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서울에 처음으로 교당을 세우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읍 내장사에서 나와 김제와 전주를 경유하여 이리역에서 열차로
원기9년 2월25일(음력)에 상경했다.
창덕궁 인근 계동 성성원의 집에서 2~3일을 머물며
경복궁 인근 당주동에 집을 1개월을 약정하고 빌렸다.
소태산대종사는 이 집을 '경성임시출장소'로 정하고 머물던 3월(음력) 어느 날,
가회동에 살고 있던 31세의 이동진화가 박사시화의 안내로 찾아와 귀의했다.
소태산대종사가 경성에서 1개월을 머물다 전라도로 내려오자
이동진화는 전라도로 찾아와
원기9년 5월초(음력)부터 만덕산 만덕암에서 제자들과 선회(禪會)에 참여하고
1개월여 만에 경성 집으로 돌아갔다.
이동진화의 부군 이규용은 부인이 어느 날 갑자기
전라도에 생불님(소태산대종사)을 찾아 떠나 1개월여 만에 경성 집으로 돌아오자,
조용히 수양할 곳을 마련하여 주면 멀리 떠나지 않고 수양할 수 있고 생활에도 잘 적응하며
평소 위장병과 두통 등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동대문 밖인 창신동 605번지 목조 초가 5칸 1동과 4칸 1동을 수양처로 마련하여 주었다.
이동진화는 가회동에서 창신동 골짜기 초가집으로 옮겨
침모(針母) 김삼매화와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을 데리고 세 사람이 살게 되었다.
원기11년 여름까지 경성회원 10여 명은 소태산대종사가 상경하면
이동진화의 수양처와 계동 이공주의 집에서 법문을 받들고 몇몇은 익산총부 동·하선에 참석했다.
경성과 익산총부와는 거리가 멀고 소태산대종사를 자주 모실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까지 때에 따라 모이던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년 7월(음)에 경성회원 10여명이 모여서
"우리가 천행으로 대성 종사주를 만나서 도덕의 공부를 할 마음은 있으나
공부를 하자면 가르칠 선생을 모셔 와야 하고,
모시자면 선생 계실 집이 있어야 하고,
집이 있으면 지킬 사람과 유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니
우리 10여 인이 합력하여 경성에도 지부를 설립하고 목적하는 공부를 하여 보자"고
경성출장소 설치를 발기했다.
출장소 설치에 대하여 의논하며 이동진화가
자신이 수양처로 사용하고 있는 시가 1,000여 원 가는 창신동 집을 희사했다.
그리하여 이동진화, 이공주, 민자연화, 이성각, 박공명선, 성성원, 이정원, 심오운, 김낙원, 이철옥
등이 합력하여 유지비를 담당하기로 하고,
이동진화의 침모인 김삼매화는 출장소를 직접 관리하고 식당을 담당하기로 했다.
장소와 유지 계획이 대강 완성되자 경성회원들은 익산총부로 정식교무 파견을 요청했다.
소태산대종사는 20세의 청년 송도성을 경성출장소 초대교무로 파견했다.
경성은 영광(영산)지부, 익산총부에 이어 세 번째로 교화 장소를 마련하고
교무가 파견되어 교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영광, 익산과는 다른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영광은 지부라고는 하나 익산에 본관이 생기면서
영광에 있던 본관이 익산으로 옮겨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경성출장소는 새 회상 지방교화지로서 첫 번째 출장소라는 점과
한 나라의 수도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송도성이 교무로 부임해오자
이동진화는 가회동 자신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면서 창신동을 내왕하며 공부했다.
송도성이 부임하자 경성회원들은 환영하며 부임기념으로 송도성과 함께
이공주, 박창기, 이동진화, 김삼매화 그리고 경성부기학원에서 강습중인 조갑종이
기념촬영을 하는 등 환영했다.
경성출장소는 창신동 회관에서 회원 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예회를 보는데 지장이 있어
낙산 넘어 돈암리 앵두나무골에 새 회관 기지를 매입하고,
원기18년 초부터 회관 신축을 준비하여
5월에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완공하고 11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돈암리 회관은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신식 12칸 목조 기와집으로
법당에 300여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또 기존 별채 건물을 합하여 총 20여 칸이 넘었다.
사진; 창신동 돈암리에 새 회관을 완공하고 낙성기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