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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고소공포증>의 줄거리:
사회생활에 있어 적지 않은 장애를 가져오는 고소공포증이 신앙적으로 말하면 참신앙의 표증이 됩니다. 즉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원죄의 굴레와 권세 아래 안주하고 있는 증거란 것이지요. 복음 안에 있다면 반드시 내가 높임 받는 상황에서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참 신앙인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바로 자신이 높임 받는 일입니다.
고소공포증
(행16:16~25)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고소공포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캐나다 토론토에 가면 첨탑이 하나 있습니다.
뾰족한 꼬챙이에 동그란 찹쌀떡을 꽂아놓은 것 같은 그런 모양인데, CN 타워, Canadian National 타워라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관광지에요, 토론토의 랜드마크죠.
그 높이가 553.33미터로, 몇 년 전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탑입니다.
관광명소로 유명한 것은 그 탑의 447미터 위치에 전망대가 있어요.
굉장하지요, 저도 가봤거든요.
근데 이 447미터 전망대보다도 저한테는 더 기억에 나는 게, 342미터 지점에 전망대가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실내에서 밖을 보는 전망대입니다.
그런데, 이 342미터 전망대 밑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유리로 된 부분에 올라서면, 342미터 높이에서 아래를 보는데 내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뭐 초등학생 나이쯤 되는 아이들은 그 위에서 발을 구르면서 재미있어 가지고 통통 거리는데, 특히 여자분들 같은 경우는 거기 못 올라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올라섰는데, 처음에 마음이 서~늘해요 그런 거 있죠, 이상한 거.
좀 뒤에 적응이 되었습니다마는, 저의 집사람은 못 올라서더라고요.
이게 고소공포증이에요, 높은데 올라가면 무서운 겁니다.
그 유리가 2.5인치, 그러니까 6cm 정도 되는데, 이게 40,000kg 정도를 지탱한다고 해요.
80kg의 몸무게인 사람이 500명이 올라서는 정도까지 지탱이 됩니다.
그 이상 넘어가면 유리가 무너져 내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5백 명이 들어서는 게 쉽지가 않은데도 그 말을 들으니까 서늘~하지요, 마음이.
고소공포증! 이게 좀 심하면 공황발작의 단계까지 됩니다.
공황발작이라는 것은 높은데 올라갔을 때 불안감과 공포감이 너무 커가지고 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거예요.
맥박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진땀이 나고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의 힘이 빠지고, 곧 죽을 것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리는 상황, 이게 공황발작 아닙니까?
높은 곳에 올랐다는 그 단 하나만의 이유를 가지고, 이렇게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게 되는 게 이 고소공포증인데, 신앙으로 갖고 와 보잖아요? 그러면 이 고소공포증이 참 신앙의 증표가 됩니다.
복음이 뭡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건이 핵심입니다.
이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표가 바로 고소공포증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고소공포증은, 의학적으로 말할 때는 공간적인 높은 장소를 말하는데, 참 신앙의 증표로서의 고소공포증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고소공포증이라는 게 뭐에요?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높임을 받을 때, 고소공포증이 나타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반드시 이 고소공포증이 나타나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뭐냐 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내가 높임 받는 것을 생래적으로 좋아합니다.
아주 천성적으로 좋아하지요, 이게 바로 원죄의 권세아래 있는 증표에요.
내가 높은 곳에 있을수록, 내가 높임을 받을수록, 높임 받아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승진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고, 정치인들은 자꾸 높아서 대통령까지 도달하고 싶은 것이고, 돈 버는 사람들은 많이 벌려하는 것, 이게 다 원죄의 굴레 아래 안주하고 있는 상태의 증표라는 거예요, 높아지는 것을 원하고, 높아져야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것이.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면, 내가 높임 받는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그런 말씀 자주 드립니다.
믿음을 갖고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 장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 장애인으로 사는 것인데, 내가 십자가에 앉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겁니다.
근데 그 십자가가 인간 세상 안에 인간이 머물 수 있는 자리 중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요.
근데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고 하는 것이 말하는 뜻이 뭐냐 하면 높아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장 낮은 자리이니까, 십자가가 자리가.
가장 낮은 그 자리를 떠나면 왜 불안해지고 공포스러워지느냐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만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천국이 내 것이 되고, 그 천국에 계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나의 아버지로서 나를 만나 주시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를 떠나게 될 때는, 반드시 참 신앙인이라면 높아지게 됩니다.
그때 나타나는 증상이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현실생활에서 십자가를 떠났을 때 나타나는 증거가 뭐냐 하면, 현재 주어진 상황이 불만스러워요.
이게 바로 십자가를 떠난 증거입니다.
뭘 자꾸 바라게 되고 소원하게 되요.
내게 주어진 천국의,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 되고 딸 된 신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 다른 소원을 갖게 돼요.
이게 십자가에서 떠나서 높아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게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스럽다는 걸 못 느끼는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자리까지 제대로 내려 간 적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높아지는 자리, 높아지는 길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이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십자가를 제대로 붙잡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제대로 연합해서 죽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그 십자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그 자리를 떠나서 인간세상에서 높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이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거예요, 고소공포증이.
여러분 오늘 본문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여러 가지 질문을 갖게 합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그리는 건데, 귀신들린 여종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잘 봐서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이렇게 전도하러 다닐 때, 기도처에 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가고 있는데, 처음 보고 쫓아다니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를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라고 외치게 되요.
이렇게 따라다니는데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고 그럽니다.
한번 보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계속 의도적으로 따라 다니면서 이 말을 반복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너희에게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다’ 이러면서 계속해서 쫓아다닌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의문점이 생기는 겁니다.
우선 심히 괴로워했다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몇 날이고 며칠이고 따라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괴로워하면서.
그냥 처음에 따라 다니면서 그렇게 말 할 때 귀신을 쫓아내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왜 놔두었을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왜 귀신은 굳이 의도적으로 따라 다니면서, 일견 틀린 데가 없는 말을 이렇게 반복해서 했을까.
그러니까 바울 일행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데, 틀린 말이 없는 거예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전 하고 있다, 전파 하는 자들이다.’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언뜻 보기에 의심을 갖게 해요.
어떤 의심을 갖게 하냐면, ‘야~ 이거 귀신 중에서 양심 있는 귀신도 있네, 바른 말하는 귀신도 있네’ 이렇게 하면 이들의 권위가 높아지고 입장이 공고해지면서 전도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이렇게 귀신일지라도 바른 말을 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심히 괴로웠을까?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이게 다.
첫 번째 질문, 왜 따라 다니는데 몇 날 며칠 그대로 놔두었을까 하는 것은.
축사의 권능,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바울의 소지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 안에서 동행하시면서, 그때그때 성령님이 당신의 뜻을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지, 바울이 자의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몇 날 며칠 그 귀신이 쫓아 다녔던 것은, 성령님께서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 왜 귀신은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바른 말을 했을까?
아하~ 귀신에 대한 인상이 달라질 판이에요.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죠?
바나바와 같이했던 1차 선교여행에사 날 때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바울이 고쳤을 때, 그때 사람들은 이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신이다, 제우스신이다, 하며 섬겼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소개하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의 입장이 공고해 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점괘를 용하게 잘 보는 그런 귀신들린 점쟁이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움 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과연 그랬겠습니까?
이 두 번째 질문, 왜 귀신이 그랬을까 라고 하는 것과, 바울이 괴로워하는 것이 맞물려 있는 거예요.
현미경을 들고, 이 귀신이 증언한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귀신들이 곡할 정도의 간계가 들어 있는 겁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너희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다’
누가? 이 사람들이.
이 문장, 귀신이 증언하는 문장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 즉 귀신들의 증언 속에서 바울이 주어가 될 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라는 말도 구원의 길이라는 말도 전부, 주어인 바울을 수식하는 수식어가 되어 버립니다.
이게 귀신도 곡할 간계라는 거예요.
다른 귀신들이 곡하고 갈 정도로 정말 교묘한 간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이 바울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이 됩니다.
바울이 높아지는 거예요, 바울이.
제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곳이 영락교회였어요.
그곳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래 어느 날 선배 목사님 몇 명과 이야기하는 중에, 뭐 저는 듣기만 하고 있었지요, 어떤 얘기가 오고가는가 하면, ‘아무개 목사가 떴다, 아무개 목사가 후발주자로 지금 계속 치고 들어온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면, 목사님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하고 주님과 복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야! 그 목사님 설교 잘하더라.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복음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 목사님 설교 잘 하더라!’고 그래 갖고 스타 목사가 탄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이 목사님을 스타로 만드는데 이용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으면, ‘야! 그 목사님 하는 설교를 가만히 듣다 보니까 정말 십자가 복음이라는 게 대단한 것이던데, 그 말씀을 듣다보니까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던데,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던데…’ 이렇게 얘기가 안 되고, 그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야! 그 목사님 설교 진짜 잘하던데’ 이렇게 돼버리는 겁니다.
이 귀신의 증언에 의해서 바울이 높아지는 거예요.
이것을 바울이 이렇게 괴로워했던 거예요.
이게 바로, 고소공포증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제우스신이다, 헤르메스 신이다, 라고 제사를 드리려는 그 사람들의 헬라 문화적 풍토 안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고 구원의 길을 전한다는 말이, 얼마나 자기가 사람들에 의해서 높아질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사람들이 벌써 그렇게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용한 점쟁이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렇게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증언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그렇게 괴로워, 고소공포증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그 뒤에 이제 결국 귀신을 쫓아내서 점쟁이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 여종의 주인들이 거짓말로 모함을 해서 고소를 하고, 결국은 당국에 잡혀가 가지고 옷이 찢기고 매를 맞게 됩니다, 발가벗겨져서 감옥에 던져집니다.
이 본문이 25절까지 대칭을 이루고 있어요.
어떤 대칭이냐 하면, 여러분 보세요.
귀신들이 바울을 높여요,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을 들먹거리며 바울을 높입니다.
바울이 괴로워합니다.
자, 이것과 대칭이 되는 사건이 뭐냐 하면, 잡혔습니다, 옷이 찢겨서 발가벗겨집니다, 모욕을 당합니다, 수치스러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매 맞습니다.
높임을 당하는 것과 대칭입니다.
높임을 당할 때는, 바울이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채찍에 맞고 굴욕적으로 옷 벗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던져져서는 바울과 실라가 뭐하냐 하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를 부릅니다.
대칭이라는 거예요.
귀신의 증언에 의해서 높임을 받을 때는 괴로워하다가, 당국에 붙잡혀 가지고 모함을 받고, 옷 벗기고, 매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슨 Sadism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낮춰지면서, 십자가로 실제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참 신앙인이 갖는 고소공포증 이라는 증표라는 거예요.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진수를 맛본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지긋지긋한 일이라는 걸 압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로 인해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고, 주님의 십자가의 그 효능과 권능에 대해서 사람들이 눈 뜨게 될 때에, 가장 기쁜 일 이라는 걸 압니다.
나는, 나는 그냥 안개 속에 사라져버린,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리면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뭐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러는데, 내 이름이 남고 안 남고는,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내 일이 아닌 일이고, 살아있는 동안에 내 마음은 내 이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나바도 사라지고, 베드로도 앞으로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한 마디도.
끝나 버렸어요, 베드로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나면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산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을 진수를 맛본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뭔가 지금 주어진 상황에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뭔가 자꾸 바라게 됩니까? 불평이 생깁니까?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자식이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까?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를 떠났어요.
십자가를 떠나서 무엇을 바라고 마음대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데도, 내 마음에 불안함이 없고 공포와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소원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생기고,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가 안 나오게 될 때, 깜짝 놀라 가지고 두려움과 불안이 확 몰아칠 때, 내가 높아져 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는 그 사람이 바로 참으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십자가 복음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해 가지고, 그 자리에서 주어지는 천국과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느꼈던 참 신앙인입니다.
고소공포증!
내가 높임을 받게 될 때 나타나는 불안함과 두려움, 참 신앙인의 증표입니다.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 복음을 잘못 받아들인 오해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을 받아들여 맛을 아는 사람일수록, 내가 높아지는 것처럼, 내가 높임을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받는 것처럼 두렵고 지긋지긋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참 신앙인의 모습이라 했으니, 오늘 하루 종일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나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