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38편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서론(序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란 무엇인가 ?
선가(禪家 선종)에는
《일전어(一轉語)》라고
하는 말이 있다.
선사(禪師, 佛祖師,
또는 선종의 큰 스승)가
거두절미(巨頭絶尾)하고
단 한마디
말(화두, 공안)로써
미혹(迷惑,
망령된 유혹)을 깨부수고
심기(心氣 마음의 기운)를
일전(一轉 하나로 전환)시켜서
전미개오(轉迷開悟,
미혹된 마음을 깨우침)하도록
하는 법문(法問)을
바로
화두(話頭, 본참화두,
또는 공안(空案))라고
말(언급)한다.
이러한
옛 선사(禪師),
또는 불조사(佛, 祖師)들의
선문답(禪問答 묻고 답함)과
가르침(敎義)들이
공안(空案)
화두(話頭)로
하나 둘 모아지고 이루어져
쌓이고 또 쌓여져서(累積)
편집(編集)되었다.
바로 그 것이
선어록(禪語錄 선종)의
가장 백미(白眉 최고봉)로서
손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이다.
이렇듯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는
다시 한번 우리들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그러므로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이던
불제자(佛弟子)
수행자(修行者)가
아니던
누구나 한 번씩은
《벽암록(碧巖錄)》의
일독(一讀)을 권(勸勉)하며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을
여기에
풀어서 해석(解釋)하고
자세히 설명(說明)하며
나와 함께
공부(功夫)를 하고저
기록(記錄)하고
올려 본다.
본론(本論)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空案))를 드는 법(法)
"
앉아서
공부에 장애(功夫障碍)를
느낄 시에는
서서 다니며 공부해도
무방한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서서 다니며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公案), 의심덩어리)를
참구(參求)해서
깨우침(無上正等覺) 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요(禪要)》의
편집 저자(著述者)였던
선사(禪師)
고봉화상(高峯原妙 和尙,
1238~1295)
중국
송(宋) 나라 말(末)
원(元) 나라 초기(初期)에
승려(僧侶)로서
원묘(高峯原妙)는
강소성 소주 오강 사람으로
호가 고봉(高峰)이다))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집편 저자(著述者)였던
원(元) 나라
단운지철(斷雲智徹,
1309-? ) 선사(禪師)께서도
그러하였다.
성상(聖像,
성스러운 존재, 형상) 앞에
향(香燭, 초와 향불)을
지피워 사르고
3년(3年 歲月,
즉, 1000일 기도의 뜻)을
죽기(멸사봉공,
전심전력, 또는, 사즉필생각오),
살기로 한정(限定)하고
이렇게
서원(誓願 맹세, 축원, 발원)
하였다.
"
제가(단운지철)
만약 게으르고 나태(懦怠)하여
앉거나 눕고자 하여
나의 몸(身體, 肉身)을
어떤 자리(席, 處所)나
평상(平床,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
기대거나 붙인다면
무간지옥(無間地獄,
산스크리트어 : Avīci 아비치)
또는 아비지옥(阿鼻地獄)
불교(佛敎)의
팔열지옥(八烈地獄) 가운데
가장 아래층(下段層)이며
가장
고통(苦痛)스러운
지옥(地獄)이다)) 속에
떨어져
영원히
이 곳(무간지옥,
아비지옥(阿鼻地獄))에서
벗어날 기약(期約,
약속의 때나 시기)이
없어 지이다.
"
이로부터
밤낮(晝夜間)으로
천천히 걸으며(話頭三昧行)
주위(修行處,
명상 참선 수행정진처)를
배회(倍廻, 반복하여
거듭 거듭 돌고 되돌아 참구함)
하였다.
두 끼의
공양(供養, 식사) 때에만
자리(坐定)에 앉았을 뿐
그밖에
차(茶)를 마시는
경우에도
역시 발(兩足)을
멈추지(停止) 않았으며
도우(道友, 도반,
불가의 벗, 친구, 스승)나
시주(施主)가 찾아와서
방문(訪問)했을 때에도 멈춰서
맞이하는(迎接) 법이
없었다.
또한
모든 말(諸言說辭辯)은
일체 절제(一切絶制 제한)
하였다.
단지
" 萬法歸一 一歸何處) "
일체(一切)의
모든 만법(萬法 諸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一歸)
그 하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
그 하나(一歸)는
어디(何處)로 돌아가는가 ?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公案), 의정,
의심덩어리)만을 부지런히
참구(參求)하고
발심(發心)을 일으켜
들었을 뿐이었다.
다만 이러한
"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
한 마디(句節)를 향하여
간절히
의심(疑心, 의정덩어리,
즉,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일으키고(發心)
지어서(수행정진)
나아갈 뿐이었다.
―[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
아침에
죽(米飮) 먹을 때와
점심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일체 앉거나
기대지도 않고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公案), 의심덩어리)를
배(腹式呼吸, 하단전)로
부지런히 참구(參究)하여
다만
의정(疑精,
화두(話頭, 공안(公案),
의심덩어리)만이
마음 속(心中)에서
분명(명명백백 밝디 밝음)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이르렀다고 한다.
※
무심삼매(無心三昧)
또는
일념무심삼매
(一念無心三昧)는
의심(疑心)과
화두(話頭 公案 의정)가
한 덩어리가 되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일체 다 잊어버리고
앉아(좌선수행) 있어도
밤(夜)인지
낮(晝)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자기 자신
몸뚱이(體, 肉身)까지
모두 다 잊어버리는
일념무심삼매
(一念無心三昧)에 깊이 들어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다가
홀연히
보는 찰나(刹那 순간)
듣는 찰나(刹那 순간)에
문득
화두가 깨어지고
박살이 나면서
자기 자신의
본마음(本性 自性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 삼매(三昧)는
선정(禪精 바라밀)의
또 다른 이름(명칭)으로
고요함
적멸(寂滅), 적정(寂靜)의
명상상태(瞑想 狀態)
또는
고도의 정신집중 상태를
말한다.
한자(漢字)로는
삼마지(三摩地 samādhi)
삼마제(三摩提)
또는 삼마제(三摩帝)로
음역(音譯)하며
등지(等持)
정정(正定)
정의(定意)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
또는
식려응심(息慮凝心)
등(etc)으로
번역한다.
※
그러므로
고봉화상(高峯原妙,
和尙, 1238~1295)께서도
거의 3년(三年歲月)이 되도록
하루에
두 끼니의 죽(米飮)과
밥 먹는 시간(供養時間)을
제외(制外)하고는
자리(席)에
앉지 않았고(不坐)
피곤(疲困)할 때에도
자리에 기대지 않고서
밤낮(晝夜)으로
동쪽과 서쪽(東西南北)으로
거닐고 다니며(포행)
《무(無)》자(字)
화두(話頭, 본참화두,
공안(公案), 의심덩어리)를
참구(參究)했다고 함은
주지(周知, 두루 여러 사람이
대부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의
사실이다.
이 외(以外)에
《선관책진(禪關策進)》의
독봉계선(毒峰季善,
남악하 27세 정통법맥 계승자)
선사(禪師)도
육계(陸溪)에서
정진(修行精進)할 때에
눕는 곳(臥處)을
만들지 아니하고
다만
한 개의 걸상(床)만을 놓고
정진(修行精進)하여
필경(必境 반드시)
깨침(무상정등각, 成佛道)으로
스스로 법칙(法則 규율 목적)을
삼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는
깜박 졸다가
깊은 밤중(夜深)이 된 것도
몰랐는데
그 후에 문득 깨어서는
마침내 걸상(床)마저 치우고
주야(晝夜 밤낯)로
오직 서서 다니며 참구(參求)
하였다.
한번은
벽(壁)에 기대어
깜박 졸은 지라
그 후(以後)로는
"
내(독봉계선)
다시는 벽(壁面)에도
기대지 않는다.
"
맹세하고
빈 땅 위를 홀로 걸으며
각고(刻苦)의
정진(修行精進)을 하여
마침내
자유(대자유 대자재)를
얻었다 한다.
한 마디로
수마(睡魔)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다니며
정진(修行精進)하는 것은
대체로
혼침이 심할 때에
주로 잠(수마)을 쫓고자
쓰는 방법이다.
물론
걸어다니면서도 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것은 잠깐뿐이고
앉아서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잠(수마)을 쫓기에
쉽고 또 수월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흔치 않은
예(例)이지만
이상과 같이
전적으로 서서 걸어다니며
수행(修行精進)하여
깨우친(無上正等覺)
예(例, 사례)가 있음도
주목(周目, 비교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