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자들 / 이졸데 카림
2장. 지금 - 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 일시: 2024년 10월 30일(수) 오후 8시.
* 형식: zoom 온라인
* 강사: 정혁현
* 참석자: 김선아, 박성호, 박연옥, 서선미, 서은혜, 안태형, 엄야샤르, 이샛별, 정단희, 정명수(10명)
2장 지금 - 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이민자들이 자기 문화는 던져버리고 새로운 문화를 완전히 수용해야 했던 동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통합을 말한다. 여기서 일정 기간의 적응을 통과한 후에도 사회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은 통합이 주는 거짓 착각이다. 이런 오해는 사회의 다양성이 여러 문화와 종교의 수집이라고 믿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다원화는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다. 다원화의 핵심 명제는 “우리 모두가 변한다”이다. 타자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으며 우리도 변화시킨다. 우리 시대에 다원화는 피해 갈 방법이 없는 기정사실이며 아무리 통합을 시도해도 다시 동질 사회로 돌아갈 길은 없다.
다원화는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사회는 예전 방식대로 자신의 문화로만 살 수 없다. 혼합사회에서 더는 당연한 문화, 당연한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외부의 관점은 오늘날 모든 정체성, 모든 문화의 필수 부분이며 이제 내부 관점의 부분이 되었다. 오늘날 소속관계는 매개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당연하게 맺을 수도 없다. 더 이상 온전하고 완전한 소속은 없기 때문에 사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하며 그 소속을 주장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통합을 위한 새로운 심리 정치적 전제이다.
당연함의 상실은 주도권의 상실이다. 이 과정은 기존에 주도권을 가졌던 이들에겐 고통의 과정이다. 다원화가 불러온 공존은 존중의 결과가 아닌 사회적 논쟁과 싸움의 결과이다. 또한 당연함의 상실은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에 ’ 정상‘이 무엇인지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 정상성과 당연함은 그 가치가 통용되는 집단에서만 가능할 뿐 다른 이들에겐 정상이 아니다. 배제와 제외의 역학이다.
오늘날의 변화는 정상형을 규정하지 않고 유형 자체를 해체한다. 일자로서의 유형이나 모두를 위한 구속력 있는 유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원화 사회로 넘어오기까지 개인주의는 3단계의 변화를 겪어 왔다.
1세대 개인주의는 (1800 - 1960년대) 신분등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만든 모순된 개인주의다. 1800년대의 민주화, 그리고 민족 형성과 함께 등장한다. 보편적 개인은 1인 1표 투표자이자 법적 주체로서 민주주의 주체의 기본이 된다. 이 개인주의는 자신의 구체적 특징이 배제된 추상적 동등체, 시투아앵으로서 사회화됨을 의미하며 일반적 형상을 제공하는 민족 유형의 기초가 되었다. 정당이나 교회, 학교 등 거대한 조직들이 교육이나 활동들을 통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제시하며 개인을 변화시켰다. 개인은 사회 공동체나 정당에 동등한 일원이 됨으로써 강력하고 분명한 정체성을 제공받았다.
신사회 운동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여성, 동성애, 환경운동 등 소수자 운동과 2세대 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정체성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2세대 개인주의(1960년대 이후) 세대는 기존의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택한 자기 진실성의 시대이다. 거대 조직의 침식 그리고 정치, 종교, 계급 규정적 생활 방식의 종말과 함께 독립된 존재들의 무리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같이 개인이 주장하는 정체성이 핵심이 되었고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 위해 싸운다. 동등이 아닌 차이와 불일치로 자기 정체성을 확증받았다.
정체성 정치의 목적은 시투아앵의 추상을 확장하여 그 일부가 되고 법적 주체이자 투표하는 주체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규범 안에 수용시키고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할 것인가?이다. 정체성 정치는 공인과 사인, 시민과 국민 사이에 있던 구별을 걷어내려는 시도였다. 민족 국가로부터 권위적으로 부여되었던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축소되고, 개인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게 된다. 젠더, 인종, 종교, 민족과 같은 정체성 요구를 다루는 일인칭의 정치이다.
3세대 개인주의는 다원화 그 자체이며 개인의 분열, 우연성과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을 표방한다.
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는 일시적인 권력의 대리자가 있을 뿐 권력의 소유자가 없는 ”권력의 빈 장소“이다. 즉 텅 비어 있는 민주주의 중심을 가려주었던 민족의 형상이 사라진 벌거벗은 민주주의 시대이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민족이라는 구체적 형상에서 개인의 정체성으로, 그리고 개인적 정체성에서 텅 빈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텅 빈 정체성의 자리로 인해 혼란과 불안을 느끼지만 더 이상 1세대 개인주의 시절처럼 민족과 같은 공적 정체성을 제공받지 못한다.
다원화는 우리의 정체성도 변화시켰다. 감소된 주체와 작아진 자아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보증해야 하는 시대이다. 다원화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고유한 정체성의 축소와 제한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은 언제나 다른 정체성과 나란히 서 있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소수자의 기존 경험이 사회 기본 경험이 되는 시대이다.
3세대 개인주의는 자기 내용이 없고 원하던 정체성이 아니다. 의지와 싸움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삶의 환경에서 나온 효과이자 결과이다. 다원화된 개인을 규정하는 자기 규칙은 없다. 다원화된 개인주의의 유일한 특징은 자기 정체성의 제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오래전에 다원화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전통이 부서지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불안정해졌음을 자각하며, 불안정한 정체성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힘들어한다. 누군가는 이를 자유와 해방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상실과 위협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이와 같은 불완전함은 우리가 하나의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하위 집단에 속해 살아간다는 걸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
과거 동질 사회의 주체였던 우리가 현재 서로 다른 주체로, 다원화된 주체로서 공통된 세계관도 없이 또 서로 공유한다는 확신도 없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원화된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정체성의 흔적이 벗겨진 중립성뿐이다. 다양하고 다원화된 개인들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법과 같이 추상적이지 않는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피에르 로장발롱의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해답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첫댓글 오늘 텍스트를 다 읽지 못해 걱정이 많았는데요. 발제문 덕분에 마음이 좀 느긋해졌습니다. 복잡한 내용 깔끔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깔끔 정리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