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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기행(安東紀行)
1.각자 다른 여행스타일
우리가족은 여행스타일이 반반이다.
아내와 은채는 고급호텔이나 콘도, 수려한 풍광, 럭셔리한 쇼핑을 선호하고,
나와 진헌이는 역사기행이나 기차여행, 풍물기행을 좋아한다.
지난 토요일 아내는 ‘기환이 할아버지 사망’이라는 한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기환이는 아내가 돌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다.
이웃 간의 정도 있고, 아이를 맡긴 고용주와 사업자 관계라 어떻게든 문상을 다녀와야만 할 상황이었다.
기환이네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교통이 편리해진 지금도 고속도로로 3시간, 왕복 6시간이 넘는 거리다.
아내는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진즉부터 평택 평화센터 총회참석 때문에 토요일 여행과 모든 일정을 사양한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는 인천 부평 이모 댁에 가서 프로농구 경기를 보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사정은 복잡했지만 아내는 실질적으로 카리스마 있는 우리집안의 가장(家長)이다.
우리는 아내의 결정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총회참석, 농구경기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일요일이 겹쳤지만 우리는 이왕 안동까지 가는 것 1박 2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2.안동, 멀고도 지루한 거리감
몇 년 사이 안동으로 두 번 여행을 하였다.
한 번은 2007년 도희 결혼식 때였고, 다른 한 번은 답사여행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까마득한 느낌은 여전하다.
38번 국도를 따라 제천까지 달린 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안동까지 갔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쯤.
기환이 엄마는 부리나케 달려온 우리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였다.
간단히 문상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여행길에 나섰다.
안동은 양반문화의 본산처럼 알려졌다.
조선후기 당쟁에서 밀려 중앙무대로 진출하지 못한 양반가문들은 가문의 전통과 학문, 재산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끈끈한 학맥을 형성하고 서원과 사우를 건설하여 가문과 학통을 계승하려 하였으며, 장자상속을 통하여 재산을 지켰고, 문집을 간행하고 곳곳에 누정을 지어 사교의 장으로 삼았다.
끈은 떨어졌으면서도 양반이라는 사회적 특권을 지켜내기 위해 공들였던 이 같은 노력은 학문과 문화의 보수성을 강화시켰다.
오늘날 수많은 유교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양반문화의 본류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도 문화적 보수성과 문화유산의 보존에서 기인한다.
안동민속박물관을 가는 길에 임청각과 조탑동 7층 모전탑을 먼저 답사했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수 백 년 종택이며 저명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과 그의 아들들의 옛집이다.
석주 이상룡 집안은 경주 이씨 이회영 집안과 더불어 누대에 걸쳐 쌓아온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아낌없이 민족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가문이다.
만주 무장투쟁의 뿌리는 석주께서 교장으로 있었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과, 고성이씨 집안의 전재산이 들어간 조선인 자립정착촌 출신들이 주도하였다.
임청각에 들어서자 행랑채 벽면에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죽어간 이상룡과 부인, 아들과 손자의 사진과 계보가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위기 속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댓가는 가난과 불행한 죽음, 가문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핍박도 가문의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근대교육의 기회를 상실한 후손들은 스러져가는 저택을 수리하고 보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한 때는 정부에 기부채납까지 요구했었고, 이에 대오각성한 종중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정은 처연하지만 경상도 양반문화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민족을 위해서도 임청각과 고성 이씨 집안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며 자긍이다.
이런 거대한 자긍심의 결정체를 앞에 두고도 아내와 은채, 진헌이는 장난만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모처럼 가족여행에 해가 될까봐 꾹꾹 눌러 참았다.
3.안동민속박물관에서 가훈(家訓)을 얻다
임청각에서 안동댐 물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안동댐 물박물관을 지나 안동민속박물관이 있다.
마침 1, 2월은 학생들을 위해 안동시내 문화시설의 입장료를 면제하고 있어 기쁨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임청각에서의 답사태도를 문제 삼았던 터라 은채와 진헌이는 한층 진중한 자세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서 안동시문화유산해설사 선생님께 안내를 부탁했다.
해설사 선생님은 마침 한가했던지 기꺼이 안내를 해주었다.
해설을 곁들여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진 민속박물관 답사는 무려 1시간 40분이나 소요되었지만 해설사 선생님으 친철하고 해박한 안내 속에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민속박물관 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으신 노학자 한 분이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아마 그 분은 매일 민속박물관 귀퉁이에서 박물관을 찾는 내방객들에게 글씨도 써주고 덕담도 건네며 안동의 문화를 전해주는 분 같았다.
어르신은 은채와 진헌이에게 본관과 가문의 시조(始祖)를 물었다.
순간 아이들은 당황하였다.
아빠가 역사선생이라고 해도 집안의 내력에 귀를 기울여 본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얼른 내가 끼어들어 본관과 시조, 파조를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김녕 김씨의 시조가 고려 때의 중신 김시흥이고, 가문의 유명한 인물로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였던 삼중신(三重臣)의 한 사람 백촌 김문기를 꼽았다.
그러면서 진헌이의 얼굴에 ‘학자’의 기상이 서려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학자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집안의 역사와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의미를 경이롭게 받아들였다.
어르신은 김문기의 어록 가운데 ‘自勝自强’이라는 글귀를 통해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만이 진정 강해질 수 있다’는 덕담을 건넨 뒤 족자에 써주셨다.
이 같은 행위가 장삿속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족과 은채, 진헌이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귀한 체험이었다.
아이들은 어르신에게 받은 글귀를 족자에 담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박물관을 나왔다.
예기치 않았던 낮선 장소에서의 큰 깨달음이라, ‘아침에 도(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던 공자의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아내는 안동시내의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으로 이동하며 ‘自勝自强’이라는 글귀를 되뇌었다.
마땅한 좌우명이 없는 상황에서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 무엇이 있었던 가 보다.
몇 번 곰곰이 생각하더니 우리 집 가훈을 이것으로 바꾸자는 제안까지 내놨다.
아내의 제안은 이견 없이 채택되었다.
‘자승자강’
‘자신을 이기는 사람만이 진정 강한 사람이다’, 참 좋다.
4.술바라기
책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술이다.
술을 자주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문화가 흠뻑 담긴 좋은 술을 음미하는 것은 매우 즐긴다.
청년시절에는 양지바른 제법 널찍한 거실에 책을 그득 쌓아놓고, 한쪽 벽에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술을 비치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이 꿈이었다.
안동은 ‘안동소주’의 본고장이다.
보리로 빗은 누룩에 고두밥을 섞어 만든 술을 소주통에 넣어 한 방울 두 방울씩 정제하여야 얻을 수 있다는 안동소주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나는 안동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기필코 안동소주 원액을 맛보리라 다짐했다.
안동에서 정통으로 인정받는 안동소주는 ‘황병례 할머니 표’ 뿐이라고 하였다.
민속박물관 앞 가게에 ‘안동소주 판매’라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황병례 할머니 표’ 안동소주를 찾았다.
할머니 표 소주는 공장에서 제조한 것 보다 두 배쯤 비쌌다.
40도짜리 작은 호리병 하나에 2만 5천원, 조금 큰 것은 4만원, 5만원씩 하였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고 마음이 무척 당겼지만 얇아진 호주머니가 신경 쓰였다.
결국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빈손으로 나와 버렸다.
전통문화 콘텐츠박물관은 민속박물관 직원들도 추천하였고, 안동지역의 전통문화를 놀이로 콘텐츠화한 박물관이어서 아이들도 좋아했다.
우리는 놀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3D영화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통문화 콘텐츠박물관은 ‘평택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도 새로운 울림을 주었다.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어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수 없다고 투덜대는 우리고장 사람들이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5.원조 안동찜닭을 맛보다
콘텐츠박물관에서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짜리 형제를 만났다.
우리가 안동찜닭을 먹고 싶다고 말했더니 구시장 골목에서 중앙닭집, 유진찜닭, 현대찜닭’이 가장 유명하다고 추천하였다.
중앙닭집은 맵고, 현대찜닭은 적당하고, 유진찜닭은 약간 싱겁다며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박물관에 차를 남겨두고 시장골목까지 10여 분 남짓 걸어갔다.
구시장은 도심 서쪽 끝자락에 있었다.
북적대는 찜닭골목에서도 유난히 현대찜닭집 앞에는 길게 줄이 서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kbs 1박 2일 프로그램에 방송된 집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텔레비전의 유명세에 경도되어 줄 끄트머리에 섰다.
하지만 찜닭이라는 것이 팥죽처럼 후루룩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었다.
허기가 밀려오는 뱃속도 기다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들어간 중앙찜닭의 음식맛은 상상 이상으로 푸짐하고 맛있었다.
특히 닭을 좋아하는 진헌이는 엄지손가락을 쭉 내밀며 정신없이 먹어댔다.
처음에는 너무 많다고 느꼈던 찜닭 한 접시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 푸짐하게 먹고도 가격은 2만 5천원, 참으로 착한 가격이다.
6.편한 잠자리는 여행의 3대 조건
여행의 3대 조건은 좋은 볼거리, 넉넉한 먹거리, 그리고 쾌적하고 편안한 잠자리다.
눈을 호강시키고, 혀를 호강시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잠자리다.
우리는 시청 주위에 온천찜질방이 있다기에 처음에는 그곳으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찜질방은 숙면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선택 앞에 망설여졌다.
고민하는 아내에게 근처에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팔레스 모텔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모텔은 편하기는 한 데 불결한 느낌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기가 께름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할 수 없이 주변의 콘도나 휴양림을 알아보다가 도산서원 근처의 국학진흥원에서 콘도를 운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얼른 전화를 걸었다.
국학진흥원은 마침 비수기인데다 선생이라는 내 신분이 적용되어 40% 할인가격에 숙박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국학진흥원은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20분쯤 거리에 있었다.
건물은 연수원, 유학박물관, 수장고, 콘도로 구성되었는데, 최근에 건축하였는지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침대 없는 온돌방을 59,000원에 얻었다.
실내도, 침구도 깨끗하고 따뜻하였다.
다음 날 아침,
컵라면과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5분 거리에 있는 경북산림박물관을 답사했다.
1,2월 안동지역의 문화, 예술 시설에는 입장료가 없었지만 산림박물관만큼은 입장료를 받았다.
박물관 내부는 산림과 자연환경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꾸며져 있어 아이들의 환경교육에 좋은 장소였다.
오전이기 때문인지 답사객도 거의 없어 구애됨이 없이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7.도산서원의 매화는 아직 봉우리를 틔우지 않고
도산서원은 경상도 유교문화의 중심이다.
이곳에서 발원한 퇴계의 사상은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을 통하여 경상도 남인들의 사상으로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서원 입구는 조선 유학의 최고의 전당답게 제법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안동댐 호반을 배경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진입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서 좋았다.
흡사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 같아 보이는 안동호 상류는 날씨가 제법 풀렸는데도 지난겨울 의 얼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꺼운 얼음 밑으로는 우렁차게 강물이 흐르고, 동네사람인 듯한 사람들이 바위를 들춰가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아내는 도산서원에 이르자 1,000짜리 돈을 꺼내들었다.
1,000원짜리에 그려진 퇴계와 도산서원은 아이들에게 좋은 답사안내서 구실을 하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건물을 하나하나를 익혀가는 아이들에게 아내는 안내판의 영어를 빨리외우는 시합을 제안하였다.
덕분에 아이들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서원의 역사를 금세 알아버렸다.
퇴계가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로 낙향했을 때 도산서원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학문을 좋아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내려던 노학자는 토계가 흐르는 강변에 작은 서당을 짓고 마당에는 매화 한 두 그루를 가꾸었을 뿐이었다.
퇴계는 흰 눈이 흩뿌리는 이른 봄 화사하면서도 정갈한 매화의 향기에 흠뻑 취해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도산서당 앞마당의 매화는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산서원 마당의 버드나무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옷깃을 여며가며 기웃거려야 하였다.
가족들과 답사를 하다보면 참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도산서당에서 펼쳤던 퇴계의 치열했던 학문연구와 교육도 자칫하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훈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서원을 돌아보며 되도록 퇴계의 학문연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나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서원 경내를 벗어날 때 은채에게 오해하지 말라며 한 가지 일화를 말해주었다.
학문에 욕심이 많았던 퇴계가 졸음에 지쳐 눕지 않으려고 일부러 방을 작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시력을 아끼려 한쪽 눈을 가리고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었지만 훌륭한 학자, 훌륭한 사람으로 후세에 남으려면 이와 같은 인내와 단련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맞춤한 스토리라 버리기 아까웠다.
8.인정을 느껴야 여행이다
나오는 길에 진헌이와 둘이서 도산서원 앞 섶다리로 내려갔다.
아내와 은채는 몸이 안 좋다며 내려오기를 거부하였다.
다리는 말이 섶다리지 아래에는 노깡을 묻어 물골을 터주고 위에는 콘크리트로 마감을 한 현대식 다리였다.
차가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강물은 맑고 눈부셨다.
수 백 년 닳고 달았을 조약돌은 동글동글했고,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도산서원은 한층 고즈넉하였다.
진헌이와 다리 위에서 뛰어놀다가 얼음 위로 올라가보기로 하였다.
얼음은 나와 진헌이가 올라가서 굴렀는데도 끄떡없을 만큼 두꺼웠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했다.
강물에 떠다니는 얼음 위에서 놀다가 흔히 당하는 사고.... 풍덩
물에 빠진 운동화를 탈탈 털며 주차장으로 올라갔더니 아내의 입이 삐쭉 나와 있다.
은채는 덩달아 배가 고프다며 난리다.
경상북도 관광지도를 펼쳤더니 봉화 인근에 숯불돼지고기타운이 눈에 띈다.
가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점심식사장소를 그곳으로 정했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 도립공원을 끼고 봉화까지 가는 길은 경상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다.
산은 높고 계곡은 수려한데 아이들은 고개를 처박고 게임을 하거나 책만 들여다본다.
보다 못해서 여행을 왔으면 산천의 수려함을 보며 마음도 씻고 문화재를 보며 생각 좀 키우라고 나무랐다.
아이들은 나의 꾸지람에 억지로 창밖을 내다보고는 ‘와~ 좋네’라고 한마디 하더니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현동 쪽으로 달리다가 봉성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가는 길 곳곳에는 구제역 소독을 하느라 바리케이트를 쳐 놓았다.
봉성 숯불구이타운은 타운이라기보다는 작은 마을에 시골 돼지고기 집 몇이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아내와 아이들 입에서는 실망의 탄식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집이 잘하는 집인지 몰라 마을 유일의 약방에 들어가 소화제를 사며 추천을 의뢰했더니 ‘오시소’라는 허름한 식당을 가리킨다.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타운 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식당 내부는 안방과 마루에 식탁 서너 개를 늘어놓은 지극히 시골스런 분위기였다.
우리가족은 손님도 없는 거실로 들어가서 고기 3인분을 시켰다.
식당 안에 앉아 있던 70대 초반쯤 되는 할머니께서 주문을 받아 부엌에 전해주었다.
음식이 나올 동안 나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 종업원인줄 알았던 할머니는 식당이웃집에서 마실을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식당할머니와의 친밀한 관계,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 이야기, 인심이 변해가는 마을이야기를 늘어 한참동안 놓으셨다.
잠시 후 주인할머니가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와 된장찌개를 들고 들어왔다.
할머니가 들어오자 이웃집 할머니는 봉화로 목욕하러 나갔고, 우리는 주인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성숯불구이는 봉화에서 기르는 흑돼지를 솔잎을 얹어 구워서 할머니가 담그는 장과 김치를 곁들어 먹으면서 유명세를 탔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먹는 것으로 장난치지 않으려고 돈도 벌지 못했다고 푸념을 하였다.
처음에는 동네사람들이 드나들 던 것을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면서 맛있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식당들이 늘어났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몇 번 출연하였던 유명인이었다.
지난 11월에도 SBS에 소개되어 방송을 탓노라고 자랑하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할머니는 작별인사를 올리는 은채와 진헌이에게 새뱃돈이라며 2천 원씩을 건넸다.
더욱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은 일어설 때쯤 김치가 참 맛있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는 얼른 김장독을 열어서 김장김치를 다섯 포기나 담아주신 것이다.
넘치는 인심에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길 건너 슈퍼에서 김을 한 톳 사서 식당 한쪽에 놓고 온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
9.우리나라 최고의 탄산온천 능암
넘치는 인심에 경도되어 평택으로 돌아오는 길이 한결 흥겨웠다.
봉화를 지나 영주를 거치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과 산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사과까지 한 상자 샀다.
중앙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아내와 아이들은 골아 떨어졌다.
충북 제천에서 38번 국도로 갈아탄 뒤 40분쯤 달렸더니 충북 음성의 ‘능암온천’이다.
능암온천은 우리나라 최고의 탄산온천이다.
오래 전에 일화에서 만든 ‘천연사이다’라는 음료도 충주인근의 탄산수에 설탕을 가미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능암온천을 택한 것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은채 때문이다.
은채가 아토피로 고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모로서 힘을 다해 치료하지 않았던 미안함도 곁들여졌다.
일요일이어서인지 온천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온천 내부에는 온천수를 뜨겁게 데운 온탕과 천연 탄산수에 몸을 담그는 냉탕이 있었다.
나와 진헌이는 온탕에 몸을 덥힌 뒤 냉탕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냉탕에서 5분쯤 몸을 담갔는데도 하나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20분쯤 탕 안에 앉아 있자 온 몸에 붉은 홍조가 돌았다.
안내문에는 그것이 좋은 징조라고 쓰여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자 이틀 동안 쌓였던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진 느낌이었다.
은채도 그동안 괴롭혔던 손가락과 팔뚝의 아토피가 한결 좋아졌다며 기뻐했다.
여행의 마무리는 안성 중앙대 부근의 장수촌에서 닭백숙으로 하였다.
충주에서 시작하여 장호원을 거쳐 안성과 평택까지 올라오면서 널리 알려진 장수촌 닭백숙은 육질도 부드럽고 무엇보다 넉넉한 누룽지죽이 있어 좋았다.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고 집에 돌아오니 밤 9시가 넘었다.
진헌이는 처음으로 이번 여행이 즐거웠다고 평가하였다.
아내와 은채도 그리고 나도 오랜만에 진한 행복감을 느꼈다. (2011.2.23)
첫댓글 저도 같이 자동차에 타고 있는 느낌으로 읽었네요.
생생한 묘사, 심리표현,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보여요.
선생님이 간 온천은 사람들이 많아서 저는 그 아래 한가한 24시 온천탕으로 가
늘 독탕을 하고 온답니다. ㅎㅎ
그 다음 주에 저희 가족도 24시 온천탕에 가서 독창의 맛을 느꼈답니다. 늘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