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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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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락헌의 생애와 시대적 상황 2. 선비의 어원과 선비 정신 2.1. 선비의 어원과 개념 2.2. 선비정신의 의미 3. 만락헌의 한시에 나타난 선비정신 3.1. 사군자와 절개 3.2. 학문과 교유관계 4. 결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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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고에서는 만락헌(晩樂軒) 장석인(張錫寅)의 생애와 문학세계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장석인(1863-1938)은 금계 이근원의 문인이며 지사(志士)였다. 본 연구에서는 만락헌이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인간관과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특히 한시에 나타난 선비 정신은 사군자(四君子)와 학문에 대한 관심, 자손이나 친구에 대한 애정과 애국적인 삶이 함께 투영되어 있었다. 아울러 난(蘭), 국(菊) 등 사군자가 그의 한시에 자주 등장하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손 교육, 교유 관계와 애국 헌신적인 삶의 모습이 그의 문학세계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석인의 한시에 나타나는 소재를 유형화해 보니, 사군자(四君子)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많았다. 그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에서 그는 지조와 고결한 군자의 인품을 표상하였다. 또한 작품 속에서 학덕이 높은 성현이나 인물, 친구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는 내면 성찰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덕성 함양과 선비정신이 삶의 방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석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데 사용한 텍스트는 그의 작품집 『만락헌문집(晩樂軒文集)』이며, 1999년 후손들이 편찬한 한글번역서를 자료로 하였다.
본고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선비정신을 파악함에 있어 그 중 사군자 소재 시와 학문과 교유 관계를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미적 가치를 밝히고자 했다. 즉, 선비정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만락헌의 시각을 토대로 그의 문학관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문학세계의 특성과 문학적 위상을 구명(究明)하는데 그 목적과 의의를 두었다.
주제어: 장석인, 한시, 사군자, 선비정신.
1. 만락헌의 생애와 시대적 상황
장석인(張錫寅, 1863~1938) 선생은 화서 이항로, 금계 이근원의 문인이다. 자는 형중(亨中), 호는 만락헌(晩樂軒)이며, 본관은 단양이니, 단양 장문(張門)의 후예(後裔)다.
장문의 시조(始祖)는 고려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태사(太師) 태조아부(太祖亞父) 충헌공(忠獻公) 장정필(888~978)이다. 태조아부(太祖亞父)라 함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스스로가 장정필을 아버지 같이 모시겠다고 발표한 데에서 유래한 일이다.
장석인의 조부는 장용급(張龍汲)으로 자는 급여(汲汝)이다. 성품이 인자하여 재산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들여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공의 덕행이 널리 알려져 80세에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龍驤衛) 호군(護軍)의 직첩을 받았다.
만락헌의 선고(先考)는 장종화(張宗華)인데, 자가 성겸(聖謙)이다. 사리에 정통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품으로 가정이 빈한하였으나 빈민구제 사업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선대들의 혈통을 이어 만락헌 장석인은 1863년 3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동로면 수평리에서 장종화 공과 강릉 최씨 사이에서 1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영민하고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1893년까지 학문 수련에 전념하였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과거 응시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없어진 이후 인재 발굴 방법이었던 음서(蔭敍)제도를 통하여 인품과 학문적 성취도를 인정받아 혜민서(惠民署) 종사랑(從仕郞)이 되고, 1904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된다.
그의 부친 장종화 공은 그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여러 차례의 빈민 구제 사업을 벌였기에 부친의 뜻을 이어 그도 1896년부터 항일의병에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만락헌은 1895년 의병 때부터 말하기를, “내가 사람보다 뛰어난 방략이 없으니 의병으로 나갔다가 헛되게 죽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보전하고 전후에서 조금씩 도와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고 군자금을 지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만락헌은 선대(先代)들이 보여준 나눔의 삶을 실천에 옮겼으며, 선대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1907년에도 항일의병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나 1908년 의병전쟁이 실패하자 “나라가 망하여 앞으로 사람이 금수가 될 터이니 성인의 학문을 강론하고 밝혀 후생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이치와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하는 의리를 알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에 참여했던 광암 이규현을 초빙하여 후손을 교육시켰는데, 원근에서 찾아와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1910년에 국치(國恥)를 당하자 관대(冠帶)를 버리고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졌는데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사람이란 말인가” 하며 탄식하였다. 그 후 1913년 의병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고 신변의 위협을 받자 스승인 화서학파의 금계 이근원선생의 강학소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로 이주하여 금계 이근원을 비롯하여 광암 이규현, 직당(直堂) 신현국(申鉉國), 치재(恥齋) 이민응(李敏應), 그리고 경북 영천의 낭산(朗山) 이후(李垕) 등과 학문적 교류가 많았다.
1920년에는 흉년이 들자 이를 이용하여 양민들을 수탈하려는 일제에 항거하여 사재를 털어서 100여 호에 구휼미(救恤米)를 지급하였다. 1926년 애국지사인 치재(恥齋) 이민응(李敏應)이 주도한 (재)선린회의 식산(殖産) 주식회사와 일제에 의한 양민들의 수탈을 막고, 농촌진흥을 목적으로 조직한 기동보린사(畿東保隣社)의 창립에 큰 아들 장수영(張壽永)을 통하여 빈민구제사업에 참여하였다.
1930년~1938년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쫓기는 몸이 된 애국지사 광암 이규현을 비롯하여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의병에 참여하여 중군장으로서 원주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뒤 후일 지명수배자가 된 이병덕(李炳德) 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가족들 전체를 돌보았다.
만락헌이 활동하던 시대적 상황을 보면 ‘개화기는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의 해결이라는 임무를 맡은 시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잃게 되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속한다. 그리고 일본의 압력이 특히 가중되어감에 따라 지식인들은 강렬하게 양왜(洋倭)를 배격하는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는 온건개화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이항로, 최익현 등의 결사적인 양왜배격론(洋倭排擊論)이 주목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만락헌은 항일의병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항일의병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돌본 것은 항일투쟁에 협력한 명백한 사실이다. 만락헌은 외세가 조국을 강점하고 민족을 짓밟았던 격동기에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고 인(仁)과 의(義)를 실천한 진정한 선비이며 애국지사였다.
맹자가 “선비란 궁색하여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듯이 인(仁)’과 ‘의(義)’는 인간의 타고난 성품에 근거한 덕성이면서 선비정신의 기준이다. 만락헌은 역사적 전환기와 민족수난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조와 의리를 지키며 애민(愛民)을 실천해온 어진 사람이다.
만락헌 장석인의 생애는 1938년 10월 5일 향년 76세로 별세할 때까지 선비정신으로 일관해 왔으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고수한 애국지사의 발자취였다.
2. 선비의 어원과 선비정신
2.1. 선비의 어원과 개념
선비의 어원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선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① 옛날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 ② 학문을 닦은 사람을 예스럽게 일컫는 말. ③ 어질고 순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선비라는 말은 “학식이나 인품을 갖춘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는 독서를 기본 임무로 삼고 관직을 담당하는 신분이나 계급”이지만 “어질고 순한 사람”이라는 뜻도 ‘선비’라는 어원 속에 담겨 있다.
한자어에서는 주로 ‘사(士)’자가 선비의 뜻으로 쓰이며, 그 밖에 ‘유(儒)’자나 ‘언(彦)’자도 선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선비를 ‘사(士)’의 번역으로만 보면 유교에서 상정한 이상적인 인간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상정된 점에서 이것은 ‘군자(君子)’,‘현인(賢人)’,‘인인(仁人)’과 견줄만하다. 어느 모로 보나 결함없이 신에 가까울 정도로 완전성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상이 ‘성인’이라면 선비는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별로 흠이 없는 인간이다. 이론상으로는 비록 노력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무망(無望)에 가까운데 비하여 선비는 수양과 학문의 실천을 통하여 성취 가능한 인간상이다.
선비가 君子가 되기 위해 중요시했던 것은 독서이다. 학자에 따라 선비가 지식을 남보다 더 소유하였음을 드러내려고 할 때 그 뜻을 ‘독서인讀書人)’으로 풀이하는 것을 본다. 선비를 독서인이라고 할 경우라도 그 인간상은 한낱 ‘서생(書生)’과는 구별된다. 선비의 조건은 지식 못지않게 원만한 인격의 덕성(德性)을 소유함에도 있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군자와 짝이 되어 ‘사군자(士君子)’라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퇴계는 선비를 설명할 때, 선비의 꿋꿋하고 당당한 기개와 의리로 확립된 신념을 강조하였다. 그는 선비란 “다른 사람의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으며, 저 사람이 부(富)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인(仁)을 지키고 있으며, 저 사람이 벼슬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의리를 지키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부(富)와 귀(貴)를 가벼이 알고 인(仁)과 의(義)로써 자신을 확인하여 의리를 지키는 신념에 찬 선비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율곡은 참된 선비(眞儒)란 “나아가면 한 시대에서 도(道)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화락한 즐거움이 있게 하고, 물러나면 만세(萬世)에 교(敎)를 드리워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라고 하여 선비의 역할이 그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선비는 학문과 인격을 수양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청렴과 공정무사로서 목민의 도(道)를 다하였으며, 공직에서 물러나면 인재를 육성하고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본분을 다하였다. 따라서 선비는 인격과 양심, 그리고 도덕성을 최고의 가치로 하여 부단히 자기를 연마하면서 개인보다는 사회를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여 신념과 용기를 갖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선비의 어원이 선인이나 선배(先輩)에서 유래한 만큼 ‘선비’라는 말은 분명히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선비’를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션비 유(儒)’와 ‘선븨 사(士)’로 통칭되므로 ‘선비’라는 단어를 유교적인 용어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숭유정책으로 일관된 조선 시대의 유교가 선비 정신에 깊이 배어들면서 유(儒)와 사(士)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조선 시대의 선비는 지식인으로 이해되었다. 굳은 지조와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불굴의 정신력과 청정한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유교 전통에서 보면 선비는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를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우리말에서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다. ‘선비’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선비’의 개념은 유가의 선비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유가의 ‘선비’ 개념은 ① ‘유(儒)’, ② ‘사(士)’, ③ ‘군자(君子)’라는 단어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儒)’의 개념은 우리말로 ‘선비’를 이야기하지만 “세상에서 꼭 필요한 계층”을 뜻한다. ‘사(士)’의 개념이 신분이나 계층의 뜻을 가졌으나 점차적으로 인격이나 성품으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儒)’라는 글자를 자세히 풀이하면 사람 ‘인(亻)’ 변에 필수(必要)의 수(需) 자를 합한 것이므로 이 뜻만으로는 ‘유(儒)’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의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말 ‘선비’는 ‘유(儒)’의 개념보다 ‘사(士)’와 더 친밀하다. 금장태는 한자의 사(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사(仕)와 관련된 말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되, 회의문자로서의 사(士)는‘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군자(君子)’는 유(儒)나 사(士)처럼 우리말로 직접 ‘선비’로 번역된 말은 아니나 ‘군자’는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군자의 사전적 의미는 “유교적 덕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왕, 후, 경, 대부의 미칭(美稱)으로 공자 이후에는 개인의 도덕적인 노력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사’는 군자의 단계로 상승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는 유교적인 인격체인 군자와 결합하여 ‘사군자(士君子)’가 되며, 또한 선비는 군자의 도를 익힘으로 군자의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비와 군자는 학문과 덕행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관하지 않다. 결국 ‘선비’라는 말은 어원으로 보나, 유가 전통적으로 보나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며, 이 선비 정신이 곧 우리 민족이 지향하는 정신이라 하겠다.
2.2. 선비정신의 의미
선비는 벼슬이나 신분을 강조하기보다는 ① 고상하고 어진 인품을 가진 자로서 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자이다. ② 예절과 의를 존중히 여기고 지조와 강인한 의지를 소유한 자로서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진 자이다. 동시에 ③ 역사적인 의식을 가지고 정도를 구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수양을 위해 궁구하는 자이다. 그래서 사회와 이웃에게도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도의 실현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섬기는 삶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올바른 선비인 것이다. 선비를 선비로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은 선비가 지닌 이념과 가치규범을 전제로 하는 선비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선비정신은 온화한 기상에서 어진 덕성(仁)의 화평함을 보여 주며, 비분강개한 기상에서 의리(義)의 준엄함을 드러낸다. 곧 ‘인(仁)’과 ‘의(義)’는 인간의 타고난 성품에 근거한 덕성이면서 선비정신의 기준이 되고 있다.
맹자는 “선비란 궁색하여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궁색하여도 의로움을 잃지 않으므로 선비가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다”고 하여 선비가 지키는 바가 ‘의로움’(義)과 도리’(道)임을 밝히고 선비가 의로움으로 지조를 지키며 도리를 따르기에 많은 사람들의 희망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선비정신은 뜻을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과 덕을 쌓아 올바른 길로 지조를 지켜 살아가려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선비 정신은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사상이다. 무엇보다 ‘의리’와 ‘지조’를 강조한다. 사전적 의미로 의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의리란 유가에서 말하는 단어의 뜻 그대로 옳은 것, 마땅한 것(義)을 실현하는 이치와 사상을 의미한다.
의리사상은 공자로부터 비롯되어 맹자에게 계승되고 송대(宋代)에 체계화되어 저항정신으로 나타났으며 조선이 받아들여 민족주체의식과 자주정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특히 한국 사상의 전통을 이루어왔던 유교는, 성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역사의 부정적, 불법적 국면에서 이를 비판, 거부하고, 정의를 주장하고 추구하는 의리사상으로서 강력히 대두되고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만락헌이 의리와 지조를 지켜 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바른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선비 정신은 만락헌이 민족의 수난기에 외세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애국 애민을 실천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3. 만락헌 한시에 나타난 선비정신
만락헌은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곧은 선비정신을 그의 문학 작품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 선비 정신은 그의 문학 작품 속에서 사군자, 스승과 친구, 학문의 교유 관계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매(梅), 난(蘭), 국(菊), 죽(竹) 사군자를 소재로 하여 지조와 절의를 나타내기도 하고, 가문과 자손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스승을 존경하며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자의 공경심이 담긴 작품들이 있으며, 의리를 바탕으로 두터운 교우 관계를 형성하는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선비정신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그의 문학세계를 살피고자 한다.
3.1. 사군자(四君子)와 절개
1) 국화
同是春風長養物 똑같이 봄바람에 자라난 그 식물이
留花不發待何時 꽃 피우지 않은 채 어느 때를 기다리나
蕙蘭芳秀羣荊雜 난초들이 꽃 필 때 가시나무 뒤엉키고
楊柳繁陰亂草靡 버들이 무성할 때 잡초가 우거졌지
晉士籬邊看舊史 진사는 울가에서 옛날 사서 보구요
楚囚澤畔咏哀詞 초수는 못가에서 애사를 읊었었지
高操獨笑秋聲外 높은 절개 혼자서 가을 소리 비웃으니
九九眞黃晩節宜 구구절 진짜 황색 늦철이 제격일래
-「영국(詠菊)」
작품 「영국(詠菊)」은 7언율시 한시 형식으로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의 높은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금(古今)을 통해 볼 때 선비문화의 상징(象徵)으로 사군자(四君子)를 든다. 이 작품에서도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 국화를 소재로 가져왔다. 작품 내용을 보면, 국화는 다른 식물처럼 봄철에 꽃 피우지 않고 때를 기다려 황색 늦철 가을에 혼자서 핀다고 찬양하고 있다. 중국고사에 나오는 인물 중 진사(晉士)와 초수(楚囚)를 인용하여 자연과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을 국화에 견주고 있다.
진사(晉士)는 진(晉)나라 선비 도잠(陶潛)인데 일명 연명(淵明)이라고도 한다.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으나 오두록(五斗祿)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술과 시를 즐기며 살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徑)은 묵었지만 송국(松菊)은 여전하구나.”고 하였는데 도연명의 국화 사랑을 알 수 있다.
초수(楚囚)는 초회왕(楚懷王)의 신하 굴원(屈原)이다. 『초사(楚辭)』에 “내 이미 구원(九畹)의 난초에 물을 대었고 또 백묘에 혜초를 심었노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12묘를 원이라고 한다. 혹은 이랑이 긴 밭을 원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후세에 이를 난초를 심는 고사로 삼았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도잠이나 굴원을 인용하여 자연과 교감하는 정서를 표출하고, 선비로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선비들에게 풍류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심성을 맑게 하는 수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락헌은 국화의 높은 절개를 통해 선비가 지향하는 심성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九秋今日是重陽 구추라 오늘이 중양절 그날이니
菊露垂黃晩節香 국화 이슬 노래지자 늦 향기 상큼하이
滕閣淸流才子筆 등왕각 청류놀이 재사가 글 지었고
龍山暢飮逐臣觴 용산에서 폭음하다 내쫓긴 신하됐지
殘骸漸老知多病 잔해가 노쇠하여 잔병이 많아지니
佳節當逢望故鄕 명절을 만나자 고향이 그립구나
幸接芳隣高會設 다행히도 이웃에서 연회를 마련하니
良辰取醉我猖狂 좋은 때에 실컷 취해 미친 듯이 놀았다네
-「구월구일(重九日)」
작품 「중양절(重九日)」은 9월9일 중양절에 느끼는 감회를 7언율시로 쓴 한시이다. 국화의 늦은 향기를 상큼하게 느끼고 있는 작자의 정서를 맑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등왕각과 관련된 중국 고사와 함께 이해하는 것이 감상에 도움이 된다.
등왕각(滕王閣)은 강서(江西) 신건현(新建縣) 서쪽 장강문(章江門) 위에 있었던 누각의 이름이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4년에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형주도독(荊州都督)으로 있을 때 건립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함형(咸亨) 2년 중양절(重陽節)에 홍주목(紅州牧) 염백서(閻伯嶼)가 등왕각에서 관료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는데 왕발(王勃)이 아버지를 뵈러 갈 때 마침 남창(南昌)을 지나가다 그 잔치에 들러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작품의 함련(4행)에 등장하는 ‘용산(龍山)에서 내쫓긴 신하’에 대한 고사를 보면, 『진서(晉書)』「맹가전(孟嘉傳)」에 “맹가가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이 되었다. 9월 9일에 환온이 용산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참모들이 모두 모였다. 그때 바람이 불어 맹가의 모자를 벗겨 떨어뜨렸으나 맹가가 모르자 환온이 손성(孫盛)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맹가를 조롱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맹가가 즉석(卽席)에서 그 글에 답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글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주위의 사람들이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자연물의 대상으로 등장한 국화는 맑고 상큼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사군자 중의 하나인 국화는 고상한 군자의 표상이다. ‘군자’는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군자의 사전적 의미는 “덕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이다. 작가 만락헌은 이슬과 조화를 이루는 국화의 자태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이며 그의 자화상이기도한 선비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다.
다음 작품은 소나무와 국화를 함께 소재로 사용하여 독특한 절개와 그 속에 담긴 참뜻을 노래한 작품이다. 소나무의 꿋꿋한 자태와 국화의 곧은 절개가 작품의 주제이며, 작가가 추구하는 참뜻은 송국지절(松菊之節)이다. 그것이 곧 고귀한 선비 정신의 한 단면이다.
撫松培菊兩參差 소나무 국화를 두서 없이 심은 것은
愛爾平生卓節奇 너희들 독특한 절개가 좋아서지
箇中眞趣誰能識 그 속에 참뜻을 그 누가 알겠는가
寫史封官各有時 제각기 사기에 올릴 때가 있으리라
-「솔과 국화(松菊)」
2) 난초
隨處有芳草 가는 곳 어디에나 방초가 무성하니
無邊一色靑 끝도 없이 가도 없이 일색으로 푸르고나
山深知麝過 산 깊어서 사향노루 지나간 줄 알겠고요
春晩似蘭馨 늦봄이라 난 향기 풍기는 것 같구나
好雨淸香滑 단비 올 땐 맑은 향기 넘실넘실거리고요
疾風勁氣靈 폭풍 불 땐 굳센 기개 신령도 하군 그래
莫誇方類聚 부류끼리 모인다고 과장하지 말게나
指佞獨眞形 지영이 그 중에서 유일한 진짜라네
-「방초(芳草)」
작품 「방초(芳草)」는 5언율시 형식으로 늦봄의 난 향기를 노래하고 있다. 함련(4행)의 난초 향기는 시상이 전개됨에 따라 경련(5행)에 와서 단비를 만나 더 맑은 향기로 넘실대고, 경련(6행)의 ‘폭풍 불 땐 굳센 기개 신령도 하군’에서는 사군자의 특징인 절개와 지조를 강조하고 있다.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단비가 올 때에는 모든 초목이 향기를 뿜어내다가 폭풍이 몰아치면 모두 다 한 쪽으로 휩쓸리고 그 중에 휩쓸리지 않는 초목이 있다는 뜻인데, 지조를 변치 않는 사람에게 비유한 것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의 기록을 보면,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에게 말하기를 “무덕(武德) 6년 이후로 고조(高祖)께서 나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온갖 방법으로 그대를 유혹하고 협박하였으나 굽히지 않았으니 그대는 정말 사직(社稷)의 신하이다.”하고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폭풍 불 때 안 휩쓸린 굳센 풀 알 수 있고, 혼란 때에 충직한 신하를 알 수 있지(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인용한 것은 작가가 선비정신을 대변하는 충(忠)과 절개(節槪)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련(8행)의 마지막에 나오는 ‘지영’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난초와는 이미지가 다른 시어이다. 지영(指佞)은 지영초를 이르는 풀이름이다. 요(堯)임금 때 뜨락에 굴일초(屈軼草)가 있었는데 아첨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잎을 굽혀 가리켰으므로 일명 지영초(指佞草)라고 하였다. 후세에 간사한 사람을 식별하는 것을 지영이라고도 하였다. 결국 이 작품은 간신을 가려내는 모습을 지영초에 비유하고, 폭풍이 불어도 변하지 않는 충직한 신하의 굳은 지조를 난초에 비유하여 군자의 도를 강조한 작품이다.
3) 대나무
親朋海內幾同庚 국내에 친한 벗 중 동갑이 몇이든고
流水浮雲歲月更 유수와 부운처럼 세월이 바뀌었네
騎竹何時相戱馬 죽마 타고 놀이하던 그때가 언제인지
深山今日各聞鶯 오늘날엔 심산에서 새 노래 듣고 있네
琴棋設處思蘭弟 거문고 바둑 보면 난초 아우 생각나고
詩酒逢時想菊兄 시회나 술자리선 국화 형이 떠오르지
屈指從遊誰某在 생존한 벗 몇 명인지 손꼽아 세어보고
秋風蕭瑟此心驚 가을바람 일어나면 이 마음 놀랐다네
-「옛 친구를 생각하며(憶故舊)」
이 작품 「옛 친구를 생각하며(憶故舊)」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 중 대나무, 난초, 국화가 시적 대상이 되고 있다. 대나무는 말(馬), 난초는 아우, 국화는 형과 병치되면서 옛날을 추억하고 있다. 작가 만락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옛 벗들의 모습은 사군자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있다.
사군자 대나무는 아름다움 · 강인성 그리고 높은 실용성 때문에 일찍부터 생활과 예술에 불가결의 존재로 되어 왔다. 『시경』의 「위풍(衛風)」에는 주(周)나라 무공(武公)의 높은 덕과 학문 그리고 인품을 대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다.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의 대나무는 실용성과 관련되어 어린 시절 죽마타고 놀던 추억이 옛 친구와 함께 떠오르고 있다.
사군자 중에 난초(蘭草)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하여 겉은 부드럽고 속은 강한 성품을 말한다. 국화(菊花)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여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고고하게 피는 절개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난초와 같은 아우, 국화 같은 형은 군자의 인품을 지닌 인간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처럼 만락헌은 선비정신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가치관이 그대로 문학세계에 반영되고 있다.
4) 매화
盆梅欲放雪初晴 눈 막 개자 분매 망울 방긋방긋 터지니
惹起天香玉骨淸 향기 풍긴 그 가지 옥처럼 깨끗하이
若得春風來煮酒 봄바람 불면 약주를 덥혀 놓고
心中無限盡歡情 마음 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리
-「매화(詠梅)」
經冬盆上一株梅 겨울 난 화분에 한 그루 그 매화
惹得春心正臘開 춘심을 야기하여 섣달에 꽃피웠네
時令方看灰管變 시기는 바야흐로 회관(灰管)*이 변한지라
芳情將吐玉人來 꽃망울 터뜨리면 미인이 오시겠지
風塵遙隔英雄煮 병화가 영웅이 오는 길을 막았지만
雨露無關隱士培 우로와 상관없이 은사가 돌본다네
滿樹淸香誰與賞 가득한 맑은 향기 그 누구와 감상하나
寒燈耿耿獨含盃 한등 아래 잠 못 자고 술잔만 들이켰지
-「분매(盆上梅)」
사군자 중의 하나인 매화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습이나 지조의 상징으로 많은 시문에 나타났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 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 이후로 특히 문인들 사이에 애호되었다. 대나무와 매화는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일컬어지고 있다.
첫 번째 작품 7언절구 「영매(詠梅)」에 그려진 매화는 내리던 눈이 막 개인 자연 속에 봄바람을 타고 꽃망울을 터트린 상태이다. 설경과 조화를 이룬 설매(雪梅)의 모습이다. 설매는 눈보라와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운 지조의 상징이며, 흰 눈과 어울리는 우아한 모습의 비유이다. 옥처럼 깨끗한 매화가 향기를 풍기는 모습을 보며 작가는 청아한 여인이나 청렴한 선비를 연상하고 있다.
작품 「분매(盆梅)」에서도 겨울을 지낸 한 그루 매화를 보며 맑은 향기와 아름다운 꽃망울에 매료되고 있다. 춘심을 야기하여 섣달에 핀 매화는 회관이 변하여 추운 시기에 먼저 피었다고 지적한다.
회관(灰管)은 옛날 22개의 율관(律管)에 갈청의 재를 담아 놓고 시기의 변화를 조사한 기구이다. 『진서(晉書)』 「율력지(律曆志)」에 “또 시일(時日)은 해의 그림자에 맞추고 지기(地氣)는 회관에 맞춘다. 그러기 때문에 음양(陰陽)이 조화를 이루면 그림자가 제때에 이르고 율기(律氣)가 호응하면 갈청의 재가 날린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시기가 이미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매화의 고귀함과 절개의 상징은 매화의 성품이 고결하고 우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시인들은 자신의 주위에 피어있는 매화를 보고, 그 깨끗하고 고결한 속성을 닮아가려 하였다. 만락헌도 그러한 속성과 매화의 깨끗함을 한시로 읊어 칭송하고 있다. 이것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3.2. 학문과 교유관계
1) 퇴계에 대한 경모(敬慕)
淵源自洙泗 연원이 저 멀리 수사에서 내려오니
無限活水聲 생동하는 물소리 끝없이 퍼지었네
千載求學意 천 년 뒤에 학문을 탐구하는 뜻 있어
再登景濂亭 경렴정에 또 다시 올라와 보았다네
-「삼가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지은 백운동(白雲洞) 경렴정(景濂 亭)의 시운에 따라(敬次退溪先生白雲洞景濂亭韻)」
我東正氣聚陶山 우리 동방 정기가 도산에 모이니
草木依倚精彩覵 무성한 초목에 정채가 드러나네
淸凉得主臨其後 청량은 주인 얻어 그 뒤를 임하였고
汾水尋源過此間 분수의 근원 찾아 이 사이를 지났구나
吾祖何年從負笈 우리 조상 어느 해에 책 들고 찾아갔나
先生當日接和顔 그 당시에 선생이 반갑게 맞이했지
不肖餘生多感古 불초 여생 옛일에 감회가 많은지라
悽然回憶淚潛潛 생각하다 쓸쓸해져 눈물을 흘렸다네
-「도산(陶山)을 생각하며(悔陶山)」
첫 번째 작품인 5언절구 「삼가 퇴계선생이 지은 백운동(白雲洞) 경렴정(景濂亭)의 시운에 따라」에서 만락헌은 선대부터 학문적 맥을 이어온 퇴계에 대한 경모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만락헌은 그의 선조 장근(張謹)이 퇴계의 제자였음을 생각하며 퇴계에 대한 존경심을 노래하고 있다. 어느 학파의 한편에 서서 다른 편을 질시(疾視)하고 배척(排斥)하는 마음이 아니라, 퇴계라는 선현(先賢)의 학문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며, 공경하는 선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시(詩)라고 할 수 있다.
만락헌은 공자가 제자를 데리고 학문을 강론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학문 탐구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작품의 1행에 나오는수사(洙泗)는 즉 두 물 이름이다. 이 두 물 사이에서 공자가 제자를 데리고 학문을 강론했기 때문에 후세에 수사를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삼았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내가 그대들과 수사의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기었다.”고 하였다. 학문의 연원이 ‘수사에서 내려온 물소리가 끝없이’ 퍼지듯이 천년을 이어져온 퇴계의 학맥을 수사에 견주어 표현하고 있다.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과 만락헌 장석인이 사제(師弟)의 인연을 갖게 된 이후에도 만락헌은 선대(先代)로부터 학문적 맥을 이어온 퇴계(退溪)에 대한 경모(敬慕)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다음 작품 7언율시 <회도산(懷陶山)>에서도 도산서원을 생각하며 퇴계 학문에 대한 존경과 선비로서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도산은 퇴계가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이 작품에서 만락헌은 ‘우리 조상이 책 들고 찾아갔던’ 도산을 생각하며 학문적인 맥을 짚고 있다. 선비정신의 모범이 되는 퇴계를 통해 진정한 학문은 수기(修己)의 이념을 투철하게 지키면서 자기를 바로 잡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만락헌은 선비로서의 ‘道’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 퇴계 선생이 지은 한시의 시운에 따라 ‘천년 뒤에 학문을 탐구하는 뜻이 있어 경렴정에 올라와 보았다’고 한시를 지었다. 작가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학맥을 통해 지속적인 학문적 노력이 천년 뒤에도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 금계와의 사제 간 의리
湖行六百我平安 육백 리 호남 길을 탈 없이 다녀와
歸坐黃驪放眼看 황려에 앉아서 사방을 바라보니
遊客止寮雲谷近 나그네 객사엔 운무 깔린 골짜기 가운데
主人居室子荊完 주인의 거실엔 처자식이 온전하네
入山講義眞佳趣 산에 살면서 강의함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擇里處仁尤己難 좋은 이웃 가려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五月萍場樽酒白 오월의 객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怡然相對舊衣冠 즐겁게 옛 의관하고 서로 마주하네
-「이호(梨湖)의 장형중(張亨中)의 교사(僑舍)에서 묵다(宿 梨湖張亨中僑舍)」
이 시(詩)는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이 장석인의 집을 방문하여 지은 7언율시이다. 선비의 서정을 노래한 시(詩)로서 운무 깔린 골짜기와 나그네 객사를 서경적으로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신뢰와 교감이 함축된 선비간의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외에도 「장형중 석인(錫寅)에게 답하다」처럼 서로 주고 받은 서(書)를 통해서 금계(錦溪)와 만락헌의 관계, 금계(錦溪)의 사고와 만락헌의 선비로서 됨됨이를 일견하여 알아볼 수 있다. ‘거실에 처자식이 온전하고 산에 살면서 강의함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만락헌의 자손 교육에 대한 열정을 치하하는 금계(錦溪)와 또 그 자손들에게 바라는 미래상을 통하여 두 지사(志士)의 사제지간의 교감을 엿볼 수 있다.
장석인의 문집인 『만락헌문집(晩樂軒文集)』에 수록된 만락헌의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에 대한 내용을 보면 두 사람간의 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분석할 수가 있다.
만락헌 장석인과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의 사제지간의 학문적 교류는 다양한 곳에서 자료로써 나타나고 있다. “화서학파에 대하여 오랫동안 연구를 한 장삼현(張三鉉)이 발췌한 내용을 보면, 금계(錦溪)의 학자로서의 인품을 논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계(錦溪) 이근원(李 根元)에 대한 회당 윤응선(尹膺善), 문인(門人) 윤정학(尹正學), 문인(門人) 장석인은 목욕재계하고 금계선생에게 올린 집지서(執贄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선생의 드높은 도덕을 저의 조그만 견해로 엿볼 수 없습니다만 선생께서는 화양(華陽) 송시열의 정통(正統)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군자들이 성대하게 웅거(雄據)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위대함을 몰랐지만 여러 군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황하(黃河)의 지주(砥柱) 역할을 하고, 한 겨울에 소나무 역할을 한 것은 선생 한 사람뿐이었습니다.’라고 함으로써 금계(錦溪)의 도학과 의리 그리고 공업(功業)을 찬하였다.”
금계(錦溪)와 만락헌은 비교적 잦은 서신 연락과 방문을 통하여 사제간(師弟間)의 의리를 나누었던 것으로 파악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쌓인 신뢰(信賴)를 바탕으로 보안과 비밀이 요구 되었던 의병활동 지원에 관한 역할 분담 등이 은유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자는 인(仁)을 숭상하면서도 겸양의 미덕을 지니기 때문에, 스스로 참된 사람이 되고 인자(仁者)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며, 남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등 남 때문에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자(仁者)로서 중용(中庸)의 도를 행하고자한 선비들은 언제든 지조를 지키면서 삶의 참된 자세를 견지하여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제 뜻을 실현한다.
이처럼 군자의 도를 지키며 선비의 모범이 되었던 금계 선생과 만락헌은 인간적 의리를 바탕으로 두터운 교유관계를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만락헌의 다음 작품 7언절구를 보면 스승을 존경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락헌의 선비정신을 알 수 있다.
接得眞源道大同 참 근원을 접하여 도덕이 대동하니
潭巴洙泗仰高風 담파수사 그 고풍을 우러러 존경하네
此書早晩頒於世 이 문집 조만간 세상에 반포되면
一脉陽春更自東 한 가닥 양기가 동방에서 일어나리
-「금계선생문집(錦溪先生文集)을 교정할 때의 시운 에 따라(和錦溪先生文集校正時韻)」
이 작품은 금계 이근원 선생 문집을 교정하면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담파수사에 견주어 노래하고 있다. 담파수사(潭巴洙泗)는 도학(道學)의 연원을 말한 것으로 석담(石潭) 이율곡(李栗谷) 파산(巴山) 송우암(宋尤菴) 수사(洙泗) 공자(孔子)이다. 선비의 모범이 되는 이율곡, 송시열, 공자의 고풍을 우러러 존경하며, 『금계선생문집』이 세상에 반포되면 양기가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시대적 혼란기 가운데 ‘義’를 중심으로 한 실천적 선비정신이 요구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낭산(朗山) 이후(李垕)와의 교유
南州豈無士 남녘에 선비가 없기야 하리오만
未有我公蹈舊規 공처럼 옛 법도를 지킨 이 없었다네
斯文危如髮 우리 유도 위기일발 그 지경에 놓였는데
爲誰任責向何之 그 누가 맡으라고 떠나셨단 말인가
潔身謝塵世 자신만 깨끗하랴
山寂寂水潺潺雲濛濛 속세를 떠나니 적막한 산수에 구름이 뒤 덮어서
我淚莫追 눈물만 훔칠 뿐 만류하지 못했다오
-「낭산(朗山) 이후(李垕) 공에 대한 만사(挽朗山李公垕)」
만락헌은 평소에 다정하게 지냈던 지인이나 특별히 가깝게 지냈던 친구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함께 학문에 대해 논하거나 자연 속에 모여 풍류를 즐기는 내용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면서 존경하거나 흠모해 교제를 나누었던 스승이나 친구 중 망인이 된 자를 떠올려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기도 하고, 추모의 마음을 담아 만사(輓詞)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 작품 「낭산(朗山)이후공(李垕公)만사(挽朗山李公垕)」도 망인 이후공을 생각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란 ‘만장(輓章)이라고도 한다. 만(輓)이란 앞에서 끈다는 뜻으로 상여가 떠날 때 만장을 앞세워 장지로 향한다는 뜻에서 만장이라고 부르며, 망인이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하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친척이나 친구가 죽으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만가(輓歌)라고 했으며, 옆에 따르던 사람이 받아 기록한 것이 만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만사의 내용은 망인의 학덕·이력·선행·문장·직위 등에 대한 칭송과 망인과 자기와의 친분 관계 등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후공의 학덕과 모범적인 삶을 칭송하고 있다. 선비로서 ‘공처럼 법도를 잘 지킨 이가 없다’는 고백을 통해 망인의 덕을 찬양하며, 선비의 기풍으로 깨끗하게 살아왔던 이후공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공에 대한 만락헌의 마음은 다음 제시하는「제낭산이공후문(祭朗山李公垕文)」이라는 제문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이공(李公)은 천지의 기(氣)가 모여 태어났고 비롯된 연원(淵源)이 있었습니다.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문덕(文德)을 발휘하여 명성이 퍼지니 노상의 행인도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나처럼 어리석고 졸렬한 것도 문 닫고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항상 채침(蔡沈)을 책망하는 글을 외었으나 식형(識荊)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위의 작품「만낭산리공후(挽朗山李公垕)」 3-4행에서 국난(國難)의 시대적 불행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 상황이 ‘위기일발의 지경에 놓였는데 누가 맡으라고 떠나셨냐’는 하소연은 같은 시대적 불운 속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지사(志士)로서의 공통적인 아픔을 토로한 것이다. 만락헌 자신도 민족수난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존경하며 뜻을 같이했던 지사 이후공을 떠나보내며 이러한 역사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슬픔에서 벗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 ‘눈물을 훔치며 만류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만락헌의 정서를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만락헌문집」에 보면, 만락헌은 이 외에도 직당 신현국(直堂申鉉國)을 비롯한 21명의 만사(輓詞)와「제금계선생문(祭錦溪先生文)」, 「제매서손주서종하문(祭妹婿孫注書鍾夏文)」, 「제춘계정형운목문(祭春溪鄭兄雲穆文)」등의 제문을 지어, 망인의 학덕이나 선행에 대한 칭송과 자신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글을 많이 남겼다.
4. 결론
우리의 선비정신은 단순한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꾸준히 계승해온 인간정신이다. 그래서 ‘선비’는 유교적 관념이 만들어낸 고정된 틀이 아니라, 우리민족에게 큰 의미를 주는 정신적인 기틀이다.
본고에서는 만락헌 장석인의 문학세계를 살핌에 있어 선비정신을 중심으로 접근하였다. 작품 연구에 앞서 선비정신으로 살아온 만락헌의 생애를 살펴본 후,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선비정신을 조명하여 만락헌의 문학세계를 구명(究明)하고자 하였다. 특히 사군자 소재시와 학문과의 교유 관계를 통해 문학적 특성과 미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먼저 만락헌 장석인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석인(1863~1938) 선생의 자는 형중(亨中), 호는 만락헌(晩樂軒)이며, 본관은 단양이다. 그는 1863년 경상북도 문경군 동로면에서 장종화 공과 강릉 최씨 사이에서 1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영민하고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수련에 전념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까지 되었다.
그의 부친 장종화 공은 그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여러 차례의 빈민 구제 사업을 벌였다. 만락헌도 부친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1896년부터 항일의병에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이와 같이 만락헌은 선대(先代)들이 보여준 나눔의 삶을 실천에 옮겼으며, 애국 애민으로 살아온 선비이다. 1910년에 국치(國恥)를 당하자 관대(冠帶)를 버리고 스승인 화서학파의 금계 이근원 선생의 강학소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로 이주하여 금계 이근원을 비롯하여 광암 이규현, 신현국, 이민응, 낭산 이후(李垕) 등과 학문적 교류를 많이 가졌다.
1920년에는 흉년이 들자 이를 이용하여 양민들을 수탈하려는 일제에 항거하여 사재를 털어서 구휼미(救恤米)를 지급하였다. 또한 식산(殖産) 주식회사와 일제에 의한 양민들의 수탈을 막고, 농촌진흥을 목적으로 조직한 기동보린사 등에 참여하여 빈민구제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애국지사 광암 이규현을 비롯하여 의암 유인석(柳麟錫) 의병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이병덕(李炳德) 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가족들 전체를 돌보았다.
만락헌은 항일의병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항일의병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돌본 것은 명백한 항일투쟁이다. 만락헌은 외세가 조국을 강점하고 민족을 짓밟았던 격동기에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고 인(仁)과 의(義)를 실천한 진정한 선비이며 애국지사였다. 역사적 전환기와 민족수난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조와 의리를 지키며 애민(愛民)을 실천해온 만락헌은 1938년 10월 5일 향년 76세로 별세할 때까지 선비정신으로 일관해 왔다. 만락헌의 생애는 선비의 표본이요, 애국지사의 발자취였다.
다음 2장에서는 선비의 개념과 선비정신에 대해 살펴보았다.
선비는 고상하고 어진 인품을 가진 자로서 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자이다. 예절과 의를 존중히 여기고 지조와 강인한 의지를 소유한 자로서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진 자이다. 동시에 역사적인 의식을 가지고 정도를 구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수양을 위해 궁구하는 자이다. 그래서 사회와 이웃에게도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도의 실현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섬기는 삶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선비인 것이다.
선비를 선비로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은 선비가 지닌 이념과 가치규범을 전제로 하는 선비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선비정신은 온화한 기상에서 어진 덕성(仁)의 화평함을 보여 주며, 뜻을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과 덕을 쌓아 올바른 길로 지조를 지켜 살아가려는 정신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만락헌이 의리와 지조를 지켜 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바른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선비정신이야말로 만락헌이 민족의 수난기에 외세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애국 애민을 실천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3장에서는 지조와 의리를 중시했던 만락헌의 선비정신이 그의 문학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사군자, 스승과 친구, 학문의 교유 관계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매(梅), 난(蘭), 국(菊), 죽(竹) 사군자를 소재로 하여 지조와 절개를 나타내는 사군자시(四君子詩)가 많았고, 스승을 존경하며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자의 공경심이 담긴 작품들과 의리를 바탕으로 교유 관계를 형성하는 작품들이 만사(輓詞)와 함께 많이 남아있었다.
사군자의 고결한 속성을 닮아가려 했던 만락헌은 사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한시로 읊어 칭송하였는데 이것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사군자를 통해 학덕이 높은 성현이나 인물, 친구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는 내면 성찰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덕성 함양과 선비정신이 삶의 방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고는 이상의 연구를 통해 만락헌의 작품에 나타난 선비정신을 파악했으며, 사군자 소재 시와 학문과의 교유 관계를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만락헌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문학세계를 구축해 갔으며, 선비의 표상이요 군자의 상징인 사군자처럼 지조와 의리로 살아왔던 그의 삶이 문학 작품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것이 만락헌 문학의 특징이며 가치임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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