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해운대 051병기탄약창에서 '60년대 초반에 군대생활을 한 순담 최건차 목사님의 글 입니다.
해운대해수욕장 송림공원에 주둔했던 051병기탄약창(줄여서 051탄약창) 병사의 사진..1961년7월
동백섬 갯바위에서 송림공원 방향으로 촬영..
051탄약창은 '60년대 초중반 우동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60'년대 후반 좌동지역으로 이전..
'90년대 중부지방으로 이전.. 그 자리에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
해묵은 바닷가 사진 한장을 본다. 1961년 7월 어느 날 군복을 벗고 수영복 차림이었다. 부산 해운대 동백섬
에서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숱한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 한 장면을 연출하려고 돌출된 바위에 오르려다
날카로운 조개껍질에 발가락을 베고 말았다. 피가 나는 발을 손수건을 찢어 동여매고 멀리 푸른바다를 향해
서있을 때 발에서 베어 나온 피로 갯바위가 얼룩졌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특5성급 부산웨스텐조선호텔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들어서 있다. 보고 또 봐도 꿈만 같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런
갯바위가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알 수 없게 됐다.
동백섬은 해운대 백사장에 연결되어 있는 동남쪽 끝자락이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이 반세기 전 동백섬을
이야기해 줄 보따리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보이는 곳에는 내가 군복무를 시작했던 051병기탄약창부대가
주둔했었다. 갯물과 민물이 교차해서 흐르는 건너편에는 갈대로 지붕을 한 ‘운촌’이라는 그림 같은 해변마을
이 있었다. 그 옆 벌판에는 4.19로 서울을 떠나게 된 사람들이 브라질로 이민을 가고 이곳으로도 내려와
판자 집을 짓고 난민들처럼 살기 시작했다. 그곳을 현지인들은 ‘브라질’이라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 나는
4.19혁명을 심하게 치룬 후에 곧바로 입대한 후라 부산영도 피난시절과 서울 삼양동 이주민으로 살던 때를
떠올리며 연민에 빠졌다.
해운대 바닷가는 미개척지였고 동백섬은 해송이 우거진 비경의 장원(莊園)이었다. 더 없이 아름답고 평화
스러운 곳이었지만 군대는 기합이 고질화 돼 있었고 상급자들의 부당한 구타가 심했다. 부대에서 주는 밥
으로는 배가 고팠는데, 부대에 전출된지 며칠이 되지 않은 어느 금요일 날 외출증을 내주면서 부대에서 밥
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군 부대에 배속된 우리중대는 탄약작업이 없을 때에는 주중에도 전원 외출을
보낸다는 것이다. 수중에 돈이 없어 어슬렁거리다가 취사반장에게 붙들렸다. 여기서 심부름을 하면서 먹고
지내라는 말에 첫 외출을 취사장 사역병으로 보내고 말았다.
해운대 백사장을 끼고있어 경치도 좋고, 모든 시설은 미군들이 사용했던 그대로여서 편리하게 되어있었다.
다수의 군속과 민간노무자들까지 출입하는 관계로 매점도 있고 다방에서는 팝송을 틀어놓고 아가씨가 커피
를 팔고 있어 내 마음을 유혹했다. 밤마다 불침번을 서면서 무연탄에 흙을 섞어서 때는 난로불을 꺼뜨렸을
때는 고문관으로 취급받아 기합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함께 온 동기생과 교대를 할 때면 바로 옆
철조망을 얼른 기어나가 빵과 음료수로 빈속을 채우는 게 상수였다.
특히 식당에서 주는 밥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밖에 있는 가게로 돈을 부쳐다 놓고 밤중에 몰래나가 빵을
사먹곤했다. 그런 요령이 통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빵을 사먹으려고 철조망 개구멍으로 머리를 디밀고
나가려다 뭐가 머리에 꽝 부딪쳤다. 눈에 별이 보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들어
오는 내무반 열외 하사였다. 나는 죽었구나했다. “야! 이런 졸병새끼 봐라 누굴 받는 거야”라며 발길로
차고 쥐어박는 대로 몇 대를 얻어맞았다. “불침번을 서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파서 빵 좀 사먹으려고 나가
는 중입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자 크게 선심을 쓴 듯 “좋다! 가서 사먹고 내 몫을 챙겨와라”며 보내
주었다.
한 달 쯤 지나서였다. 라오스에 분쟁이 일어났다고 탄약을 실어내는 작업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미군
부대와 계약을 맺은 민간트럭들이 탄약고에 있는 로켓탄을 실어다 동백섬 앞에 정박 중인 미군선박에
옮기는 작업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중대 본부 앞에서 민간트럭을 타고 탄약고에 들어가 로켓탄이 2발씩
들어있는 상자를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차량이 계속 들어오는 통에 쉴 틈이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다음날 밤 로켓탄박스를 트럭에 올리려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하루 밤을
편하게 보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꾀를 부렸다고 더 못살게 구는 통에 군대생활을 그만둘 작정을 했다. 함께 온 동기에게
“우리가 이런 군대 생활하려고 지원한 게 아니잖니, 이게 군대냐 기합 받는 노무자지”라고 그를 설득하여
탈영을 모의했다. 다음 날 아침 인원 점검을 마치고 승차하는 순간 우리는 옆에 있는 변소에 각자 빠른
동작으로 몸을 숨겼다.
들키면 배가 아파서라고 변명할 참인데 트럭들이 그냥 다 떠나고 말았다. 사방을 둘러보고 낮은 포복
으로 철조망을 벗어나 동백섬으로 뛰었다. 밤이 되면 해운대를 빠져 나갈 생각으로 커다란 갯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들었다. 얼만큼 잤는지, 큰파도가 밀려와 덮칠 것 같은 환상에 소스라쳐 잠을 깼다.
그러는 순간 지옥의 사자 같은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놀라 옆에 친구를 깨우고 있을때, 카투사에서 왔다
는 제대말년의 내무반 통신병이 찾아왔다. “야, 너희들 때문에 비상이 걸리고 사방으로 찾아다니느라
야단났다.헌병들에게 잡히면 바로 영창이야. 좋게 대할때 따라와라”라며 우리를 데리고 중대본부로 갔다.
중대장이 왜 무단이탈을 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지원해서 입대를 했는데 노무자처럼 일만하면서 기합
받는 게 싫었다고 했다. 중대장은 품위가 있고 신사적이어서 우리의 일시적인 과오를 용서 해주고 각각
다른 곳으로 보내주었다. 고등학교시절 야구선수였던 동기생은 영천 병기탄약사령부로, 나는 백사장 한
가운데 있는 수송부로 보내졌다. 수송부는 이전 중대보다 더 심했다. 매일 밤 팬티바람으로 줄 빳다를
맞는 게 다반사였다. 참고 적응하기 위해 매주일 해운대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소장이 동백섬을 찾아 일박을 하고 떠났다. (이때는 극동호텔이 생기기 전입
니다) 얼마 후에 우리 수송부 차량 수십 대가 동원되어 부산 부두에서 서울 한국은행까지 내용을 알 수
없는 나무상자를 운송했다. 알고 보니 그것이 ‘독립문’을 ‘득립문’으로 ‘한국조폐공사’를 ‘한국조페공사’
로 영국에서 잘못 인쇄되어 새로 나온 화폐였다.
해운대가 모양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백사장을 정비하기위해 우리 부대가 우동 안쪽으로 옮기고 해수욕장 길가에 해송을 심기 시작했다.
그 소나무들이 싱싱하게 잘 자라 그 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수송부 옆에는 미군609탄약 중대가 있었다. 거기에서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
그리고 카투사들의 멋진 유니폼에 자극을 받아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카투사로 왜관과 대구에서
더 멋있게 복무하다가 장교가 되어 전방 근무와 월남전을 마치고 해운대 동백섬 부두를 관리하는 중대장
이 되었다. 이등병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했던 곳이라 금의환향한 기분이었다.
해운대는 내 꿈이 펼쳐진 곳이다. 조각상 같은 인물사진 뒤로 있었던 그림들의 현장을 연전에 찾아가
봤다. 허름한 집들은 흔적도 없고 호텔과 유락시설들이 빌딩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도 소나무들은
갯바람에 청청한 가지들을 너울대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끌어안아도 보고 매만지면서 한참을 그 시절의
환상에 취해 있다가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봤다. 5.16이 나고 박정희 장군이 부산에 내려와 하루 밤을
묶었던 별장은 없어지고 그 아래 물가에는 인어공주가 살포시 앉아있었다.
신병시절이었던 1961년 1월 중순 부대를 이탈하여 숨어 있다가 붙잡혔던 곳에 가보았다. 놀랍게도 그곳
에는 <누리마루>라는 특이하고 멋있는 건물이 세워져 2005년에 제13차 APEC 정상회담이 열린 것이다.
지금은 부산의 랜드마크가 되어 동백꽃 길을 따라 풍광이 좋은 해변의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가하게도 내가 잠간 서서 포즈를 취했던 곳, 또 숨어 있었던 곳이 세계적인 명소로 변했다.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어 서운하면서도 한편 감개무량했다. 지금도 내가 마음을 두고 자주 가는 곳에서는 해운대
동백섬에 버금가는 현상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것 같아 케돌베이커
주연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누리마루>을 둘러보고 수영만 쪽으로 있는 ‘종덕원’이라는 고아원과 탄약운반선 선착장이 있었던 곳
으로 가보았다. 1970년 베트남에서 개선 귀국하여 선박중대장으로 관활했던 곳이다. 이등병으로 시작
했던 곳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동백섬에 금의환향 하였다고 해운대지인들과 교회친구들이 환영해 주고
자주 찾아와 주었던 곳이다.
어느 날 밤 철조망 앞에서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쁜 딸이라 아들만
둘인 해운대에서 맺은 의형께서 키우게 해주었다. 여유가 있는 집이라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을 가서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백섬은 시련 속에서도 환희와 영광을 안겨주었던 나만의 장원으로, 그리고 거기에 세워진<웨스턴조선
호텔>과 <누리마루>는 그 시절을 회상케 하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첫댓글 저는 동백섬 도로 내기 전의 첫 사진은 처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