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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떨림을 감지하는 순간들
최은묵
강재남, 「슬그머니」(『모던포엠』, 2019년 12월호)
이 필, 「스포일러」(『문학사상』, 2019년 12월호)
이효림, 「M은 진행 중입니다」(『현대시』, 2019년 12월호)
희 음, 「밤비닐」(『시로여는세상』, 2019년 겨울호)
김사리, 「고래의 방」(『애지』, 2019년 가을호)
예민한 언어는 파문이 되지 못한 진동까지 잡아낸다. 미세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시인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고 마침내 그 떨림에 이름을 붙인다. 그런 끝점에서 발생한 현상이 시인의 경험과 버무려질 때 탄생한 문장은 새로운 생명체로 기록된다. 흔히 ‘사유’라고 하는 폭넓은 세계에서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기까지 시인이 기다릴 오랜 시간은 결코 기술적인 연마로 습득하기 힘든 과정일 것이다.
감지하지 못한 진동으로 만든 문장은 허상이다. 타자의 사유를 훔쳐 마치 스스로 체득한 감각인양 조립하는 사람들의 문장까지 시라고 불러야 할까? ‘무엇과 유사한’이 지닌 힘은 무기력할 뿐이다.
속으로 품어 녹인 떨림이야말로 고유한 가치다. 그러니 ‘무엇과 유사한’이란 발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질은 결국 ‘유사한’인 셈이다. 사육되지 않은 언어는 스스로 숨을 쉰다. 내면에 옹알이처럼 머문 것들이나, 틀에 갇힌 언어들의 짧은 생명력은 유혹적이긴 하지만 생명력이 짧다. 짜릿하고 쉬운 순간의 유혹 대신 우직하게 내면의 소리를 퍼 올리는 시인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런 시인들의 전언에 귀를 기울이는 일과 자생능력을 터득한 문장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그 묵직한 걸음을 지켜보는 일은 설렘이다.
시인이 감지한 떨림은 내면을 거쳐 표출된다. 이때 ‘내면’은 시적 가치와 상통한다. 단순히 자아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적 현상의 어느 접점에 다다를 때 떨림은 사방위로 폭발한다. 그것이 시의 힘이다. 때로는 사회적 현상에, 때로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완성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통증에, 위로에, 그늘이나 바닥에 접근하는 방식이 시인마다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조금 더 먼 곳에서 조금 더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시인들 중에서 다섯 편의 작품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오늘의 구름을 자네에게 보내네. 뭉클한 기운이 계절을 건너고 그러는 동안 꽃이 피는 순간을 이해하기로 했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이 구름의 발성법으로 소리를 내더군. 노래를 불러주세요 기꺼이 앵무새가 되어주세요. 바람이 놀다간 자리에 비밀이 풀리고 있었네. 비밀을 다시 감아야 하는 자네는 술래이면서 숨어야하는 사람이라네. 어제를 뭉치니 어제가 되더군. 어둠은 삼켜도 어둠이었지. 말린 어제가 어둠을 끌고 갔다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은 채 돌아갔다네. 그립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밤은 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하더군. 오늘을 넘기는 자네는 무슨 생각에 빠져있었나. 화살이 된 말에 심장을 찔리고 심장이 단단하고 심장이 반짝이고 그러는 동안 새가 날아오르는 순간을 이해하기로 했다네. 사이프러스 긴 팔이 날카로운 글자를 쏟아내더군. 날이 저문다 날이 저문다 중얼거리는 감정을 보았네. 잠시 자네라는 환유를 생각해봤네만, 누가 흘린 것인지 궁금하지 않았네. 지난여름 못다 쓴 글자가 문턱에 걸터앉는 걸 보고 있었을 뿐이네.
-강재남, 「슬그머니」(『모던포엠』, 2019년 12월호) 전문
강재남 시인이 보여준 “구름”은 빛을 차단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구름”이 덮인 오늘과 구름을 거둔 “오늘”의 간격은 “뭉클한 기운이 계절을 건너”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때 ‘뭉클하다’라는 형용사는 이 시의 밑그림일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흘려보내려는 듯 시인이 툭 던진 단어 하나가 지닌 무게감을 감지하는 순간, 이 시는 “슬그머니” 흔들림을 시작한다.
언뜻 개인적 갈등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적용의 방식에 따라 「슬그머니」에서는 세상과의 소통을 취하려는 동작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그건 차후의 문제다. “자네”는 한편으론 시인과 분리된 자아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론 시인이 추구하는 이데아와 상충하는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자네”가 내면과 내면의 은밀한 소통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인 ‘나’를 둘러싼 세상은 “구름의 발성법으로 소리를” 낸다. 구름은 빛을 변형시킨다. 구름의 속성을 이식한 소리는 난반사를 일으킨다. 축축하게, 흐리게, 어떤 어둠을 지닐 수밖에 없는 성질이다. 그리고 그런 성질은 “어제”와 등가를 이룬다. 주변을 왜곡시키는 작은 물방울 덩어리 앞에서 화자는 또렷하지 않고 뿌연 문제들을 능동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구름을 자네에게 보내”는 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유일한 선택이 가장 정확한 접근이란 사실은 “노래를 불러주세요 기꺼이 앵무새가 되어주세요”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적극적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어제가 어둠을 끌고”갔지만, 오늘은 오늘의 구름이 있다. 외부로부터 침투한 갈등은 무언가를 긁어버린다. “구름”으로 가린 곳에는 “비밀”이 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바람”이라는 힘이 작용하는 때이다. 이들은 모두 ‘주변’의 사물들이다. 구름 저편에서 날아온 어떤 말은 “화살”이 되어 “심장”을 찌른다. 그것은 분명 치명적이지만 끝은 아니다. “바람”이나 “새”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이 곁에 있는 한 “어둠”의 시간은 소멸될 것이다. “자네”라는 대상은 의도와 상관없이 찾아온 충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이클이 반복되는 동안 “자네”는 다양한 시적 떨림으로 변모한다.
바람이 구름을 몰아낸 자리에 “비밀이 풀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다. 그곳에서 찾은 “지난여름 못다 쓴 글자”는 아직 떨림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 흔적을 채우는 일은 이제 강재남 시인의 몫이며, 우리는 그것이 채워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면 될 일이다.
밤은 22개의 텍스트. 죽은 것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우울을 표절하는 시간. 초대합니다. 금요일 밤 11시, 안방극장의 영원한 비밀이 풀립니다.
달은 천 개의 비디오. 화려한 눈속임. 하루가 지친 날엔 빨리 감을 수도, 무음을 늘어뜨릴 수도, 공통적으로 우리는 스트리밍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던 70년대는
아기를 빼앗아 우물에 던지는 장면 같은 것. 이번에는 CG를 입혔어요. 육신이 거추장스러워 메모리에 모션만 남겼어요. 마루치와 아라치는 은퇴해 왕십리에서 태권도장을 한다니까요.
나이 사십에 노땅 취급이라뇨. 파란 해골 13호가 다시 돌아왔어요. 덩치는 커다랗지만 겨루다 보면 공통적으로 불쌍한 캐릭터. 손바닥에 올려놓은 프링글스처럼 우린 짭조름한 스토리를 좋아하잖아요. 약정 기간 없이 내내 이런 기분, 함께 채널 고정할까요?
뻑뻑한 눈가에서 젖은 모래가 흘러내립니다. 우기인가 봐요. 아스팔트에 녹은 무지개처럼 우리의 드라마는 어제를 품은 시리즈일 뿐, 따라잡을 수 없는 전편은 한밤의 맨홀로 빠져들고
우리는 몇 개의 역을 지나 강을 따라 먼 바다에 엔딩 크레딧 하게 될까요? 내일을 환승하는 침대가 삐그덕댑니다. 소음과 진동이 꺼지고 광고도 없는 꿈을, 미리 보고 있습니다.
-이필, 「스포일러」(『문학사상』, 2019년 12월호) 전문
내면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과 그 소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시가 지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것과 느낌을 선명하게 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줄거리나 결말을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가 사라지듯이 시 또한 그러하다. 먹는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음식이 있고 먹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음식이 있다. 시는 ‘음미(吟味)’에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기 위해 이필 시인이 준비한 “금요일 밤 11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죽은 것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우울을 표절하는 시간”은 현재를 중심으로 이 시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현재의 “우울”은 끊임없이 과거의 시간과 연결되고 있으며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는 기준점이 된다.
거대한 운명에 강력하게 맞서는 전사의 모습을 그린 「아포칼립토」나 지구의 왕이 되려는 파란 해골 13호를 물리치고 평화를 지킨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이필 시인의 「스포일러」에 얹는 것은 무리일까?
“마루치 아라치”와 “파란 해골 13호”의 상징적 대립은 “나이 사십”이라는 중간 지점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왕십리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동안 물리친 줄 알았던 “파란 해골 13호”는 운명처럼 삶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다. 청년기는 자아확립 과정에서 갈등의 주원인이 내부에서 발생한다고 볼 때, “사십”의 나이가 겪는 갈등의 주된 원인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운명을 누군가 미리 말해주면 “파란 해골 13호”라는 갈등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겠지만, 영화가 아닌 실제의 삶에서는 어느 누구도 “스포일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마흔 즈음의 “꿈”은 불완전한 떨림을 유발한다. 설렘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밤”이 아니라 “우울”의 현재가 지속될 것만 같은 “내일”에 대한 불안은 당연하다.
이 시대의 “노땅 취급”을 받는 “나이 사십”의 사회적 위치는 시인의 말대로 “금요일 밤 11시” 드라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고도 없는”, “우기” 같은 삶의 단편은 “채널”조차 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나이 사십”에게 “엔딩 크레딧”은 아직 먼 미래일 것이다. “우기”는 지날 것이고, “마루치 아라치”는 언제나 그랬듯이 “파란 해골 13호”를 물리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삐그덕”대는 “침대”에 누워있더라도 “내일”이란 오늘보다는 조금 덜 우울하고 조금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것이 이필 시인이 보여주고 싶었던 삶의 「스포일러」가 아니었을까?
1층은 2층을 찾습니다
M은 옥상을 희망합니다
M층은 망설이다 설탕을 뱉습니다
궁리는 중독입니다
계단은 팽창하고 있습니다
화살표는 계단을 타고
몇 번 주인을 갈아입고 혼자 걷는 피아노는
미래를 쭉 내밀고 길어집니다
일요일은 선생을 통과합니다
2층 그림은 진행 중입니다
그림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아노는 라라를 생각하며 지붕을 날아갑니다
짧은 혀는 긴 혀를 상상합니다
물리학은 비약비약 약진하는 중입니다
물고기는 휴지를 따라갑니다
사과는 뱃머리를 따라갑니다
2층은 상징을 따라갑니다
계속 진행 중인 발가락을 오늘은 따라 가볼 일입니다
한결같은 오후는 슬픕니까
M층은 한결같이 우유를 흔들어 먹습니다
민들레는 들레들레 노란 역사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시고 떫고 새까맣습니다
진행은 진행만 생각하고
머리는 전진만 우아합니다
오늘은 발가락만 따라 가볼 일입니다
-이효림, 「M은 진행 중입니다」(『현대시』, 2019년 12월호) 전문
이효림 시인의 「M은 진행 중입니다」에서 두 축을 이루는 두 단어는 “M”과 “발가락”이다. “M”이 불온한 떨림의 원인이라면, “발가락”은 불온한 떨림을 해결하기 위한 방향인 셈이다. 1행의 “1층은 2층을 찾습니다”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 혹은 ‘계층과 계층의 갈등’ 같은 사회적 갈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만약 “M”이 ‘남성-지배계층’을 지칭하는 비유라면 이런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다는 ‘유리천장’에 빗대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옥상”과 “계단”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담기에 충분한 단어다. 수평이 아닌 수직의 구조는 차별을 야기한다. 차이와 차별은 결코 동질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니 “설탕”처럼 순간 달콤한 말이나 조건은 사람과 사람의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 수단이다. 성별, 신분, 학연, 지연 등으로 계단이 바뀌고 높낮이가 형성되는 현상은 시인의 말대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런 불완전한 떨림은 “옥상”이 아니라 “1층”에서 감지할 수 있다. 사회의 “2층”은 변함없이 “1층” 위에 있고, 이러한 구조에서 비현실적인 요소는 철저히 소외될 뿐이다. 그렇다면 “1층”에서의 ‘꿈’은 정말 불온한 대상일까?
“상상”의 세계에서 “계단”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갈등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어김없이 발생한다. 만약 “라라”를 동화적 상징으로 제시했다면, “물리학”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다툼의 과정으로 더듬을 수 있다. “옥상”에 가까울수록 판타지나 동화가 소멸되는 세상에서 결국 “아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 수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떨림을 서둘러 전달하지 않고 재해석하기 위해 “일요일”은 “선생”이라는 틀과 규격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조건이다. 아주 작은 사소함까지도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계단”을 ‘한결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가. 이효림 시인은 그런 순간에 발생하는 불완전한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바닥 낮게 몸을 깔고도 노란 꽃대를 세우는 “민들레”보다 더 낮은 곳에서 “시고 떫고 새까맣”게 살아가는 일은 소외된 약자의 삶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몸짓이다. 그러니 “오늘은 발가락만 따라 가볼 일입니다”라는 고백은 얼마나 진지한가.
바닥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근원적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사다리”가 필요 없는 그곳에서 시인이 새롭게 만날 떨림이 무엇일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디지털수족관에 아이가 둥둥 떠 있다 수족관 앞에서 붉은 귀와 흰 귀가 펄럭인다 이야기를 주고받듯 그것들은 그곳에 오래 머무르고 아이 눈은 멈춰있고 심하게 둥글고 수족관에 든 물은 넘치지 않는다 밀리고 뒤집히고 낚이고 잃고 모두가 다정하게 웃을 수 있다 수족관 앞에서 키스를 나누고 수족관 앞에서 만삭인 배는 오목한 손의 사랑스런 리듬을 빨아들이며 알맞게 부풀어 오른다 양수가 흐르면 전화를 해 우리는 머잖아 만나게 될 거야
여자가 쓰러질 때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간을 만든다 쓰러지는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닿으면 옮는 거야? 누군가 물으면 누군가 끄덕인다 내려다보며 쉿, 쉿, 백색 전자 지느러미 같은 쉿, 쉿, 아이 눈은 멈춰있고 내내 둥글다 사람들은 보고 또 본다 부풀어 오르는 건 저 아이의 팔다리다 수족관 물은 넘치는 일이 없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여자는 떠올린다 언젠가 보았던 밤비닐 굶어서 부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썩은 선인장 같기도 했던 그것 저 정도면 적당하겠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밤비닐을 그냥 지나쳤다 여자만이 궁리한다 입구를 묶는 방법에 대해 여자는 웃지 않고 따라 죽지 않을 것이다 따라 죽는 밤 앞에는 기필코 밤 하나가 더 놓일 것이다 여자의 손으로 주무르는 밤 하나
-희음, 「밤비닐」(『시로여는세상』, 2019년 겨울호) 전문
“디지털수족관”은 가둠(수족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영상(디지털)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라는 점에서 새로운 질문을 제시한다. 실물을 가둬놓고 보는 것과 실물의 화면을 보는 것의 차이가 ‘진짜 같다’ 정도의 수준일까는 생각해볼 문제다.
희음 시인의 「밤비늘」에서 서사는 중요하다. “아이”와 “사람들”과 “여자”의 구조는 곳곳에서 갈등을 이어간다. 1연 ‘아이-여자’, 2연 ‘여자-사람들’, 3연 ‘여자-여자’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지닌 서사 안쪽에는 철저하게 개인과 군중이 대립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만삭인 여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이는 “디지털수족관”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존재한다. 어쩌면 “만삭”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세계를 품은 또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는” 디지털의 세계. 그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인간성이 상실된 세계에서 누군가의 고통은 공유되지 않고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족관 물은 넘치는 일이 없다”라는 표현은 외부 즉, 타인의 갈등에는 무관심한 사회적 현상을 비판하는 시도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범람하는 익명의 악성 댓글처럼 “디지털수족관”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중심으로 파생된 디지털 신호가 누군가에게는 잠시 거치는 호기심에 불과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절이라는 극단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아이”는 “여자”에게 닿지 못했다. 단절은 죽음 말고도 다양하게 표출된다. 의도와 상관없이 밀려나는 세상의 끝점에서 “여자”가 떠올린 것은 “밤비닐”이다. 모두가 그냥 지나친 “밤비닐”의 이미지는 “굶어서 부은 고양이”나 “썩은 선인장”처럼 어둔 구석에 버려진 모습이다. “여자”는 절망의 극단에 몰린 사회의 단면이다. “밤비닐”의 “입구를 묶는 방법”이란 어떤 갈등을 차단하겠다는 궁리일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이 스스로를 단절 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의 시그널을 거부하겠다는 몸짓으로 읽히는 건, “여자의 손으로 주무르는 밤 하나”를 끝내 찾아낸 시인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희음 시인에게 “따라 죽는 밤 앞”에 놓인 “밤 하나”가 시인이 추구하는 시세계와 동일한 방향을 지니고 있다면, 그 방향에서 시인이 찾아낼 떨림이 무엇인지, 떨림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이후의 궁금함은 의미 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납니다. “피노키오, 어디 있어?” 어둠 속 흡뜬 눈에 구멍, 난 물통, 넌 찢어진 비닐봉지, 깨진 물바가지가 활보하는 여긴 무슨 동네? 생존은 나무 인형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탈출을 꿈꾸는 여긴 꿈속? (하품을 틈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만)
골목은 만만치 않는 어금니를 가진 핑크빛 고래, 닥치는 대로 씹어 삼킨다는 소문으로 수중음파탐지기가 필요합니다. (타인이 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만)
나는 고래의 뱃속, 플래시 불빛이 환해 눈을 감습니다. 나는 365일보다 많은 옷과 상자를 가득 채운 생필품, 뜻밖의 서랍 속 물건들로 뱃속을 채운 고래처럼 배가 큰 사람. 피노키오의 눈은 틈만 나면 바깥을 향하고,
고래의 이를 닦아줄 전동칫솔을 사야 해요. 빙하기 석빙고도 사려면 서둘러야 해요. 마트 문 닫기 전,
일상을 무한리필 하는 뱃속엔 배설되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 빙하기. 마침내 고래는 죽고, 일회용 고래들이 넘쳐납니다
-김사리, 「고래의 방」(『애지』, 2019년 가을호) 전문
시가 삶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당연하다. 그중에서 감정은 집요하게 파헤쳐도 도무지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무형의 얼굴을 지닌다. 김사리 시인은 「고래의 방」을 통해 인간의 ‘오욕(五慾)’을 그려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욕심은 본능이다. 자본이 최우선의 가치인 듯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욕심은 무한대로 번식한다. 경쟁은 더 큰 경쟁을 일으키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또 경쟁을 하는 세상에서 “생존은 나무 인형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인간의 감정을 지닌 인형이다. 이때 “피노키오”를 인형으로 볼 것인가? 사람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 대신, “피노키오”를 내적 자아의 다른 이미지로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
시인은 외형이 아니라 마음(감정)의 유무로 사람을 말하고자 한다. 본능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본능과 대치점에 있는 이성일 것이다. 그것은 삶의 가치관과 동질이다. 시인이 제시한 “고래”가 포식자의 욕망을 통틀어 빗댄 사물이라면, 욕망이 자아를 집어삼키는 순간에 시적 떨림은 시작된다.
본질의 나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와 뿌리치기 힘든 외부의 유혹이 부딪쳐 일으킨 마찰은 생각보다 자극적이다. 그래서 “뱃속”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속된 마음’을 얹고자 했던 표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꿈”은 분명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꿈”은 “고래”이며 무의식에서 파생된 어떤 욕망의 이미지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타협하지 않고, “찢어진 비닐봉지, 깨진 물바가지”처럼 가치와 다른 이미지를 거부하며 “탈출”을 꿈꾼다.
“고래의 이를 닦아줄 전동칫솔”이나 “빙하기 석빙고”를 사는 행위로 ‘오욕’을 완벽하게 짓누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찌꺼기를 제거하고 얼려 보관하는 정도만의 시도로도 더 이상의 탐욕은 제어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고래 한 마리씩 키우고 있을 것이다. “배설되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김사리 시인의 말대로 “일회용 고래들”로 바뀐다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무게로부터 벗어나기가 조금은 수월해질지도 모르겠다.
탐욕의 세상에서 속된 마음을 다 비우고 살 수는 없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항하는 시인의 모습은 진지하다. 피노키오의 코가 배를 뚫고 불쑥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를, 고래와 나의 안팎이 뒤바뀌지 않기를, 김사리 시인이 숨겨놓은 밑바탕의 가치가 또 다른 떨림으로 진행되길 기대해본다.
「슬그머니」, 「스포일러」, 「M은 진행 중입니다」, 「밤비닐」, 「고래의 방」등 다섯 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떨림은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회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근원적 질문 쪽으로 방향을 둔다. 그렇다고 그들의 물음이 무언가 명확한 해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끝없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시의 특성에 근접한다.
“자네라는 환유를 생각”(「슬그머니」)하고, “내일을 환승하는 침대”(「스포일러」)에 누워보고, “오늘은 발가락만 따라 가”(「M은 진행 중입니다」)보기도 하고, “언젠가 보았던 밤비닐”(「밤비닐」)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하품을 틈타 밖으로 나가”(「고래의 방」)려는 의지를 품기도 하는 몸짓들은 불완전한 떨림을 통해 사물의 상징성을 호명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이런 ‘나름의 방식’은 보편적 색깔을 거부한다. 더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기 위해 시인의 세포는 예민해야 한다. 이때 불완전한 떨림이란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시인의 특성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언어가 맘껏 불온해지기를 응원해도 좋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물음을 던지는 순간, 그들이 찾아낸 떨림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울림이 될 것이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다양한 시세계에서 이번에 읽은 다섯 편의 작품이 다만 불편한 무언가에 대한 불편한 질문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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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2007 월간문학, 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시집『괜찮아』, 『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