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픽션]
하얀 눈 속의 붉은 잔상
1.
겨울이 깊어가는 어느 날, 윤희는 홀로 눈 덮인 숲을 걷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은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고, 그녀의 발밑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함몰되었다. 발자국은 금세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윤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발자국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발걸음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얼어붙어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그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깊은 진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사랑이었고, 고통이었으며, 역사가 그들의 삶에 새겨놓은 상처였다. 한때 그들은 함께 도망치려 했고, 이 숲 속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계획을 무참히 부서뜨렸다. 전쟁과 억압, 그리고 그들이 맞닥뜨린 시대의 폭력은 그들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2.
윤희는 과거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은 언제나 고통과 사랑이 교차하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서늘한 바람이 불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윤희는 당시 역사 강의에서 사회적 갈등과 변혁을 배웠지만, 정작 그 갈등과 변혁이 그녀의 삶 속으로 밀려들어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로를 의식하지 않던 두 사람은 우연히 시작된 대화 속에서 금세 빠져들었다.
그는 학문과 이념을 넘어, 삶의 깊은 본질을 보려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던 세상은 윤희가 알고 있던 세계보다 훨씬 복잡하고 거칠었다. 그는 사랑을 갈망했지만, 그 사랑은 쉽게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사회적 투쟁은 그를 끝없이 부수었고, 동시에 그 안에서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 몸부림쳤다. 그들의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랐고, 그 불길 속에서 서로를 태우며 그들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3.
눈발이 점점 더 거세졌다. 윤희는 눈 속을 더듬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렸다. "우린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어." 그날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러나 윤희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기에,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은 현실이었고, 그들의 사랑은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누구도 그것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윤희는 그날 밤 그와 함께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날의 눈밭, 그날의 숲, 그날의 침묵.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그들 안에 남아 있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통 또한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새겨진 흔적이자, 그들이 살아온 역사의 상처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윤희는 계속해서 그곳을 찾아왔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했고, 서로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무게는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그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까? 그 상처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4.
숲 깊은 곳에 도착한 윤희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날 밤, 그들은 서로를 안았고, 그들의 체온이 눈 속에 묻혀버린 듯 느껴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가 속삭였다.
"우린 왜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지키지 못했을까?"
윤희는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의 침묵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 사랑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 고통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흔적을 남긴 존재들이었으며, 그 흔적은 눈 속에 사라지는 발자국처럼 단순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깊숙이 새겨져, 세상과 어딘가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5.
윤희는 눈 속에 남은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의 기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섰다. 떠나간 그와의 사랑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그녀의 삶을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상처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눈이 내리는 숲 속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난 사랑과 고통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은 채, 영원히 그녀의 삶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윤희는 그 흔적을 따라 걸으며, 눈 속에 사라진 발자국을 다시 만들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