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12,1-4ㄱ; 2티모 1,8ㄴ-10; 마태 17,1-9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사순시기 동안 주님 수난의 신비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기를 다짐하기도 하고, 또 그러한 다짐이 없더라도 뭔가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변화를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안주하고 있으면 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익숙한 것에서 떠나야만 가능합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유목민이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길에서 다른 유목민 세력과 충돌할 때 버팀목이 되어 줄 친족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무런 질문이나 항의도 없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받으신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마귀는 두 번이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 보라, 저렇게 해 보라’고 유혹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데, 유혹이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기적을 베풀고 하느님을 시험해 보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는 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과 연관된 제 체험을 지난 수요일 사순 특강 때 말씀드렸는데요, 혹시 못 오신 분들은 유튜브에 올라 있으니, 들어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라는 거 자랑하러 오신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 되도록 당신 형제‧자매로 삼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자녀가 된 하느님의 귀한 아들과 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영광스럽게 변모할 것이고,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우리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영원한 나라에서 부활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삶에서 잠깐 새 지나가 버리지만, 영원히 우리 안에 각인되는 주님의 참모습을 체험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희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평상시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살았습니다. 이제 다 컸습니다. 이제 누구 말을 듣고 살아가야 할까요? 새로운 멘토를 찾아야 할까요? 좋은 유튜브 채널 찾아서 그 사람 말 듣고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이제 내 목소리에만 귀기울이며 살아가야 될까요?
의외로 우리는 엉뚱한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몇 년 전, 후배에게서 속상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윗사람에게 들은 말보다 아랫사람에게 들은 말이 속상할 때가 더 많아집니다. 그렇지 않나요? 안 그러시면 아직 무척 젊으신 거고요, 축하드립니다.
그 후배가 했던 말이 너무 속상했고, 3일 동안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도 ‘아니 어떻게 지 선배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그 말이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그 말은 이미 그의 입을 떠났습니다. 지금 찾아가서 따져봐도 그는 기억조차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제 마음에 남아서 저를 조종하고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말을 딱 한 번 했을 뿐인데 저는 그 말을 며칠간 곱씹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제가 그 말을 수십 번은 들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고 제 문제였습니다. 그의 말이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말이 제 안을 떠나지 않도록 곱씹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말씀이 나를 다스리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 쉬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을 몇 차례 반복하자 그가 했던 말은 물러갔습니다. 더 이상 저를 지배하지 않았고, 하느님 말씀이 저를 다스리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되뇌는 말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말이 나를 지배하도록 주도권을 내줍니다. 사람이 한 말이 나를 다스리고 있다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말씀이 나를 다스리실 시간도 부족한데 말입니다.
남이 내게 한 말, 혹은 내가 남에게 상처 주었던 말은 때로는 계속 내 안에서 맴돌면서 나를 우울로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공허감을 줄 뿐인 말들, 혼란스럽게 만드는 잡담들, 남에 대한 험담들 이 모든 것들은 유혹자의 말이지 하느님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 말들로부터 이제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계속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들을 것인지,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매일, 매순간 내가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첫댓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다스릴 시간도 부족한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