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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삼겹고기, 삼겹보기>의 줄거리:
대한민국 백성들에게 가장 친근한 고기 삼겹살! 다 아시는대로 살과 비계가 삼중으로 겹쳐있는 갈비에 붙은살입니다. 이처럼 눈으로 본다는 것도 삼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류의 보기가 겹쳐져서 비로소 본다는 하나의 행위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삼겹보기에 인생의 행 불행이 온전히 좌우 됩니다. 나 자신의 삼겹보기를 잘 살펴보고 바로 이것에서부터 인생의 열쇠를 찾아야합니다.
삼겹고기, 삼겹보기
(막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삼겹고기, 삼겹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삼겹 고기는 삼겹살이지요,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즐기고 자주 찾는 고기가 삼겹살 아닙니까?
그리고 삼겹 보기, 눈으로 본다는 말의 삼겹 보기.
어떤 것을 삼겹살이라고 합니까?
삼겹살은 돼지의 갈비에 붙어 있는 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시면 알겠지만 비계와 살이 삼겹으로 이루어져 붙어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늘 이렇게 보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돼지고기 잘라서 단면을 보면 삼겹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본다는 행위를 잘라서 단면으로 보면 삼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본다고 하는 것이 삼중으로 이루어져서 겹쳐있음으로써 온전히 본다는 행위가 완성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비계와 살로 세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삼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본다는 행위의 삼겹을 구분해서 말하자면, 그냥 보기, 통해서 보기, 들여다보기가 있습니다.
그냥 보기, 통해서 보기, 들여다보기가 합쳐져서 세 겹을 이루어서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본다’라고 하는 행동이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보통 때 삼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모른 채로 보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삼겹의 본다는 것에서 우리의 삶의 행복과 불행이 다 결정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심코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행복함과 우리의 불행함, 우리의 기쁨과 슬픔이 무의식중에 보고 있는 동안에 결정이 돼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그 삼겹 보기를 다 파헤쳐서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분별해내서 행복과 불행의 삶을 결정짓자는 겁니다.
내가 취직했기 때문에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돈을 벌었기 때문에 행복하고, 돈을 못 벌었기 때문에 불행하다,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보고 있는데, 이 보는 것이 삼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겹의 봄을 어떻게 분석해서 고쳐나가느냐에 따라서 행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지, 지금의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보면서 불행해지고 보면서 기뻐하지만 가짜로 기뻐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삼겹의 ‘봄’을 우리가 한번 살펴본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시는데 참 특이합니다.
여러 번 시각장애를 고치시지만 이렇게 고치시는 것 여기밖에 없어요.
우선 그 시각장애인의 손을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항상 마을 밖에서 일이 일어나요.
그리고 기가 막힐 노릇은 예수님께서 그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손에 침을 뱉어서 바르셨는지 아예 눈에다 대고 곧바로 침을 뱉으셨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앞이 안 보인다고 거기다 대고 침을 뱉으십니까?
자, 그런 다음에 안수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시력이 회복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물었더니, 이 사람이 ‘사람이 보입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뭔가 확실하지를 않아요.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닙니다’, 나무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이게 첫 번째 보기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번에는 ‘주목하여 본다, 주의 집중하여 본다’ 이게 두 번째 보기입니다.
그러고 나서 온전하게 되어서 ‘밝히 본다’ 이게 세 번째 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봤습니다, 사람을 봐도 나무 같은 게 걸어 다니는 것으로 보는 그런 봄이 있고, 두 번째 주목하여 보는 게 있고, 세 번째 밝히 본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런데 이 단어들을 헬라어 성전 원본을 보면 어떻게 돼 있느냐?
‘본다’라는 말을 ‘호라오, 블레포’ 이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를 보듯이 ‘본다’라고 할 때 ‘호라오’ ‘블레포’ 두 단어를 같이 씁니다.
‘내가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블레포’를 씁니다.
그런데 ‘블레포’라는 단어가 어떻게 변형이 되는가 하면, 주목하여 본다는 말에서는 ‘디아’라는 전치사를 붙여서 ‘디아 블레포’라고 씁니다.
‘디아’라는 말은 영어에서 through, …을 통해서, …을 통과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블레포’, 그냥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디아 블레포’, …을 통해서 봅니다.
세 번째 밝히 본다는 얘기는 ‘엔 블레포’입니다.
‘엔’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의 in입니다, 안으로 들여다봅니다.
자, 이렇게 보기가 세 겹으로 겹쳐 있어요.
처음에 블레포, 그냥 봅니다.
다음에 ‘디아 블레포’, …을 통해서 봅니다.
세 번째 ‘엔 블레포’, … 안으로 들여다봅니다.
자,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세 개의 보기가 겹쳐서야만 온전하게 본다고 하는 하나의 행위가 완성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도 지금 그렇게 보고 있어요.
‘블레포’ 그냥 보기가 있고, ‘디아 블레포’ 통해서 보기가 있고, ‘엔 블레포’ 들여다보기, 이 세 겹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도 보고 있고 살고 있는 겁니다, 보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알기 위해 예를 한 번 들어봅니다.
우선 그냥 ‘블레포’라는 것은 감각하는 겁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갑니다’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존재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다는 걸 포착하는 거예요, 감각하는 겁니다.
그 다음 ‘디아 블레포’ 무엇을 통해서 본다는 것은, 그렇게 포착한 것을 무엇인가로 통과시킨다는 거예요.
무엇인가로 통과시킨 다음에라야 ‘엔 블레포’, 맨 처음에 포착한 그것의 내용을 확실히 파악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포착합니다, 감각합니다.
그리고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파악합니다.
이게 바로 본다는 얘기에요.
자, 여러분!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이 말뜻을 명확하게 하기 전에,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 그 경이로움을 좀 여러분에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쓰여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 아시는 대로 17세기부터 계몽주의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후에 정말 많은 명석한 철학자들이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으로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것 때문에 씨름을 합니다.
인식론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됩니다.
그러다가 19세기말에 들어와서 인문학의 관심이 해석학으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말씀을 잠깐 드렸습니다만,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이 받아들여집니다.
그게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라든지 ‘상대성이론’이에요.
그런데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해서 칸트, 헤겔 등 이러한 철학과 슐라이에르막하로 시작해서 딜타이라든지 하이데커나 가다머, 이런 사람들의 해석학, 그리고 그것이 자연과학 분야의 하이젠베르크나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발전되어가는 이 모든 철학적 씨름, 이것이 이 한 마디에 다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오늘 이 본문을 알고 칸트가 이성비판을 썼다면 좀 더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헤겔이 이 본문을 충분히 잘 이해한 다음에 자기의 관념론을 발전시켰더라면 뭔가 내용이 달라지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본문이에요.
자, 그러면 우리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3겹의 보기가 도대체 구체적으로 현실 생활 속에서 어떻게 피부로 느낄 수 있게끔 이루어지고 있느냐 라는 겁니다.
자, 이런 예를 가정으로 들어봅니다.
할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영어로 된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전혀 모르시는 분인데, 이 할머니가 영어로 된 편지를 펼쳐놓고 봅니다.
이게 바로 ‘블레포’입니다.
영어를 열심히 봅니다, 영어를 잘 봅니다, 자세하게 봅니다, 꾸준하게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정열적으로 꾸준하게 보아도, 돋보기를 쓰고 보고 돋보기를 벗고 봐도 그냥 보는 것뿐이에요.
본다는 게 뭔지 느낌이 오시지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고 자연을 볼 때도 TV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보는 과정이 우선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들어와서 할머니의 영어편지를 봅니다.
이제 손자는 할머니가 보고 있는 그 단계를 넘어서,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 끄덕일까요? 통과시키고 있는 거예요.
무엇을 통과시키고 있습니까?
자기의 머리와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는 자기 속에 있는 영어를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영어에 편지에 쓰여 있는 영어를 통과시키면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게 바로 ‘디아 블레포’에요, 통과시키는 것, 그리고 나서야 ‘엔 블레포’ 들여다봅니다.
그 편지 안에 있는 내용을 밝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편지 안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본다는 게 완성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좀 각도를 달리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스쳐지나갑니다.
다 보는 거예요, 블레포 하는 겁니다, 할머니가 영어편지 보듯이.
그냥 그 존재가 감각되어 질뿐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오던 어떤 한 남자가 ‘오, 너 아무개 아니냐? 오래간만이다!’ 중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중학교 때의 모습이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 기억을 통과시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통과시킬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블레포 할뿐이에요.
디아 블레포가 안 되지요.
그런데 동창은 옛날에 기억된 게 있으니까 디아 블레포가 되요.
‘아니, 너 그때 키가 175였는데 지금도 그대로이구나!’
아무도 그 사람이 중학교 때 175였는데 지금도 똑같다는 내용을 몰라요.
엔 블레포가 안돼요, 들여다보지를 못합니다.
이게 바로 본다는 거예요, 봄의 완성이에요.
그러면 이 얘기가 성경에 왜 쓰여 있을까요?
우리가 어제 발효인생이라는 말을 했어요.
우리 마음 안에 누룩이 들어있으면 그 누룩을 가지고 모든 주어지는 상황을 발효시켜 해석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더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해석하기 전에 모두 봐야 되잖아요, 봐야 돼요.
해석의 내용과 구조가 보는 것 안에서 이미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 세 겹으로 이루어진 ‘봄’
자, 예수님께서 왜 이 시각장애인의 손을 손수 붙잡으셨을까요?
왜 이 사람을 붙잡고 마을 바깥으로 끌고 나가셨을까요?
왜 침을 뱉으셨을까요?
왜 안수를 두 번 하셨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시각장애인일 경우에 특별히 청각과 촉각과 후각이 남달리 발전하게 됩니다.
음식을 눈으로 볼 때, 많이 그 음식 맛이 혼동이 돼요, 착각을 일으킬 수가 있어요.
그 음식이 맛있게 보이면 미각이 혼동을 일으킵니다, 실제로는 맛이 없는데도.
그러니까 시각장애인들의 후각과 미각이 훨씬 정확한 거예요.
이렇게 시각이 죽음으로써 모든 감각이 더 예민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안수를 두 번 하시고, 침을 뱉고, 마을 밖으로 데려가십니다.
마을 밖으로 끌고나갈 때 그랬을 거예요, ‘어디로 끌고 가십니까?’ 이 사람이 아마 바짝 긴장했을 겁니다.
마을 밖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고나간다, 그리고 침을 탁 뱉으셨어요, 퉤 하는 소리와 함께 촉각이 곤두섰을 겁니다.
그리고 안수하십니다.
자, 이 과정을 왜 겪게 하셨을까요?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이 눈을 뜨게 될 때, 이 사람 마음속에는 온통 예수님이 첫 번째 관심사로 들어가 박힙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 사람에게 지금 현재라도 유일한 관심이 예수님이 되게끔 하십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보라는 얘깁니다.
마을 바깥으로 끌고나간 이유는 뭡니까?
다른 사람 없는 곳에서, 삶의 문제가 없는 곳에서 오직 관심이 예수님인 상태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담은 다음에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신다는 거예요.
통과시키는 내용을 예수님으로 만들어버리십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라는 거예요.
봉이 김선달은 물을 보면서 순간 마음속에 너무 좋아서 꽉 잡고 있는 돈이라는 것을 통과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저것이 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엔 블레포 하는 거예요.
그 대동강 물이라는 것이 돈을 통과시켜서 보았을 때, 쓸모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거예요, 이게 엔 블레포, 밝히 본다는 게 이 말입니다.
사람을 볼 때, 돈을 통과시킵니다.
그러면 이 사람과 사귀어서 내게 돈이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게 바로 엔 블레포라는 거예요.
이것이 순간순간 일어나는 거예요.
신앙은 뭡니까?
애인을 보든, 돈을 보든, 사업을 보든, 무엇을 보든지 간에 마음이 하나님 한 분과 천국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모든 ‘봄’을 하나님을 통과시키고 천국을 통과시켜서 보는 거예요.
천국을 ‘디아’ ‘through’ 해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을 디아, 통과시켜서 보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인생이 다 결정되는 거예요.
내 마음을 눈이 포착한 내용들을 통과시키는 순간에 다 결정되어 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결정돼버립니까?
자, 보세요!
꿀벌이 설탕을 먹습니다, 제가 설탕을 먹습니다.
설탕이 꿀벌의 몸을 통과하고 제 몸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 몸을 통과한 설탕은 배설물로 나옵니다.
꿀벌의 몸을 통과한 설탕은 꿀이 되어 나옵니다.
내가 나물을 먹습니다, 내 몸을 통과해서 배설물로 나옵니다.
젖소가 풀을 먹습니다, 젖소의 몸을 통과해서 그 풀이 우유로 나옵니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무엇을 보든지 간에 어디를 통과시키느냐 하는 거예요.
내 마음에 돈이 가득 차있습니다, 내 마음에 자식이 가득 차있습니다.
내 마음에 여자를 볼 때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을 통과시켜서 여자를 보면, 이 여자는 이렇다 저렇다 엔 블레포 해버립니다.
이게 모든 거짓과 모든 사기와 모든 불행의 근거가 돼버린다는 거예요.
오직 내 마음에는 하나님만으로 가득차서 이 시각장애인이 지금 현재만이라도 오직 그의 관심이 마음 안에 예수님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십니다.
만지고 침 뱉고 또 안수하시고 하시면서 오직 예수님만을 긴장하며 담고 있는 상태에서 눈을 뜨게 하셔서 세상을 보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보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 눈앞에 자식이 보이고 눈앞에 사업이 보입니다.
그것보다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에 하나님이 찹니다, 약속이니까요.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도 먼저 내가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서 이 세상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을 때, 마음 안에 하나님이 차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찬 다음에 나를 세상으로 내보내실 때 이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통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과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뜻과 계획에 의해서 주물러지고 만들어지고 변형된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 인생이 완전히 죽쒀버렸습니까?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에 대해서 일단 죽으세요.
왜냐하면 그 죽쒀버렸다는 것도 지금 내 마음에서 세상의 기준을 통과시키면서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려야 됩니다.
죽어버리면 하나님이 마음속에 찹니다.
이 시각장애인이 마을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으로 만져짐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안수 받으면서 예수님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마을 밖으로 나가세요, 삶의 현장 밖으로 나가서 십자가 붙잡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삶으로 나갑니다.
이제 모든 게 다 하나님을 통과하게 되면서 아무리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거지같이 망했던 삶이라도 벌을 통과한 설탕이 꿀로 나오듯이 젖소를 통과한 풀이 우유로 나오듯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나타나고 보이고 이해되고 바뀌어버린다는 거예요.
삼겹보기, 요거 아주 중요합니다.
십자가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서 완전히 하나님 한분으로 마음이 다 채워질 때, 모든 보는 것들이 하나님을 통과하게 되고, 하나님을 통과하게 되면서 무질서는 질서로, 어두움은 빛으로, 허무함은 열매로 바뀌어 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갑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고 삶의 현장에 대해 죽습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에는 하나님으로 천국으로 가득 차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 삶을 살게 될 때, 보는 것마다 하나님을 통과하는 ‘디아 블레포’가 있게 하시며, 그래서 보는 것마다 하나님의 계획을 그 안에서 보고 하나님의 뜻을 그 안에서 보는 ‘엔 블레포’ 하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