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남은 자리
김혜경
나무가 그늘을 드리울 때
값을 생각하지 않았으리
언덕이 어깨를 내어줄 때
대가를 바라지 않았으리
내 살과 뼈로 열매를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을 때
영광을 바라지 않았으리
있는 자리마다
뿌리가 되고 줄기 서 있으며 잎으로 바람을 막아
열매를 키워내면
그 뿐
때때로 길이 막혀 뿌리를 내릴 수 없을지라도
벌레들에게 잎들을 먹이로 내어줄지라도
굳건히 서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 뿐
나지막한 봉분 속에서
자분자분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끝없이 기다려도 괜찮다
괜찮다 바람결로
들려주시려
봄마다 붉은 몸으로 피어나시는
나의 껍데기.
*껍데기-자식을 낳은 어미를 일컫는 모친의 언어.
변(便)의 변(變)
김혜경
詩가 내리면 눈물이 나요
한솥밥 먹은 지 오래되어서 그러나 봐요
밥알이 내 속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굴러다니며
지나간 상처의 딱지와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을 건드려
여기저기 통증을 일으켜요
소장을 통과하지 못하고
꼭 그 어디쯤에서 숨을 못 쉬게 막고 있네요
잘 소화된 노란 똥
한 번 시원하게 싸고 싶어요
첫댓글 프로필
김혜경
전남시문학상,보해예술상 수상
목포문인협회,목포시문학회 회장역임
시집"물고기 눈물", "저만큼, 저녁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