히게 됐나.</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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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무룡씨와 거의 온종일 붙어 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현장에 앉아 서로 자기 속상한 얘기 같은 거 털어놓게 되지 않나.
그러다 정이 들었는데, 이게 '빵'하고 터져버리더라.
수습해야 하니까, 안 살 수가 없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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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9월 말, 최씨의 부인인 영화배우 강효실씨는
"개복 수술로 아이(영화배우 최민수)를 낳은 지 열흘 만에
남편과 김지미의 간통 사실을 확인했다"고 폭로하고, </PRE><PRE>
다음 달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두 배우는 구속됐고, 김지미씨는 자신의 집을 팔아 위자료 230만원,
채무변제 78만원 등 약 300만원을 강씨 측에 주기로 합의하고, 11월 7일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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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위자료를 왜 최무룡이 아닌 김지미가 물어줬나.</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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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동이 범법이라면 달게 감옥에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난리가 났다. </PRE><PRE>
게다가 나를 캐스팅한 영화가 30편 정도에 달했던 때였다.
내가 안 나가면 영화계가 풍비박산 나게 생겼었다.
최무룡씨는 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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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복혜숙 영화배우 협회장은 검찰 심문에서
'검찰수사와는 별개로 협회 측에서 두 사람의 영화출연을
정지할 방침' 이라고 밝혔고, 실제로 협회가 1년 출연정지를 결정했다.
기분이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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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얘기다. 그때는 내가 영화 출연 안 하면 영화계가 안 돌아갔는데….
난 아무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
아마 사회분위기가 엄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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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사건에도 불구, 여전히 최고 배우였고,
70년에는 일일세관원으로 휴대품을 검사하는 등'국책 이벤트'에도 동원됐다.
그 시대 어떻게 가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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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참 희한한 것 같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내가 못한 거 실컷 해서 통쾌하다'
'당당하게 잘했다'는 얘기를 편지로, 전화로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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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7년 결혼 생활은 69년 6월 10일 끝났다.
'사랑에 파탄이 가서가 아니라 지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 는
최씨의 말이 화제가 됐다. </PRE><PRE>
최씨는 영화제작으로 약 3000만원을 빚을 지고, 부도를 냈다.
김지미는 이후 76년부터 82년까지, 7살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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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나훈아(63)씨 한테도 돈이 많이 들었나.</PRE>
<PRE>"그렇지 않았다."</PRE>
<PRE>―나훈아씨와는 어떻게 만났나.</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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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노래를 잘해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번 해줬다.
형제지간처럼 지내다 군대 다녀오고 일이 없어 더 친해졌다. </PRE><PRE>
오빠가 내 자금으로 신탄진에서 운영하는 공장에 자주 내려갔는데,
그 사람이 여러 번 따라왔다. 남녀관계니까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지.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 그래서 또 공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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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유명인들은 발뺌 잘하지 않나.</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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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거짓말 안 하려고 한다. 뭔 사고가 난 게 사실인데
그걸 어떻게 아니라고 하나. 내가 이러니, 내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안다. 더는 뭣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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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나훈아씨가 세간의 흉한 소문을 불식시키려 기자 회견을 열고는
지퍼를 내리며 '바지를 내려 5분간 보여주겠다' 하며 흥분하는 걸 보니,
그 양반 성격도 매우 격하더라. 두 사람이 살면서도 굉장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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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격해질 일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 자기 얘길 하지 왜 남의 얘길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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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91년 결혼한 이종구(78) 박사랑은 좀 오래 사시지.</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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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누라가 필요하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박사가 어머니 치료해준 의사다. </PRE><PRE>
어머니가 의사 사위 얻으면 천년만년 사실 줄 알았는지,
둘이 합치라고 그렇게 그렇게 몸살을 내시더라.
외국 생활 많이 한 한국 남자는 한국식도, 미국식도 아니어서 맞추며 살기 어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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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한테 사업자금도, 돈도 정말 많이 쏟아 부었다.
간통죄로 구속되며 험한 꼴도 당했다. 남자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가.
"그런 생각은 안 들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나보다 잘난 게 없었으니까.
나는 과감하고, 대담하고, 용기 있고, 옳다 믿으면 양보를 절대 안 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PRE><PRE>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