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명령으로 1906년에 길이가 짧아진 개량형이 '.30구경 M1903 라이플'이란 이름으로 미군 제식 라이플로 채용된다. M1903도 클립 로딩방식의 내부탄창을 장비하고 있으며 보통 03 스프링필드 라이플로 불린다. 그리고 사용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스프링필드 M1903 라이플
당시 독일에서는 탄자의 앞부분이 길고 뾰족하게 만들어진 "spitzer" 디자인의 7 X 57mm, 8 X 57mm 마우저탄이 만들어졌는데 기존의 뭉툭한 탄두에 비해 가볍고 사거리가 길었다. 미국의 총기 디자이너들도 .30-03탄의 디자인을 "spitzer" 스타일로 개량한 것이 바로 .30-06탄이라 불리는 제식 명칭 M2 .30구경탄이었다. 이 탄에 맞춰 총의 조준장치가 변경되었다.
M1903에 사용하던 .30-06 M2탄
.30-06탄은 1차세계대전 기간중 M1903 스프링필드 라이플 뿐 아니라 .30 기관총, BAR, M1917 엔필드 라이플 등에도 쓰여졌고 항공기, 차량, 전함의 기관총에도 이 탄이 쓰였다. 이후 거의 50년간 공식적인 미군의 표준탄약으로 미군의 각종 라이플과 기관총에 사용되었는데 명중률, 위력, 사거리등에서 우수한 탄약이며 20세기의 성공적인 군용탄약으로 또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탄약이기도 하다.
1942년 9월. 미해군 함재기에 수납되는 .30-06탄
공식적으로 1954년에 .30-06탄의 뒤를 이어 7.62mmX51mm NATO탄이 미군 제식탄으로 선정되며 라이플도 M14로 교체되었다. 미국에서 50~60년대에 .30-06탄 재고는 엄청나게 많았는데 종종 개런드용 클립에 끼워져서 탄띠와 함께 판매되기도 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민간용으로).
다시 1차대전 당시로 돌아가 보자면....
각종 군용탄 1:1 사이즈 모형.
어떤 총에 쓰이는 어떤 탄인지 맞춰 보시길...(정답은 그림 클릭!!)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M1903은 미군의 주력라이플로 사용되며 총 843,239정이 만들어졌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만 265,620정의 M1903이 만들어졌으나 이 수량도 부족했다. 미 육군성은 M1903 라이플 부족분을 보충해야만 했는데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미국에서 찍어내고 있던 P14였다. 잠시 이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고 넘어가자.
1914년, 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군은 제식으로 사용하던 엔필드 P13 라이플이 부족했다. 당시 영국의 생산능력으로 이 부족량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15년 영국정부는 미국과 계약을 맺고 P13의 생산을 요청하게 된다. 기존의 P13은 .276 엔필드탄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좀더 마일드한 영국군 제식의 .303탄을 사용하게끔 개조되어 P14라는 이름이 붙여져 미국의 레밍턴, 윈체스터, 에디스톤(레밍턴의 자회사)에서 생산되었다.
.303구경 P14 라이플
그러나 1917년, 미국마저 1차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자신들도 쓸 총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미국내에서 .303구경 P14가 생산중이었기 때문에 미정부는 이 총을 미국 제식인 .30-06탄에 맞게 개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 물건이 바로 M1917이었으며 기존의 레밍턴, 윈체스터, 에디스톤사와 록아일랜드 조병창에서에서 1917년부터 전쟁이 종결된 1918년까지 생산되었다.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졌지만 2백만정 이상의 M1917이 생산되었으며 유럽에 파견된 미군병사들 대부분이 M1917로 무장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투입된 영국군 병사 (들고 있는 것은 P14)
M1917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후 미군은 기존의 스프링필드 M1903 라이플을 지속적으로 제식으로 유지했다. 아마도 미국오리지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M1917 잉여분은 민수용으로 팔려 나갔고 2차대전 초기에 M1917은 영국으로 역수출 되기도 했다.
엔필드 M1917 라이플
영국에서는 .30구경의 M1917과 .303구경의 P14를 구분하기 위해서 M1917의 개머리판에 붉은색 라인을 그려 놓았다. 일반적으로 M1917(보통 US 엔필드라 불린다)은 매우 정밀하고 튼튼하다고 평가되며, 이런 저런 개조를 거쳐 사냥총으로 널리 판매되었으며 훗날 그 유명한 레밍턴 M700의 베이스가 되기도 했다.
레밍턴 700 BDL
다시 스프링필드 얘기로 돌가가서...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는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미국이 전쟁이 참가하기 직전인 1917년 사이 26,000정의 M1911을 제조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1917년 4월 이후에는 M1911의 생산을 중단하고 M1903 라이플 생산에만 주력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M1911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신형 M1개런드가 제식으로 쓰이면서 M1903은 2선급으로 물러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여용이나 후방부대용으로 생산은 계속되었다.
M1 개런드 라이플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라이플 뿐 아니라 대인 기관총과 항공기용 기관총, 유탄 발사기등의 장비까지 개발했다. 그러나 조병창에서는 부족한 생산능력 때문에 민간 총기 메이커에 하청을 주는 경우도 있었고 미정부에서는 민간 메이커 제품을 직접 구매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콜트사에서 만든 M16이 대표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만들어진 마지막 라이플은 M14과 저격형인 M21이었다.
M14
미 국방부는 민간 총기 메이커인 콜트나 레밍턴, 윈체스터사에 비해 경제성과 생산 효율이 극도로 뒤처지고 국방예산 문제까지 겹치면서 결국 1968년, 스프링필드 조병창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74년, 미국의 리즈 가문에서 "스프링필드 아머리"를 민간 총기 메이커로 부활시키는데 단순히 이름만 빌린 것이 아니라 기존에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만들던 M1개런드, M14, M1911 시리즈를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현재 옛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흔적은 박물관만 남아 있다.
스프링필드 아머리의 프로페셔널 모델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하며 독립전쟁, 남북전쟁, 스페인-미국 전쟁, 1/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총과 탄을 개발해서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총기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가장 위대한 업적에 해당하는 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런드 라이플을' 꼽는다. 도대체 M1 개런드란 총이 어떤 물건이길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장에서 군단장, 군사령관으로서 독일, 이탈리아 동맹군을 깨뜨리는데 있어 수많은 신화를 창조한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은 M1 개런드 라이플에 대해서 이런 찬사를 남겼다.
"이제껏 만들어진 최고의 전투 화기"
"마술같은 총이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라이플"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1885~1945)
젊은시절 그는 근대5종(승마, 펜싱, 수영, 사격, 크로스컨트리를 한데 묶어 하루죙일 뛰어다니는 경기) 미국 올림픽 대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었는데, 올림픽에 나가 그가 가장 자신있었다는 사격을 제외하고 모두 1등을 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사격에서 1등은 놓친 이유가 가관이다. 사격장에서 경기용 .22구경 권총 대신 .45구경을 꺼내들고 쏘는 바람에(당근, .45구경이 반동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경기용으로 불리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이양반은 이걸로도 상당한 수준의 사격솜씨를 보였다 한다)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락당하고 말았던 것.
패튼이 차고 다시던 .45 SAA 리볼버
그만큼 사격에 조예가 깊은 위인인 셈인데, 이런 사격의 달인이 M1 개런드에 대해서 구구절절 극찬의 뻐꾸기를 날린 것만으로도 M1 개런드란 총이 대충 어떤 물건인지 짐작이 가실 듯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개런드 라이플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당시 군용 라이플이 갖춰야 할 미덕을 모두 갖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총기 명칭이 개런드 라이플이니 개발자가 '개런드'란 것은 쉽게 눈치를 채셨을 텐데 브라우닝이나 마우저, 루거, 드라구노프, 칼리시니코프같은 유명 총기 설계자들과는 달리 이 개런드라는 인물은 자신이 개발한 총기의 명성에 비해 그다지 유명세를 치른 인물은 아니다. 실제로 이양반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더라도 다른 설계자들과는 뭔가 다르구먼...하는 느낌이 드실 텐데, 자..그럼 우선 개런드란 위인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과 개런드 라이플의 탄생과정을 살펴 볼꺼나.
대량 생산된 최초의 군용 반자동 라이플 M1 개런드는 1차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의 존 C. 개런드가 설계했다. 캐나다 퀘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1살 때 미국 북동부주의 코넥터컷이란 지방의 섬유공장 청소부로 일했는데 이때부터 방직기등의 기계류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 출신이지만 1920년에 미국인으로 귀화했다.
존 C. 개런드(1888-1974)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넘쳐났던 그는 자연스럽게 여가시간이 날때마다 방직기에 달라붙어 이것저것 공부하곤 했는데 그가 18세가 되자 기계 기술자가 되었고 공구와 측량기 메이커인 브라운 앤 샤프사에 입사해서 기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 갔다. 평범한 기계 기술자에서 총기 설계가로 변신을 한 것은 그가 뉴욕에 살면서 읽었던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당시 혁신적인 무기로 각광받고 있던 기관총에 대한 이론과 개발 완료된 초창기 기관총들의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한 이 책을 읽고 뭔가 영감을 얻었는지 직접 기관총 디자인에 착수해서 총기 설계자였던 존 큐시(John Kewish)를 찾아간다.
존 큐시는 개런드의 구상이 충분히 현실적이라 판단하고 매주 50달러씩의 연구비를 지원해 가면서 그의 연구를 독려한다. 1918년 6월,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자 큐시는 맥심기관총의 발명가 하이람 맥심의 형인 허드슨 맥심에게 선보이고 허드슨은 해군의 수석 자문 위원이었던 데이비드 버튼에게 소개....또다시 버튼은 큐시를 미국 국방대학의 콜로넬 힐튼에게 소개시켰다. 이런 식의 뺑뺑이는 예나 지금이나 군의 관행이었는데, 결국 병기과에서는 개런드의 시제품을 테스트 했지만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등장하는 '트리플 엑스'의 개런드 사격씬
큐시는 다시 데이비드 버튼에게 손을 벌릴수밖에 없었고, 버튼이 큐시와 개런드를 미 상무부의 표준국에 소개시켜준 덕분에, 개런드는 이곳의 장비를 이용해서 개량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큐시와 개런드는 개량된 새기관총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으나 나중에 누가 이 기관총 설계에 더 많은 기여를 했는지를 놓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1918년 8월, 개런드는 재판에서 승소했고 표준국의 일자리도 따내는 성과를 올린다. 그리고 18개월만에 프로토 타입 기관총을 완성했지만 이미 1차 대전은 끝나 버린 후였기 때문에 군에서는 그의 기관총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작업중인 개런드
3편으로 계속
|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한편의 감동적인 영화보다도 가슴에 와닿는 내용이에요~ ㅎㅎ
이 총 이야기에 난 왜이리 감동을 먹는거지...???
근데 위의 레밍턴 700에 장전손잡이가 반대인건가요 아니면 원래......
노리쇠만 갈이끼웠을 수도 있고(왼손잡이용) 사진이 반대로 나왔을 수도 있었을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