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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문학적 기능과 신학적인 주제
성경을 어떤 식으로 읽을 것인가?에 관한 방법론적인 접근을 알아봅니다.
창세기, 탈출기,...그리고 신약의 복음서를 포함한 성경을 읽어갈때 두 가지 방법으로,
글로 쓰여졌기에 문학적인 접근과 신학적인 접근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성경을 이해하고 저자가 의도하는 신학을 이해하게 되고,( 성경독서 : 1 내용이해, 2 쓴 저자의 신학적 의도 이해( 저자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누구이냐?'), 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세 번째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를 알고자 하는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다.
두번째인 저자가 이해하는 하느님을 아는 선상에서 멈춘다면 단순히 지적호기심을 채우는 것밖에서 되지 않을 것이다.
* 성경에 관한 지속적인 이해를 넘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 들어야 한다.
" 성경을 통한 나의 체험과 고백은 성경 저자의 고백과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 체계적인 부분과 사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부분, 활자화 되어 다른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다른 무게가 있을 수 있다), 사상과 질문의 가치는 서로가 동등하여 우열을 나눈다는게 무의미하다.
지금껏 강의에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서 저자가 '하느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느냐? '의 문제를 이 이야기가 본래의 전승에서 또는 편집된 차원에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층을 나누면서 알기쉬운 방법으로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춘다면 의미가 없을것이고, 문학적 신학적 이해한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성경텍스트를 통해서, 우리가 지닌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말씀하시는 가?이다. 이것을 '기도'라고 하며,
그 텍스트가 나의 기도가 될수 있는지에 관해 맞닥뜨리게 된다.
* " 하느님께서 성경원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 듣는 좋은 방법은 기도이다."
그에 관해 두 가지 개념 중 하나인 묵상(meditatio,라틴어로 메디타시오)은 성경텍스트를 통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라는 기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한단계 더나아간 관상(contemplatio, 라틴어로 콘템플라티오)이다.
관상이란? 나의 의지를 절제하는 것, '주님,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 나의 의지를 절제하고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해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 쉽지않은 단계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분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관상을 하려는 것 조차도 나의 의지이기에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라고 하심)
- 자신의 의지로 가능한 것은 묵상이고, 그 묵상을 위한 외면적인 태도는
1. 침묵하라( 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들과 접하게 된다. 그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음악 혹은 묵주기도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성서구절을 읽으면서도 내게주시는 하느님 말씀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는 독서를 멈춰야 한다.오래 걸리겠지만 더 의미있는 방법일 것이다.
2. 마음에 와닿는 구절에서 멈추라
- "비록 성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나를 위한 말씀임을 깨닫고 묵상하고자 또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요셉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기능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요셉이야기(성조사의 문학적 기능)
* 어떻게 그들이 이집트로 가게 되었는가?
- 팔레스타인(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살던 그들이 어떻게 이집트로 가게 되었는가?
- 요셉 이야기는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준비한다
- 요셉 전의 인물들인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 그리고 바벨탑 사건..으로 원역사(창세기 1-11장)의 문학적 기능은?
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이고 성조사의 결론인, 요셉이야기에서 왜? 이집트로 가게되었는지에 관한 문학적인 기능들을 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우연이라 느끼는 많은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것들이라는.
* 의인의 전형(prototype)
- 의인의 전형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아브라함 - 이사악 - 야곱 -요셉)
- 구약 성경에서 의인의 개념은? 토라를 잘 지키는 사람(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에서도 유다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처럼, 다윗이 우리야를 죽게하고 나탄예언자가 나타나 비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즉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 토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윤리와 도리이며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과 폭을 제시한다( 폭의 제한의 예로 '종이 잘못하면 때려도 좋다. 하지만 죽이지는 말아라. 눈이 하나 다쳤을 때도 , 하나만 멀게 해라!)
- 성조들은 토라를 알지 못했다( 탈출사건을 통한 탈출기 이후에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들, 하나의 법만있는 것이 아닌 모세오경의 전체가 얘기하고 싶은 본질적인 부분이 그러한 법에 관한 것이다. 탈출기 20장에서 부터 등장하는 계약의 법전, 레위기를 중심으로 탈출기 후반부와 민수기 10장까지 등장하는 사제 법전, 신명기 12장-26장까지 등장하는 신명기 법전) 모세오경을 읽는 우리는 이야기 부분에 신학을 읽고 이해하고자 하지만,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법전이다. 어떻게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하지만 그들이 성조라 부르는 이들은 그 법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을 지켰다.( 그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오늘날 신학안에서는 이를, 하느님을 모르고도 교회의 신자가 아니고도, 자연법에 충실하고 양심( 하느님이 창조하신 하느님의 모상의 기억)적인 인물들이었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성조사의 결론 : 축복의 전승
- 하느님의 축복이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 거류민에 힘도 없는 성조들, 하느님의 축복을 지킨 그들
* 인간의 불행과 구원 계획(?) - theodicy(테오도시)
- 요셉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정론(神正論),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
- 인간의 판단에서 오는 좋은 것과 나쁜것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이끄신다.라는 의미
- theodicy는 ?
* 1710 Gottfried Leibniz (고프리트 라이프니츠, 1646~ 1716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가 이야기 한것으로
* Omniㅡ benevolence : science; potence ( 옴니 베네볼렌스, 옴니 사이언스, 옴니 포텐스)
- Omni- benevolence (전선,全善 ) 전적으로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선이
- Omni - science (전지,全知 )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이
- Omni - potence ( 전능, 全䏻) 전적으로 갖고 계신 하느님의 능력
- 전지전능(전선은 쓰이지 않고)하신 하느님을 신학자가 지닌 신학적인 입장에서 변호하는 말로서 '우리눈에는 좋은 것과 나쁜것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이끄신다.'라는 의미의 theodicy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부딪힌다.
신정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데 있다. 우리의 결정,decision으로 인해 우리의 역사가 하느님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하느님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라는 의미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적인 반성이다 - 하느님께로 가까워지는 길인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인가?( 우리가 처한 사회에서)
덧붙여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커다란 신뢰를 갖고 있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근래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지나치게 낙천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을때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인간은 손을 놓은 채 방관했더니, 오히려 탐욕스럽고 더 나쁜? , 타락한 모습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양상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것을 하느님께 맡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희생과 봉사로 헌신할 때 세상이 겨우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는 체험이 신정론을 신학적으로 반박하는 이유가 된다.
성경의 요셉
* 시편 105,16-23
* 집회 49,15
* 1마카 2,53
* 지혜 10,13 이하
* 사도 7,9-16
* 히브리어 11,21 이하
-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조금 다른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위에 언급된 성경의 저자가 요셉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수한거다!
라는 의견과 요셉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외에도 다른 버전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라는 두 가지의견으로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가 큰 흐름은 같지만, 정확히 전달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시편 105,16-22
땅에 기근을 불러 일으키시고
모든 양식을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사람들이 족쇄를 그의 발에 채우고,
쇠사슬을 그의 목에 감았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
주님 말씀이 그를 증명해 주시니
임금이 사람을 보내시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을 다스리는 이가,
그를 놓아 주었다.
그를 자기 집의 주인으로,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스리는 이로 세워,
신하들을 마음대로 가르치고
원로들을 슬기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시편 105,16-22
: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전하는데, 유대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면서 요셉에 관하여 가장 많이 이야기 한다. 유다인들이 기억하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이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인데, 정작 역사안에서는 요셉에 관해서, 요셉사건의 중대함을, 나약한 요셉을 이렇듯 만들어 놓으셨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이 부분의 뒤부분에서는 탈출기에서 열가지 재앙에 관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것에 대한 찬미의 내용으로 105편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요셉의 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을 해주셨지만, 가장 중심적인 테마인 이스라엘의 형제적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가? 라는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충실했던 요셉을,,
'그를 자기 집의 주인으로,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스리는 이로 세워(시편 105,21)
신하들을 마음대로 가르치고,
원로들을 슬기롭게 만들도록 하였다(시편 105,22)
의 주인의 위치로 만드시고, 토라의 이야기가 숨겨졌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는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
집회 49,15 :요셉
요셉과 같은 사람도 태어난 적이 없으니
그는 형제들의 지도자가 되고
백성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유골을
정성스럽게 모셨다.
- 창세기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창세기에서는 요셉이 하느님께 충실성을 부각해 설명하는데, 집회서에서는 그 충실성을 의미상 '지혜'로 전환해 말하고 있다. 여호수아기에서 요셉의 유언대로 스켐에 장사를 지내는 내용과 이집트를 나올때에도 요셉의 유골상자를 챙겨나오는 모습.
1 마카 2,49-54 (마타티아스의 유언)
지금은 교만과 냉소가 득세하고 있다.
멸망의 때며 격렬한 분노의 때다.
애들아, 이제 너희는 율법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고,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
우리 조상들이 그들 세대에 하였던 일들을 기억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큰 영광과 영원한 이름을 얻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련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켜,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받지 않았느냐?
요셉은 어려운 때에도 계명을 지켜,
이집트의 주인이 되었고,
우리 조상 피느하스는 불타는 열성 덕분에,
영원한 사제직의 계약을 받았다."
마카베오 상권 2,49-54 : 마타티아스의 유언과 죽음(전반부의 이야기)
- 마타티아스 : bc 167년부터 셀레우코스왕조의 폭정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다. 유다 마카베오의 아버지.(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 성전 침탈)
- 많은 이들은 이스라엘이 감히 셀레우코스왕조와 대결하여 전쟁을 일으켰을 때 승리할 가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놀랍게도 마카베오 혁명이 서 너번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고, 셀레우코스왕조가 전쟁에 졌다는 이유에서가 아닌, 내분으로 인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마카베오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서 인정해준다. 이 왕조가 하스모니아 왕조이고, 그 혁명을 주도했던 유다 마타티아스가 남긴 유언
-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안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 의롭고 계명을 지키는 이들로 아브라함, 요셉, 피느하스를 기억, 등장하고 이사악과 야곱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 하느님의 축복을 지켜가는 방법으로 서론 그리고 역사적인 예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성경을 통해 지금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리고 그를 전하는 몫또한 우리에게 있음을 느낍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