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의 기억-모진 세월을 버텨낸 전수양(여, 1938년생)씨
2020.02.12.
경남 거창이 고향이다. 20세에 정종석과 혼인하여 거창읍내에서 제과업을 했다. 사업이 망하자 32세에 평택으로 올라와 원평동에 정착했다. 평택에서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실업자가 된 남편과 뇌성마비 아들과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목욕탕 매점운영, 채소장수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친정은 어디세요?
나는 경상도가 고향이예요. 경남 거창이예요.
거창은 양반고장으로 유명한데 평택에는 언제 오셨어요?
32살에. 거창에서 20살에 혼인하고 왔어요. 그 전에는 19살만 넘으면 노처녀라고 했어.
바깥 어르신 함자는?
정종석.
자녀는?
4남매인데 하나는 죽고 셋 남았어요. 딸 둘 아들 하나. 뇌성마비로 19살에 죽었는데. 그 애 때문에 고생 무지하게 했어요. 나라에서 혜택도 없을 때고.
아드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정말 힘드셨네요?
그렇지.
거창에서는 무엇을 했어요?
제과소 했어요. 거창 읍내서.
무슨 과자를 했어요?
샘배, 빵, 사탕, 비슷켓 다 했어요. 그 장사가 계산하면 남는데 나중에 동업을 해가지고 잘 안됐어요. 그것도 시댁으로 추석 쇠러 가더니 우리 동서가 딴 사람들 그거 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같이 하자고 해서 시작했어요. 그 당시 내가 일수를 하고 있었는데 잘 돼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하게 됐어요. 그런데 일수는 잘 되기는 해도 자꾸 돈이 떼어요. 옛날에는 외상이 많아서 수금하러 다니고 안 되면 떼이고 그랬거든. 5천원을 일수 주면 5백 원이 남아요. 열 집 주면 5천원이 되고 그것으로 또 일수 주고. 그런데 2만원, 3만원 큰돈을 주면 잘 안 주더라고.
그럼 제과소 하다가 망했어요?
우리 친정아버지가 암에 걸렸어요. 우리 친정이 부자였는데, 아버지가 그래요. ‘너희 빚이 얼마냐, 집은 그냥 놔두고 입만 달고 내게 와라’ 그랬어요. 그 말을 듣고 우리 남편이 집을 팔아버렸어요. 공장하던 집인데 방이 6칸이고 무척 커요. 공장하던 집을 팔고 평택으로 올라왔어요.
그러면 공장 실패하고 친정아버지 권유를 받아서 평택으로 올라온 거네요?
당시 평택에 시누이 남편이 살았어요. 시누이 남편은 우리 올라왔을 때 서울로 올라가고 딴 사람이 중개를 해서 전구를 가져다 보급하는 도매상을 했어요. 대전에 공장이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전구가 불량이 많고 외상만 나가고 돈도 안 벌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안 되겠다 싶어 장사를 나선 거예요. 아이고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채소장사, 과일장사, 장사로 돌았어요. 우리 바깥양반은 사업을 그만두고 애(뇌성마비)를 보라고 하고 내가 나선거지. 그것도 남편이 술값 안 주면 애를 안 봐요. 돈을 주면 그것으로 술집 가서 윳 놀고 술 먹고 그랬어요. 속 터진 것 생각하면.... 소설을 써도 한 권은 될 거예요.
어르신은 주로 무슨 장사를 했어요?
수박 같은 거 차로 끌고도 다니고. 머리를 잘 썼으니까 (예산)신례원이나 이런데 가면 하우스를 해요. 채소, 참외, 수박하우스 하는 것을 밭으로 사서 서울에다 판 거예요. 청량리나 문래동 같은데요. 리어커를 끌고 다니고 안 한 것이 없어요.
리어커로는 무엇을 했어요?
야채장사 채소장사를 했어요. 한 50년은 했을 거예요.
야채장사를 어떻게 했어요?
식당을 돌면서 파는 거지. 그런데 전화가 나오니께 식당에서 전화로 가게에 주문을 해요. 상회에서 공급하니까, 그 때부터 장사가 안됐어요.
가게할 생각을 안 했어요?
저는 가게를 안 했어요. 그냥 밭떼기로 사서 용산시장에 팔았어요. 용산 청과시장이 나중에 가락동으로 갔어요. 밭떼기 잘못하면 망해요. 어떤 때는 작업꾼들 임금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요. 남을 때는 폭 남고 하니까 살았지. 배추 말이죠, 이렇게 들어서 실으면 팔 빠져요.
계절로는 언제 많이 나와요?
봄가을에 많이 했죠. 하우스는 겨울에도 하지만. 겨울에는 창고에다가 사과를 사서 쟁여 놓고 그걸 사서 가게를 내서 팔고 도매도 하다가 남는 것은 리어커로 싣고 다니며 팔아요. 목욕탕에서 커피 타주고 그런 것도 했어요. 안 될 때는 여관 청소, 사무실 청소도 하고 안 한 것이 없어요. 새끼들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했어요.
장사가 늘 잘 되는 건 아니죠?
장사라는 게 잘 될 때는 푹 잘 되고 안 될 때는 팍 밑져요. 그러면 여관청소도 하고 커피도 팔고 했어요. 우리 여섯 식구가 있으니까 쉴 수가 없어요. 내가 소설을 써도 한 권을 쓸 꺼예요.
장애인 아들 때문에 더 힘들게 일했네요?
집에서 내가 아니면 돈을 벌 사람이 없어요. 장애인 애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그 애가 뭔 죄가 있어요. 내가 계를 모아서 돈을 타가지고 서울로 가서 금침을 맞게 하고. 커피를 팔아서 12명이 계를 묶어서 뭉칫돈을 갖고 고쳐보려고 다녔어요. 이제 애가 죽으니 눈이 침침해서 일을 못해요. (동네 어르신들) 저 양반은 딸들을 잘 뒀어요. 잘 삭고 엄마도 귀하여 위하고.
평택에서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아이구 말 말아요. 목욕탕에서도 장사했지. 애들 어릴 때 사과 배, 김밥, 계란도 삶아 놓고 잡채도 하고 별거 다 했어요.
어떤 목욕탕에서 장사했어요?
제일목욕탕. 명동골목에 있는 거. 그런데 요구르트 같은 거 나오고 하니까 주인들이 하겠다고 하더라고. 여름에는 안 되면 채소장사도 하고 별거 다 했어요.
이 동네서는 언제부터 살았어요?
우리는 높은들에서 살았어요. 지하도 옆에 원룸 많은 데 거기 살아요. 집을 사 놓았는데 원룸이 생기니께 그늘지고 안 좋네. 서울 방앗간 있는데 뒤에 미장원하고 붙었어요. 거기 노인정이 없어서 여기로 놀러와요.
높은들에는 어떤 분들이 살아요?
원주민들이 많아요. 농사짓는 사람도 많고.
높은들은 농사가 많았네요?
거기는 옛날부터 있던 동네라 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동네는 작아도.
자녀분들은?
우리 애들이 똘똘해요. 3남매 뒀는데.
아들은 뭐하세요?
아들은 작은 딸 사업하는데서 일해요. 회사는 작년에 그만뒀어요.
작은 딸은 어디서 사업해요?
인천에서 하는디 상가가 두 개예요. 큰 사위는 군(郡)농협에 있고. 지금은 시청 쪽으로 갔어요. 딸들이 잘해요. 용돈주고 병원 데려가고, 자주 와서 청소도 하고 잘해요. 이번에 병원에 몇 달 입원했어요. 죽네 사네 하다가 퇴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