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는 나의 인생 대학이다.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로 삶의 굴곡을 만날 때 마다 챙겨듣는 여성시대의 사연들은 내게 위로였고 삶의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그중 여성시대 연중행사인 신춘편지 쇼는 내가 좋아하는 코너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글제를 접하면서도 ‘그들만의 잔치’인 것처럼 생각이 들었기에 수상작만 챙겨 듣곤 했었다.
그러다가 오늘 평소처럼 라디오에 귀기울이며 사연을 듣다가 ‘나의 엄마로서의 삶을 2022년 올해 글제인 두 번째 인생에 풀어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엄마로서 열심히 살아오면서 위로받고 인정받지 못한 미련이, 응어리가 아직도 남아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3년전 30년 6개월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열심히 살아온 내게 수고했다는 인정과 격려가 필요해 마음 한켠이 바람든 것처럼 허전해서 마음둘 곳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넘치는 축하를 받았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었다.
그러던 중 여성시대 전화사서함을 통해 내 스스로에게 편지를 남겼고, 그 녹음이 선정되어 전국에 방송이 되며 MC 두분의 격려와 댓글로 남겨주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넘치는 격려를 받고 나서야 그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랬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 아직도 내게 울컥하게 만드는 엄마로서의 그 시간들에 대해 내가 담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나의 엄마로서의 첫 번째 인생은 축구선수 엄마이다.
나의 아들 둘은 2002년 월드컵 키즈 축구선수였다.
큰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해 프로 2년 차에 잦은 부상과 뜻하지 않은 일로 15년의 축구 인생을 마감했고, 작은아들은 비슷한 이유로 18년의 축구 인생을 마감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과 눈물과 환희와 좌절과.... 그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남은 건 큰아들 5번, 작은 아들 4번의 발목과 무릎관절 수술로 더 이상 축구도 할 수 없는 신체뿐이다.
그래도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난 대한민국 상위 10%내에 드는 행복한 엄마였다.
축구를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고 프로팀에 입단하는 순간까지 하나의 고개를 넘을 때마다 무수히 많은 학부모들이 고민하고 좌절할 때 비교적 원활하게 그 고개를 넘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미래를 두고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고, 그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아직도 축구선수로서 살고 있지 않을까 후회가 남기도 하지만, 과거가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삶의 불변의 진리를 마주하게 되면 나의 두 아들에게도 그 시간들을 지나왔기에 지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운동종목이 그러하듯이 축구 시합은 주말리그를 비롯하여 대통령배, 춘계, 추계, 협회장배 등등의 명목으로 연간 많은 대회를 치룬다. 각각의 대회에서의 수상경력과 경기력에서 발휘하는 선수의 자질이 쌓여 상급학교 진학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평소에도 끊임없이 운동하며, 대회가 없는 겨울에는 혹독한 동계훈련으로 일년을 준비한다.
두 아들이 운동하는 내내 모든 과정을 두 아들 뒤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며, 운동선수 뒤에는 뒷바라지하는 부모와 가족이 있고, 운동선수로의 성공조건에 필요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운동선수 엄마로서 자식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격려함은 물론, 더 나아가 단체운동을 하기에 해야만 했고 시절이 그랬었기에 해야만 했던 지도자들이나 학부모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 힘들고 몸 힘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고비를 거쳐 이루어낸 값진 몇 번의 하늘이 낸다는 우승, 대회 MVP로 선정되었던 기쁨, 승패를 가르는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서 골을 성공시키고 달려와 품에 안기던 아들을 얼싸안고 누렸던 환희, 팬들이 함성과 함께 연호하던 아들의 이름, 팀을 홍보하는 플랜카드로 길거리에 걸려있던 아들의 얼굴.... 그 많은 순간들은 운동선수 엄마이었기에 누릴수 있었던 삶의 행복이었다.
모든 운동선수가 그러하듯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국가대표가 목표였지만, 늘 코 앞에 와있는 듯 여겨지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시간이 지나며 마음도 조금씩 포기하게 되던 즈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꿈을 접었다.
특히, 큰 아들이 운동을 관두었던 순간은 나의 꿈도 사라지던 순간이었기에 15년이 넘게 직장인으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무엇보다 운동선수 엄마로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기에 오랫동안 우울했고, ’세상에는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의 인생관까지 바뀌었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한동안 했었다.
나의 엄마로서의 두 번째 인생은 불법범죄자 두 아들을 둔 엄마이다.
운동만 하던 아무것도 할줄 모르던 아들이 자신의 제2의 인생으로 선택한 직업은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으로 아직 직업으로 인정되지 않는 타투이스트이다.
대학에 다니면서 조금씩 몸에 타투를 하던 큰 아들이 사회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타투를 직업으로 배워보고 싶다고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부모로서 사회적인 위치도 있었고, 늘 사회규범에 맞추어 살려고 모범을 보여왔던 터라 많은 고민이 있었다. 많은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이 타투를 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타투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어가는 과도기라는 생각이 들어 타투의 미래를 보고 기술직으로서의 타투를 배워두면 경제활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갈수 있을꺼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무엇보다 성인으로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로서의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타투를 시작하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시작하였고, 아들은 스승을 정하고 타투를 배우는 문하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아들의 몸에도 타투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아들의 몸에 그려지는 타투가 흉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을 홍보하는 멋진 상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매일 아침 삼배 기도를 올리는 기도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들은 적성을 잘 찾은 듯 잘 배워나갔고 이제 직업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고 여겨졌을 때까지 일년정도 나의 삼배 기도도 이어졌었다.
이 땅의 모든 부모들 대부분이 온갖 정성으로 귀하게 자식을 키우듯이 나 또한 넘치는 사랑과 정성으로 아들을 키웠다고 자신한다.
내게 이렇게 귀한 아들이 볼일이 있어 나의 직장으로 찾아왔던 그 어느 여름날을 지금도 아프게 기억한다. 반팔 반바지 차림의 아들의 드러내놓은 팔다리로 선명한 타투들... 아직도 사회적인 선입견을 벗어던지지 못한 나는 누구를 만날까봐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빨리 아들을 보내려는 나를 발견하고 아들을 보낸 뒤에 화장실로 뛰어가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들은 타투를 시작하고 본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타투의 여러 장르 중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에 본인의 색채를 접목해 본인만이 할 수 있는 타투를 8년째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샵을 운영하며 불법적인 일이라 타투를 받고 나서 신고를 하겠다고 협박해서 돈을 뜯긴 적도 있었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서까지 다녀온 적도 있었고, 파출소에서 순찰 나올까봐 많은 시간 마음 불편한 채로 일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국회의원도 하는 눈썹 문신이나 귀걸이 같은 피어싱도 포괄적인 의미에서 보면 불법인 웃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타투 합법화 법안은 몇 년째 국회에 계류되어 있고, 이 땅의 타투이스트들은 지금도 마음 졸이고 일하는 상황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렇게 아들은 타투이스트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자기 발전을 위하여 태국, 영국, 대만, 독일 등 해외에서 유치하는 여러 타투 컨벤션에 끊임없이 참가하여 수상을 받는 등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갔고, 이러한 이력과 동양미가 가미된 독특한 타투로 미국 유명 타투샵으로 지난 여름 진출하였다.
지금 아들은 누구보다 행복하다. 아티스트로서 인정을 받고, 아들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고, 미국이라는 넓은 나라에서 먼길 마다않고 아들의 타투를 받기위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로서의 첫 번째 인생 축구선수 엄마는 때로는 끌어주고 때로는 밀어주고 내내 함께 발맞춰가며 인생이었다면, 두 번째 타투이스트 엄마로서의 인생은 뒤에서 지켜봐주며 따라가는 인생이 아닐까 싶다.
성인이 된 아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지켜봐주고 응원해주고 도움을 청해올 때마다 함께 고민해주며 지금까지 왔고, 이제 동생도 형이 간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타투에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합법화 되고 불법적인 일과 관련된 타투의 이미지가 바뀌어 우리나라에서도 아들이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