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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영양 스크랩 한후정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5 13.06.25 14: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한후정(寒後亭)
소 재 지 :  청기면 저리
건 축 주 :  경주김씨 문중
건축시기 :  1963년 건립
소 유 자 :  김세종

건축 이야기
1963년 덕은(德殷) 송재직(宋在直)이 지은 「한후정기(寒後亭記)」에 정자를 건립하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이 살던 시대에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이 평천(平泉)의 옛 터를 지키고는 있으나 공이 평소에 거처하던 당은 오랜 세월에 폐허가 됨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 옛터를 찾아 정자 하나를 세우고 당시의 당호(堂號)를 건 다음 동현(東賢) 익환(益煥)으로 하여금 나의 글을 청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위에서 말한 공은 선조(宣祖) 때 살던 김여양(金汝陽)이다. 그는 이곳에 집을 지어 ‘한후(寒後)’라고 이름을 짓고 살았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풍파에 무너져 집을 지었던 옛 땅에 후손들이 다시 정자를 세워 한후정이라 이름붙였다.

건축 구성
한후정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이고, 평면은 중앙의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은 2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우측은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는데 좌측 온돌방은 전면 퇴칸까지 돌출되어 1칸 반 규모가 되게 하였다. 전면에는 계자각을 두른 마루를 설치하였다. 오량가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이다.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 담장의 우측에는 2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워 정사로 출입하게 하였다.

현판
한후정(寒後亭)
한후정기(寒後亭記)
계묘년(癸卯年) 양복절(陽復節)에 덕은(德殷) 송재직(宋在直)이 쓴 기문이다.
한후정상량문(寒後亭上樑文)
풍산(豊山) 류현우(柳賢佑)가 쓴 상량문이다.
시판1(詩板1)
「원운(原韻)」와 「저동감회(苧洞感懷)」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있다.

누정 이야기
- 누정이야기
『논어(論語)』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후정은 여기에서 ‘한후(寒後)’라는 명칭을 따왔다. 이것은 추위가 있은 뒤에야 소나무가 맨 늦게 시드는 기절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한편, 태평한 때에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라가 어지러워져야만 비로소 소인인지 군자인지를 알 수 있다. 또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야만 충신(忠臣), 열사(烈士), 의사(義士)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한후정 원운(寒後亭原韻)
- 꿈 깨어 고향을 생각하다(夢覺憶覺溪里)

고향을 떠난 지 몇 해이던가 桑梓幾年隔
돌아가고 싶어도 나 혼자 여기 있네 思歸我獨留
님 그리움에 잠 못 이루면서도 戀君懷耿耿
강학하고 싶은 생각 또한 깊기만 하네 講書意悠悠
정학에 보탬이 되지 못함 못내 부끄러운데 正學慙無補
부질없는 영예만 훔칠까 두렵구나 浮名恐作偸
천리 내 고향 꿈 깨고 나니 覺來千里夢
외로운 달하나 주렴 끝에 떠있네 孤月出簾頭

위의 시 김여양이 지은 「한후정 원운(寒後亭原韻)」에는 ‘한후’로 자호한 그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재능이 있고, 뜻이 고상하고 맑은 성정을 엿볼 수 있다.


관련인물
- 김여양(金汝陽, 생몰년미상)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순왕 28대 손으로서 충북(忠北) 영동군(永同郡) 심천면(深川面) 각계리(覺溪里)에서 영양으로 입향하였다. 그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상촌공(桑村公)의 8세손으로 한산 모시 씨를 입향 때 가지고 왔으므로 동명(洞名)도 모시골(苧洞)로 불러져 내려오고 있다.
김여양은 경세의 큰 뜻을 품고도 청렴과 절개를 숭상하여 일찍부터 벼슬의 길을 마다하고 영양의 청기면 저리에 한후정(寒後亭)을 지어 송백(松柏)이 한겨울을 지나도 푸름을 잃지 않는 형상을 취하여 자신의 뜻을 보인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리고 유유자적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주변경관
- 은거하기에 좋은 곳
한후정(寒後亭)은 청기면(靑杞面) 모시골이라 불리는 저동(苧洞)에 있다. 입암면에서 반변천을 따라 31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왼쪽으로 나있는 청암교를 지나서 911번 지방도로를 타고 청기면 쪽으로 들어가서 영양 서석지를 지나 거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들판 가운데 한후정을 볼 수 있다. 정자 앞에는 부용봉(芙蓉峯)과 옥녀봉(玉女峯)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뒤에는 청계천이 굽이쳐 흘러 맑은 못을 이룬 연당석백수상(蓮塘石白水上)에 5칸 겹집으로 세워져 있다.
정자 앞에는 청기면소재지로 가는 911번 지방도로가 있으며, 2003년에 설립한 한후공원(寒後公園)이라는 비석이 놓여 있다. 그 뒤로 여름철에 일하는 사람들이나 길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도록 육각의 작은 원두막도 만들어 놓았고, 간이화장실도 있다.
송재직(宋在直)이 지은 「한후정기(寒後亭記)」에는 “교남의 영양은 본래 산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으니, 정령(精靈)이 아름답고 기운이 맑기로는 저동(苧洞)을 최고로 꼽는다. 산은 부용봉과 옥녀봉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물은 곡강(曲江)과 부연(釜淵)이 띠처럼 돌아 흐른다. 탄금대(彈琴臺)와 사현암(思賢巖)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하며, 오래된 잣나무와 소나무는 푸른 일산을 서로 맞댄 듯하여, 안으로는 널찍하고 밖으로는 빽빽하며, 앞면은 험준하고 뒷면은 평평하여 석인(碩人)과 군자(君子)가 은거하기에 마땅한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마을이야기

영양 > 영양청기권 > 청기면 저리
- 지역의 대부분이 높이 5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북동쪽에 위치한 일월산을 최고봉으로 하는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서쪽은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안동과 연결되고, 동쪽은 흥림산(興霖山)이 일월면과 영양읍의 접경에 자리하게 된다. 하천으로는 일월산 서쪽에서 발원(發源)한 청계천(靑溪川)이 산지사이를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며 그 유역에 충적평야를 형성시킨다. 산업은 쌀 등의 주곡 농업과 고추, 담배 등의 특종작물 재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황색 담배는 구매리, 산운리에서 많이 재배되고, 고운 빛깔과 높은 당도로 손꼽히는 고추는 행화리의 행전마을에서 주고 생산되고 있다. 이밖에 산운리의 조목마을은 전국 제일의 숫돌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주요 도로인 918번 지방도로가 북부를 동서로 횡단하여 일월면(日月面)과 봉화군(奉化郡) 재산면(才山面)으로 향한다.
청기면은 본래 청부현(靑鳧縣)의 대청부곡(大靑部曲)이었는데,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 소청부곡(小靑部曲)을 합하여 청기현으로 일컫게 되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청계(淸溪)라고 한다. 조선 태종 무렵에 와서 영양현에 통합되었지만 관아는 두지 않고 영해도호부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그 뒤 지역 사람들의 영양현 설치에 대한 상소가 잇달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1675년(숙종 1)에 현이 없어진 뒤에 영양현의 서쪽이라서 서면이 된다. 그 뒤 다시 서면은 서초(西初)와 서이(西二)의 두 개 면이 되고 1895년(고종 32) 지방의 관제를 고칠 때 서초를 청초(靑初)로, 서이를 청이(靑二)로 고쳐서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청초와 청이를 합하여 청기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가운데 저리(苧里)는 동쪽은 가는골, 서쪽은 모시골, 남쪽은 입암면 연당리, 북쪽은 상청리로 이어지는데 논이 많고 살기에 넉넉한 곳이다. 본래 영양군 청초면의 지역으로서 모시가 많이 생산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저곡(苧谷)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쳤는데, 소청동(小靑洞)의 일부를 떼어다가 합하여 저리라고 하여 청기면에 들어가게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모시골[苧洞], 개능골, 세월(洗越) 등이 있다. 모시골은 이곳에서 나는 모시가 여름철 양반들의 한복과 두루마리 감으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산물이 이곳에서 나기에 살림살이 또한 넉넉하였다. 저동이라 하면 모시가 많이 나는 곳, 부자가 많은 곳, 부자마을로 통하였는데 그러한 사연으로 인해서 마을 이름을 모시골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한편 개능골, 가는골, 간곡(澗谷), 세월(洗越)이라 불리는 마을은 옛날에 이 마을로 가자면 반드시 빨래 터를 지나야 했기에 세월이라고 하며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양곡(良谷)이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간곡으로 되었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 마을의 모양새가 범이 잠을 잔다는 뜻으로 범숙이라 하다가 범이 있으면 반드시 사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자가 있는 곳을 가마봉 또는 사자봉이라 했고, 범과 사자가 있으면 개가 있어야 했기에 마을 전체를 개능골이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가는골이 되었다고 한다. 가마봉-양곡-간곡의 걸림으로 보아 감골이 본래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양곡의 양(良)은 땅 이름을 고칠 때에 그칠 간(艮)에 점을 더하여 어질 양(良)으로 썼던 곳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가는골 바위인데 이를 일러 단장바우(丹粧岩)라고 한다. 옥녀봉의 옥녀가 가마소에서 머리를 빗고 이 바위에서 단장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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