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겉핧기 또는 장님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이탈리아 밀라노
지난 11월부터 500여페이지 분량의 교재 편집과 씨름하느라 머리가 혼란스러워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나에게 마누라가 던지는 말.
“여보, 그거 언제쯤에나 끝날까? 이번 명절엔 아이들이 함께 가족여행을 다녀오자고 하던데”
“벌어놓은 돈도 없이 어딜 가자구?”
내 십팔번, 능력이 모자라 아직껏 돈도 벌어놓지 못했다는 핑계로 발뺌을 할 셈이었지만... 마누라는 새해 달력을 펼쳐놓고는 여기를 보라면서 2월달을 펼친다. 흘깃 눈길을 주니 2월의 두번째 줄에 붉은색 숫자의 구정연휴날짜가 눈에 들어오고 2월달의 절반을 시커먼 매직으로 줄을 그어놓은 것이 아닌가. 아직 첫날을 맞지도 않은 새해달력에 검은 매직으로 죽 줄까지 그어놓고 내 눈앞에 디미는 것으로 보아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다.
하루 이틀 날 잡아 전국의 유명산 정도야 쉽게 다닐 수 있고 몇번 다니기도 했지만 일주일 열흘씩 작심하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는 건 여간해선 쉽게 ‘그러자’고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경비와 시간문제도 있지만 시답지 않은 사업이나마 손에 잡고 있으니 며칠 접어두고 훌쩍 떠난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우선 버틸대로 버텨보자는 속내를 숨기고. 구실을 찾아본다.
“아버지 제사는 어쩌고?”
“명절엔 아직껏 한번도 빠진 적이 없으니 한번 정도 빼먹고 우리끼리 어디 좀 다녀옵시다. 더 늙으면 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도 아니고 다섯식구가 유럽엘 가려면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려구? 돈도 돈이지만 우리가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 열흘씩 집을 어떻게 비우지? 그러지 말고 내가 집을 볼테니 당신이 아이들하고 함께 다녀오구려. 나는 갔다온 셈 칠테니”
돈이 없다는 구실도 제사는 어쩔거냐는 핑계도 집을 비우면 어떡하냐는 구실도 약효가 떨어졌는지 사무실 며칠 문닫는다고 큰일날 것도 없고 아이들 출가하기 전에 함께 여행다닐 기회도 쉽게 오지 않는다고 푸념이다.
어디 생각해보자고 확답을 피하면서 그 순간을 모면하고 다시 며칠이 지났으나 뾰족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사무실 며칠 문닫는다고 될 일이 안될 것도 아니고 아이들 결혼하여 출가하기 전에 함께 여행할 기회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여지껏 사업 한답시고 큰 돈 벌어다준 것도 없으려니와 마누라 호강 시켜준 것도 없으니 그 푸념이 한마디도 틀린 것 없고 나로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달력을 들여다보니 2월 초하루가 금요일이요, 4일, 5일만 눈 딱 감으면 2월 10일까지 제대로 10일간 날잡아 어딘가 다녀올 수 있는, 그야말로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황금연휴이긴 하다.
미적거리면서 다시 며칠이 흐른 어느날 저녁, 모처럼 아이들도 일찍 퇴근하여 한자리에 모였다. 거기서 딸아이 하는 말.
“아빠, 지금 편집하는 책은 언제쯤 끝나?”
“일월 중순쯤에는 끝나겠지.”
“우리들 의논해봤는데 이번 설에는 우리가 집에 있기로 했어. 그러니까 아빠, 엄마 둘이서 여행 다녀와. 맨날 집걱정 사무실 걱정만 하면서 세월 보내지 말고. 여행 경비도 우리가 보태줄 거야. 대신 사무실에 직원도 하나 두고 여름휴가엔 우리하고 함께 가야 돼”
망설이고 엄두를 못내는 나의 우유부단을 보다못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지난 가을부터 숙덕거리며 계획한 휴가일정을 포기하고 집에 남아있겠단다. 거기다 여행경비까지 대겠다는 제안에 이게 웬떡이냐는 듯 마누라는 입이 하마만큼이나 벌어지고...
지난번 중국여행 때도 막내가 며칠간 출근시간을 늦춰가며 거래처 주문분을 말끔히 해결해준 덕에 걱정을 놓긴 했지만 이번에도 마음에 걸리는 집걱정과 사무실문제를 아이들이 해결해 주겠다는 데 더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못이기는 척, 미안한 척 아이들 어깨를 두드리며 고마움을 표한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긴 한데 너희들 모처럼 잡은 여행계획이 틀어져 어쩌니?”
일단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고부터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편집작업에 더욱 속도를 가하느라 나는 야간작업까지 하면서 강행군으로 1월을 눈코 뜰새없이 보내던 끝에 말일을 하루 앞두고서야 간신히 인쇄소로 넘길 수 있었다.
마누라는 여행준비에 신이 나는지 한달 전부터 큼지막한 가방을 꺼내놓고 옷가지를 넣었다 꺼냈다 하며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수선을 떨다가 큰딸아이 퇴근하자마자 몇시간 공들여 차곡차곡 넣어둔 준비물을 가방째 폭싹 뒤엎고는 ‘얘, 빠진 물건 없는지 한번 확인해줄래?’ 하고는 큰 아이를 붙잡고 다시금 가방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게 몇번이던가, 둘째가 퇴근하자 또 한번 가방을 열고 확인요망, 셋째가 들어오자 다시 한번 반복작업이다.
어디 한번 떠나려면 저렇게 수선을 떨면서 좋아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장단을 맞춰주지 못하는 나는 괜히 큰 소리로 핀잔을 주면서 미안감을 감춘다.
“젠장, 여행은 생전 첨 하나. 뭐 그리 수선을 떨고 야단이야. 얼마 전에도 둘째하고 홍콩에 다녀왔으면서?”
“홍콩은 홍콩이고 이태리는 내가 꿈에 그리던 곳인데.”
우리의 생각지도 않은 이탈리아 여행은 이런 사연 속에 이루어졌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비좁고 답답한 비행기 여행은 숨막히는 고욕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구촌 동쪽 끝에서 서쪽의 지중해까지 그 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다소의 답답함과 쭈그리고 앉은 다리저림, 허리아픔 쯤은 여행의 즐거움으로 충분히 보상이 되고도 남을 것을.
인천공항에서 로마직항편을 이용해도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거리에 시차가 8시간이나 나는 지역이다, 기내에서 무료를 달래느라 이어폰을 끼고 음악도 들어보고 가끔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도 해보고 포도주 한잔 얻어마시고 잠도 청해봤지만 이코노미석에서 12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청하면서 시간을 죽이다보니 멀리 창밖으로 육지와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안내방송과 함께 우리가 탄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로마공항에서 우리의 목적지 밀라노까지는 다시 이탈리아 국내선을 갈아타고 한시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단다. 밀라노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공항 구내를 한참 걷다보니 굳어있던 무릎이 다시 펴지는 느낌이다. 약 두 시간의 대기시간을 두리번두리번 아이쇼핑으로 시간을 보내고 굳어진 몸을 풀다보니 여객기에 오를 시간이다. 마누라는 다행히 멀미는 하지 않았지만 너무 긴 비행시간에 첫날부터 지친 모습이다.
나 역시 시차적응하겠다고 미리 잠을 자두긴 했지만 지금이 로마 현지시각으로 18시, 여기다 시차 8시간을 더하면 26시, 서울시간으로 계산하면 새벽2시인 셈이다. 당연히 눈도 뻐끔뻐끔, 정신도 희미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지기 십상인 취침시간이 아닌가.
밀라노행 비행기에 오르기 무섭게 억지로라도 잠을 자두어야 피로가 좀 풀릴 거라고 마누라를 다독였지만 여행의 긴장감이 최고조인데 잠을 청한다고 엿장사 마음대로 잠이 올 리도 없을 턱, 애꿎은 의자탓으로 돌리고 푸념하다보니 어느새 밀라노 리나테공항에 도착, 간단한 입국심사를 끝내고 짐을 찾아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결국 장장 17시간의 시달림 끝에 호텔에 도착하고나니 현지시각으로 2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처음 찾아온 미지의 땅, 세계 패션에 메카라는 밀라노는 유럽 각국의 항공노선은 물론이고 여러 국제항공편이 직항노선을 두고 있는 이태리 대도시의 하나로 유럽지역의 항공편과 국내 각지역을 연결하는 항공편이 있는 이곳 리나테공항과 그밖의 국제선 항공편이 이용하는 말펜사공항 등 두 곳의 공항을 갖춘 대형도시라고 한다.
이왕 관광차 여기까지 왔으니 밀라노의 밤풍경을 보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호텔에 들어가 잠시 샤워라도 하고 다시 나서겠다는 생각에 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따로 노는 몽뚱이는 샤워를 하고 잠시 허리라도 펴보자고 침대에 눕자마자 꿈나라로 직행, 눈을 떴을 때는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벽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세계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해마다 4월이면 국제견본무역박람회가 열리는 도시, 세계 각국의 쟁쟁한 사업가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는 이곳은 지난 2천년 통계로 인구가 1천3백만명에 이르는 대도시로 이탈리아의 공업, 상업의 중심도시라 한다.
나의 짧은 서양사 지식으론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지만 일찌기 BC222년경부터 로마인 지배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의 하나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권력과 경제력이 신장되어 로마 다음가는 서로마제국의 제2도시가 되었다 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곳을 이탈리아의 대리자로 선언했고 기원후 훈족, 고트족 등 강력한 외세의 침략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이 도시는 신성 로마제국의 직접통치를 받는가 하면 한때는 프랑스의 또는 스페인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1848년 시민봉기가 일어나고 이 세력은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밀라노, 스포르체스코성
성안에 들어가 마누라 사진 한컷 찍어주고.
이른 아침식사를 호텔식으로 때우고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15세기 왕조투쟁의 산물이라는 스포르체스코 성. 1368년 비스콘테가가 밀라노의 영주였을 때 축성되었으나 그후 파괴되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1466년 재건되었다 한다. 지금은 미술품 소장소로 쓰이는 이 성 안에는 고대미술박물관, 악기박물관, 회화전시실이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
미켈란젤로 최후의 미완성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Rondanini Pietà〉도 여기에 있다. 회화전시실에는 안드레아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필리포 리피, 코레조, 자코포 다 폰토르모와 같은 르네상스 및 17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이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를 들으며 성안으로 발길을 옮겼으나 아침 이른 시각이라 박물관도 미술관도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거장들의 작품 하나 구경도 못하고 다음코스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스포르체스코성을 뒤로 하고 단테거리를 걸으면서
미술관 입구만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우리는 카스텔로광장을 걸어 단테거리라고 명명된 카이롤리 광장을 가로질러 코르두시오 광장에 이르고 그 바로 앞이 두오모 광장이다.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는 멋진 대리석의 아름다운 건축물.
너무도 멋진 건물인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뿌옇게 보이네.
성당 내부모습
밀라노성당 안에서
밀라노의 가장 뛰어난 기념물인 동시에 유럽 내에서 세번째로 크고 웅장하다는 두오모 대성당이다. 약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으로는 고딕건축의 걸작으로 뽑힌다는 이 성당은 1386년에 짓기 시작하여 자그만치 5세기에 걸쳐 공사가 이루어졌고 19세기에 들어와 완성되었으며 성당 건축에 참여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 공예가는 유럽에서 초청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었다고 한다.
성당의 높이가 157m 너비가 92m에 이르는 이 성당은 성당 외부에 135개의 첨탑이 있고 성당 전체에 3천개가 넘는 성자와 사도들의 조각상이 있다고 하는데 첨탑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예술이요, 조각상 하나하나가 감동을 준다고 한다. 허나 이탈리아의 명물이 어디 이것뿐이랴.
이곳 밀라노만 해도 정말 유명한 미술관,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와 함께 북이탈리아의 대표적 미술관으로 꼽히는 브레라 미술관이 있지 않은가. 내 손에 쥐어진 지도로 볼 때 단테거리에서 불과 10여분만 가면 될 것같은 브레라지구, 거기에 바로 브레라미술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15-18세기의 롬바르디아파와 베네치아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다. 틴토레토, 라파엘로, 만테냐, 베르니니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특히 유명한 그림으로 원근법의 기법이 뚜렷한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가 있고 베르니니의 ‘피에타’가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여행일정에 이곳 미술관 코스는 들어있지 않으니 아쉽긴 하지만 화집에 있는 그림을 보며 내 마음을 달랠 수밖에.
흔히 ‘피에타’는 비탄이나 슬픔이란 의미로 르네상스 화가나 조각가들의 작품에 자주 표현된다. 십자가에 못박혀 핏기를 잃고 죽어가는 얼굴빛의 묘사가 그야말로 사실적인 느낌이다.
원근법의 기법이 뚜렷하다는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는 서서히 굳어가는 근육과 신체를 표현한 섬세성에 탄식이 절로 나올 듯하다.
이어서 우리가 발길을 옮긴 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스칼라좌. 세계적으로 쟁쟁한 오페라가수가 평생에 단한번만이라도 서보고 싶다는 유명한 극장이다. 한국인으로는 조수미씨가 처음 이 무대에 섰다고 들었다.
스칼라좌
스칼라좌 광장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의 수제자 동상 앞에서 한컷. 아쉽게도 다빈치의 상반신이 잘렸네요.
1778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테레지아의 명으로 건축되고 그후 두 차례에 걸쳐 개조되었으며 2차대전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고 1946년 5월 거장 토스카니니가 78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 돌아와 지휘봉을 잡아 관객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이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가이드의 소갯말이 귓가에 들린다.
베르디의 <오베르트> <나부코> 푸치니의 <나비부인> 등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되었다고 들었다.
음악에 꽤나 조예가 깊은 한 친구로부터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스칼라좌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고, 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대작곡가 베르디가 1901년 1월 스칼라좌 근처의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문을 들은 밀라노 시민들은 그의 병세를 염려하여 호텔 앞 도로 위에 짚을 깔아 소음이 나지 않게 하고 그의 쾌유를 비는 군중들의 기도가 이어졌다고 한다.
허나 간절한 시민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감았고 이 소식에 스칼라좌는 문을 굳게 닫은 채 공연을 중지했으며 서거 후 한 달 동안의 추도식전에 토스카니니가 직접 지휘를 맡았다. 그의 관이 운구될 때 시민들은 노래하기 시작했고 한 사람, 두 사람. 자연스럽게 시작된 노랫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대합창이 되었다.
노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서곡의 합창 “가라, 내 마음이여”였다.
<나부코>는 1842년에 초연되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밀라노는 독립의 기운으로 팽배해 있었다. 아내를 잃고 한때 절망에 빠져있던 베르디를 일약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게 한 오페라 <나부코>는 원래 구약성서의 내용을 줄거리로 담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 포로들의 조국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담은 이 노래는 밀라노 사람들에게 독립을 갈망하는 강렬한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밀라노 시민들은 절망과 우수에 빠져있던 그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준 베르디를 애국적 우상으로 여겼고 그들을 남기고 떠나는 고인을 추도하며 시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그가 남긴 노래로 시가지를 물들였다고 한다.
아, 잃어버린 너무나도 아름다운 우리 조국이여
이토록 사랑스럽고 이토록 슬픈 추억이여
가슴 속의 추억을 다시금 불태우며
지나간 나날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라!
건축양식이 독특한 갈레리아 입구에서.
갈레리아 안으로 들어서면 명품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스칼라좌를 뒤로 하고 밀라노시청사로 쓰인다는 궁전을 끼고 걸어 또 하나의 멋진 건축물로 꼽히는 비토리오 엠마뉴엘레2세 갈레리아로 들어선다.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의 설계로 1877년에 완성되었다는 이 아케이드에는 사진에 보이는 입구를 걸어들어가면 중앙의 십자로에 4개대륙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멋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벽쪽으로도 온통 조각과 그림이 장식되어 있고 거리 양옆으로는 패션과는 거리가 먼 내 눈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유명 브랜드의 상점이 죽 늘어서 있다.
프라다매장과 프라다호텔
가이드의 말로는 사진에 보이는 프라다건물 2,3층이 유명한 7성급의 프라다호텔이란다. 외모로 보아서는 별것 아닌 수수해 보이는 이 호텔에 세계의 쟁쟁한 거물들이 하룻밤 수백만원의 호텔비를 지불하고 묵어간단다. 다만 이 호텔에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 없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나.
예컨대 6개월 1년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스칼라좌의 오페라좌석도 얻을 수 있고 이곳 정관계 거물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호텔측이 주선해주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일층의 프라다매장에는 세계 패선계를 리드한다는 프라다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잠시 구경이나 해볼까 들어가 둘러보다가 딸아이 생각이 나서 예쁘장한 보라색 핸드백 하나 들고 만지작 거리다 가격표가 보이지 않기에 종업원에게 한마디 ‘하우 머치?’
여종업원, 잠시 내 얼굴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짓더니 핸드백 지퍼를 열고 가방 안쪽에서 가격표를 꺼내 내게 보인다. 그게 자그만치 1,640유로, 잠시 안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우리돈으로 환산해 보니 229만원, 나같은 서민으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내 눈에는 가까운 백화점 진열대에서 보던 여성용 핸드백과 별차이가 없어 보였건만 가방 하나가 나의 이탈리아 여행비용과 별반 차이가 없다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마트에 가면 콩나물 한봉지 집어들고 10원 20원 따지는 마누라지만 멀리 유럽까지 왔으니 혹시 값비싼 액세서리 하나 집어들고 ‘이거 얼마나 나갈까?’ 물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고 슬그머니 마누라 손을 끌고 가게문을 나서 맞은편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선다.
커피 한잔 들고 창가의 좌석에 앉아 이국의 정서에 취한 척 오가는 관광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바로 그때 내가 방금 나온 프라다매장의 쇼윈도 앞에서는 몇명의 가방을 든 젊은이가 모여들더니 즉석에서 악기를 꺼내들고 거리의 악사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밀라노를 찾아온 관광객에게 까짓 명품 핸드백 하나 보고 기죽지 말라는 듯 멋진 산타루치아를 연주하여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에 흥을 돋구어 준다.
방금 내가 풀이 죽어 나온 매장 입구에 등장하여 멋진 연주를 펼치는 젊은이들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류 브랜드샵이 즐비한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와 산탄드레아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고급 브랜드 프라다, 페라가모, 루이뷔통, 베르사체, 에트로가 나폴레오네에 있고 산탄드레아에 조르지오, 아르마니아, 샤넬, 에르메스, 반넬과 마리사 등등 소위 세계의 명품족들이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는 이탈리아의 가장 스타일리쉬한 고급 쇼핑가가 모여있는 밀라노의 쇼핑 중심가이다.
우리 서민에게는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 정도로 만족하고 두번째 코스로 정해진 이탈리아 북부의 고풍스런 도시 베로나를 향해 버스에 오르기로 했다.
<제2편에는 베로나와 베네치아 둘러보기>
첫댓글 글쓰느라 카페지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우리 이총무님 용케도 시간을 내서 여행을 잘 다녀왔구만. 덕분에 안방에서 이태리구경 잘했다. 특히 밀라노에 두오모대성당의 그 웅장함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 성전에서 미사에 참여해보고싶구나
고맙네 요한. 시간 내어 꼭 한번 다녀오게나. 나도 일에 ?기다보니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태리란 곳을 처음 가게 되었네. 밀라노만이 아니고 베로나에도 베네치아, 피렌체에도 오르비에또, 피사, 나폴리, 로마 등 둘러본 모든 도시마다 각기 웅장한 예술작품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당건물에 압도될 지경이더라고. 어디 성당 뿐이던가. 굳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온통 도시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하면 그 표현이 어울릴지...
냉정과 열정사이가 생각납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