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러너 후기- ＜토마스 이 미친놈아＞

[게장]

메이즈 러너

헤밍웨이의 빙산 기법이 떠오른다. 모든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감추어두는 것.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생략된 부분이 물 위에 나와 있는 부분을 강화시키는 것. 드러내기보다는 숨김으로써 관객을 몰입시키는 영화 <메이즈 러너>는 빙산 기법을 아주 잘 활용한 영화였다.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숨기고 있다. <메이즈 러너>의 직관 게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듯 하다. 덕분에 관객은 기억을 잃고 글레이드에 던져진 토마스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토마스가 마주하는 선택의 기로에서마다 관객들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토마스를 보게 된다.

글레이브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벽은 글레이브의 구성원들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그 벽이 그들을 가두고 있는 벽인지, 아니면 그들을 그리버로부터 지켜주는 울타리인지 혼동이 된다. 벽이 있음으로 인해 그리버가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믿음에서 글레이브라는 사회가 시작되는 듯 보인다.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나에게 드는 생각은, ‘왜?’였다. 영화를 통해 직관을 경험하고자 했지만 우습게도 나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향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단서들을 가지고 진실을 추론하는 것 또한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의 모든 환경은 위키드라고 불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위키드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가뒀으리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주어진 공간에서 인간이 이루게 되는 사회에 대해 관찰하기 위해서라거나 강한 인간을 선별하기 위해서 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의문은 벤이 등장하면서 크게 압축된다. 벤은 그리버에 찔려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인물이다. 여기서 든 생각은, 그리버라는 괴물이 위키드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과, 그리버의 독이 실험의 목적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버에 찔림으로써 벤에게 나타난 증상은 두 가지였다. 먼저 토마스를 알아봄으로써 메이즈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을 되찾은 듯 보였다, 이를 통해 그리버의 독이 인간의 손상된 뇌를 복구시키거나, 인간을 각성시키는 약물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부작용인 폭력성 등을 알아보거나, 약물이 주입된 인간을 다시 데려가 실험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리버의 독은 어떠한 질병이고 그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심 좀비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후속편에서 좀비 바이러스임이 드러났지만, 당시엔 여기서 좀비 바이러스가 등장한다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위키드가 만든 미로 안의 사회가 실험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죽은 많은 인물들이 사망으로 추정될 뿐 실제로 그리버에 의해 사망했음을 보여준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벤과 알비가 있는데, 둘 모두 그리버에 의해 찔렸으나 벤은 글레이브의 규율에 의해 미로로 추방당했고,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실제로 사망했는지의 여부는 등장하지 않았다. 알비도 마찬가지로 그리버에 의해 잡혀갔을 뿐 사망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를 통해 미로가 실험을 위한 것임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누가 봐도 좀비바이러스 같다)

신기하게도 영화 안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하는 인물은 없었다. 영화에서의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그들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미로에서 벗어나는 것과, 생존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위 두 가지 중에서 생존하는 것을 더욱 큰 가치로 두었다. 그들은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했고, 그것은 규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규칙을 만듦으로써 규칙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공생할 수 있었고, 역할을 분담하여 러너라는 역할을 만듦으로써 동시에 미로에서 탈출을 꾀하였다. 글레이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러한 규칙에 동의하는 듯 보였고, 실제로도 이보다 합리적인 방법은 없어 보인다.

토마스는 그런 글레이브의 합리에 반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인간적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부상당한 알비를 부축해 돌아온 민호를 모두가 지켜만 보고 있을 때, 러너 외에는 미로에 들어갈 수 없다는 룰을 어기고 미로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민호와 알비를 보자마자 모두가 미로에 들어갔으면 안전하게 그들을 빼내 왔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해 보였고,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의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모두가 미로에 들어가 동료를 구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글레이브의 규율은 그들의 발과 생각을 묶어버리는 족쇄가 되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한 합리성은, 상황이 지닌 콘텍스트에 의해 합리적이지 않았다.

(규율이 뭐라고... 좀 도와라)

여기서 보여준 토마스의 선택에 대해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토마스가 규율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미로에 들어간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하는 것이었지만 이내 이 의문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사실 그의 행동과 선택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합리성의 프레임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가 미로로 들어간 것이 미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면 그의 판단은 모험적인 것이었고, 동료를 구하기 위함이었다면 정의로운 것이었다. 그는 단지 그의 직관이 시키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대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고, 이는 잘한 결정도 잘못한 결정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선택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고, 규율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동료들을 모두 구하고 그리버까지 죽이게 되었다. 토마스가 그의 직관대로 행해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그러면 된 거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글레이브에서 토마스 옆에 서 있던 무리 중 하나였다면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야 이 미친놈아!!!!!”

갖은 고생 끝에 밤의 미로에서 동료를 구하고 살아남은 토마스를 기다리는 것은 갤리였다. 토마스라는 캐릭터도 미쳤지만, 갤리라는 캐릭터도 어지간히 미쳤다. 갤리의 가장 큰 가치는 규율의 틀 안에서 글레이브를 이루어 ‘사는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에 의해 어겨진 규율을 견고히 하기 위해 그는 토마스에게 벌주기를 원한다. 그의 규율에는 예외가 없다. 그런 그에게 토마스는 기존의 틀에 자꾸 균열을 일으키는 나쁜놈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갤리가 나쁜놈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규율의 대전제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함께 살기 위해서’ 규율을 만들었다. 그런데 갤리에게는 규율의 목적보다 규율 자체가 가장 큰 가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토마스가 사람을 구했음에도 규율을 어긴 잘못을 묻는 나쁜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미친놈, 토마스의 진가는 그 후에 발휘된다. 토마스와 민호, 알비가 밤의 미로에서 살아돌아온 이후 3년 넘게 굳게 닫혀있던 미로의 문이 열리고 만다. 글레이브를 가두는 벽이자 글레이브를 지켜주는 울타리이던 문이 열리자 미로 속에 있던 그리버들이 글레이브를 침공한다. 3년 간 닫혀있던 문이 열린 것이다. 이 사건은 흥미롭다. 문이 열린 것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온갖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갤리의 말대로 토마스가 그리버를 죽였기 때문에 평화조약이 깨진 것으로 간주, 침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그냥 때가 된 걸 수도 있다. 원인은 글레이브의 누구도 알 수 없다. 토마스는 역시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문이 열렸기 때문에, 이제 다 같이 미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합리충 갤리는 역시나 원인을 생각한다. 오랜 기간 굳건했던 벽이 갑자기 열린 이유. 토마스 때문일 확률이 가장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상황에서조차 갤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단 머무르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면 진짜 미친놈, 토마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갤리가 토마스에게 토마스가 그리버를 죽임으로 인해 그리버가 글레이드를 침공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토마스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미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토마스와 다른 가치를 추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곳이 글레이브든 미로든 상관없이 그냥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그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글레이브라는 곳 자체가 실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들이 글레이브에서 행복하게 ‘살고’싶다 한들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에 그 사실을 모른다. 그들이 왜 글레이브에 있는지, 그들이 실험체인지, 당시의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런 그들이 혹여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침해받고, 사망하게 된 것이라면 토마스는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직관의 괴물일 뿐이다.

(그리버 징그럽다)

그러나 다행이 그는 괴물은 아니었나보다. 토마스는 자신의 몸에 주사를 놓는다. 검증되지 않은 주사를 자신의 몸에 놓는다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그 방법이 죄책감을 느꼈더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의 타개책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주사를 통해 기억을 되찾은 토마스는 아마 한 시름 놓았을 것이다. ‘내 선택이 맞았어!’ 하며... 결국 미로 자체가 실험이라는 것을 기억한 토마스는 그간 해온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토마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미로를 탈출한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역시나 주인공 외의 인물들이 대거 사망한다. 대의를 위한 희생도 아닌, 자신의 꿈을 위해 합심하여 노력하다 죽게 된 그들은 과연 그들의 선택을 잘 한 선택이었다고 회상할까? 물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지만... 내가 죽으면 꿈이고 대의고 뭣도 없는 것을.

토마스는 자신의 꿈인 ‘미로에서의 탈출’을 동료들에게 설득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료들은 토마스의 꿈을 함께 좇는다. 그 꿈이 자신의 꿈과 같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마스가 이 영화에서 대단한 캐릭터인 이유이자 동시에 미친놈인 이유는 자신의 꿈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토마스의 설득은 본인이 그 내용에 대해 확신과 신념을 가짐으로 인한, 에토스적 설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의 번득이는 직관과 그 외의 인물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결국 토마스 무리는 미로에서 탈출한다. 중간에 기억을 되찾아 토마스 일당을 따라온 갤리는 토마스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어 토마스를 죽이려고 하고, 토마스의 동료이자 자신의 옛 동료 중 한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만다. 훗날 갤리가 죽지 않았음이 밝혀지지만, 동료를 죽임으로써 모두의 나쁜놈은 이렇게 갤리가 되고 만다.

이 영화에서 악역은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악은 없다. 영화에선 주인공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이 매우 적다. 그래서 관객은 항상 생각하고 추측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미지의 공포에 쫓기게 된다. 미지의 적이 관객과 주인공에게 주는 아주 적은 단서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낳고,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수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토마스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역시나 ‘미친놈’이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그냥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요즈음을 ‘미쳐야 성공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미침’과 토마스의 ‘미침’은 매우 닮아 있다. 이 두 ‘미침’이 어떤 것인지는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직관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직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가, 그래서 그들의 ‘미침’이 미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가올 때가 기다려진다. 나도 그런 ‘미친놈’이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