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중국줓추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551년에 산동성 곡부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749년에 돌아가셨다.
공자는 사상가 교육자로 만세사표로 추앙받아오는데 나중에 대성지성왕으로 추봉되었다
기원전 689년 앗시리아의 센나케리브는 다시 바빌론을 포위 공격해 9개월 만에 재탈환하고 이때부터는 바빌론에 대한 유화책을 버리고 파괴와 약탈을 명령하였다.
신전과 마르둑 신상은 파괴되었고 버려졌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 인에게는 엄청난 종교적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결국 센나케리브는 암살당하고 만다.
기원전 629
진(晉)나라가 새롭게 5군(軍)을 양성.
기원전 569
융적(戎狄)이 진에 귀부(歸附)할 것을 청함. 진도공은 수락하지 않으려다가 위강의 충간을 받아들여 허락했음. 위강은 융적과 화친할 경우의 5가지 이익을 역설.
기원전 449
월왕 불수(不壽) 피살됨. 주구(朱句)가 즉위.
기원전 389
진(秦)나라가 위(魏)의 음진(陰晉) 땅을 공격. 제(齊)나라의 전화가 위무후와 탁택(濁澤)에서 만나 제후 지위를 구함. 위무후는 주 천자에게 전화의 제후 지위를 요청해볼 것을 약속.
기원전 329
진나라가 위의 하동(河東)에 소속된 분양(汾陽)·피씨(皮氏)·초(焦) 등지를 점령함. 위가 초의 형산(陘山)을 점령함.
기원전 269
진이 장수 호양(胡陽) 을 파견해 한의 상당(上黨)을 지나 알여(閼與)를 공격. 한이 조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자 조나라는 장군 조사(趙奢)를 파견, 조사는 치밀한 군사 작전으로 진나라 군사를 대패시킴. 조나라는 그 공로로 조사를 마복군(馬服君)에 봉하고 최고 직위를 내림.
기원전 209년, 진시황이 죽자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는데 시초는 진승·오광의 난이다.
지금의 안휘성 숙주에 있는 대택향(大澤鄕)에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의 둔장(屯長) 진승이 농민 출신 수졸 수백 명을 모아놓고 진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고구려 건국에 관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역림’(‘초씨역림(焦氏易林)’의 약자, 전한(前漢)시대에 씌어진 역술서)에 있다. “사슴을 쫓다 얻지는 못했지만(逐鹿不得), 바닷가로 가서(去之海隅), 바람을 맞으며 술을 뿌리면서(臨風洒酒), 스스로 부여왕이 되다(自王扶餘)”라는 대목이다. 진(秦)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秦失其鹿)은 진시황이 죽고 나서다. 따라서 추모(鄒牟·고구려 시조 주몽)가 부여왕이 된 것은 진시황 재위 37년인 기원전 210년 신묘년 이후 임진년이다.
bc149년 고조선식 동검이 나온다
기원전 89년, 한과 흉노의 전쟁의 끝을 선포하는 "윤대의 조"가 발표되었다.
한나라로서는 대흉노 전쟁을 통해 흉노를 완전히 복속시키겠다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흉노의 위협을 일시적으로나마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하서회랑이 한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며 흔히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육상 교통로가 안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흉노로서는 오르도스라는 매력적인 근거지와 실크로드라는 교역로에 대한 장악력, 한의 물자 지원 등을 상실했다. 이로 인한 불안 속에서 흉노의 1차 분열이 싹튼다.
로마는 포에니전투이후 번성하지만 동맹시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켜 내란의 원인이 되었죠.
그러가 로마인들은 이것의 원인을 재빨리 인식하고 로마시민권을 모든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바로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성립이 이루어진다.
기원전 89년의 로마연합은 새로운 로마제국으로 거듭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