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방에 올라온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어떤 목사의 글에 대한 반박
글 : 김강석 목사
먼저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한(000 목사) 한 카톡방에 올린 글의 주장을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을 잘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모든 참모들은 반대를 했다. 왜냐하면 배 하나만 침몰 되면 모두가 끝장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육지로의 공격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참모진과 함께 바다에서 육지로의 전쟁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보았다. 그때까지 모두 500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노르만디 상륙작전 한번만 성공 하였을 뿐 나머지 499번의 전투는 모두 실패하였다.
즉 해상에서 공격은 500분의 1의 성공이요. 500분의 499의 실패라는 결론을 얻었다.
즉 확률적으로 성공율은 0.2%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한 번이라도 성공하였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졌다. '그가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천 착륙 작전을 감행하여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는 그는 미국의 장군이 아니라 세계적인 성공한 장군이 되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면 성공의 가능성도 있고 실패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각각 50%인 것입니다. 성공자는 50%의 성공의 가능성을 보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실패자는 50%의 실패의 가능성을 보고 아에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실패는 100%가 됩니다.
그래서 성공자는 모두가 가능성의 사고, 즉 'Possibility thinking'를 가지고 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500분의 1의 가능성에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도전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샬롬! 가능성의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수요일 되시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 김강석 목사 반론 제기 >
인간의 가능성을 갖고 사는 신앙인은 결과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추종하는 비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걸 사탄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마16:23)
왜냐하면 마16:24절의 주님의 가르침인 자기 십자가와 자기부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도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주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가 자기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그 자신의 가능성을 갖고 세상의 힘의 원리의 지배를 받아 발휘하다가 죽는 순간까지 자기만을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내면은 자기를 위해, 자기존재가치와 자기위상과 자기명예와 자기영광 챙기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수단과 목적으로 끌어와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어떤 지향성으로 끌려가게 하시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이 역사와 우주에 주인공으로 삼아 살려고 내어 놓은 모든 행위들즉 인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그 삶에
하나님께서 방해 꾼으로 개입을 하여 예수님만이 니가 의존해야 할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만이 니가 소망해야 할 곳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자기부인의 삶으로 신자들을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점점 삭제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되면 될수록 그 신자 안에서 점차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nothing, 죽은 흙, 거름더미, 무능력한 자, 배설물에 불과한,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기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숙 된 신자 안에 담지한 그 인간의 가능성은 점점 소멸되어 십자가 뒤로 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된 실체를 바라보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처럼 말입니다.(고전15:31)
그게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기쁘게 하는 목적지로 끌려가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그리로 밀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와는 다르게 세상의 자기지식( 자기상식, 자기 말)에 기반을 두고 사는 자는 그 스스로의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10:2-3절 기록에서처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힘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의 가능성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걸 가리켜 죽음(사망)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악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피조물로서 객체의 자리에서 주체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끌려가는 삶의 자리인 객체 자로 내려와 그냥 서야 하는 것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기 주체적인 삶의 자리에 서서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지향하며 개발하고 발휘해 가는 그를 가리켜 악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처럼 인간을 극대화하여 인본주의적인 긍정의 힘이라고 주장했지 않습니까? <긍정의 힘>과 < 잘 되는 나> 에 대하여 긍정적인 낙천적인 성격을 개발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논리로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가리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학문과 세상의 국어사전적인 말들을 토대로 하여 성경을 곧 바로 적용시켜서 신앙을 운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끝으로 인간의 가능성이 왜 성경과 반하는 비 진리인가를 좀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이곳 제가 올린 카톡방에 올린 글
맨 앞 2) 번< 성경의 가치체계에 반하는 긍정적인 말(사고)과 적극적인 사고의 위험성에 대해서 >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