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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2
- 세상에서 분별됨 -
행(行:행하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행함으로 시작하지 않고 앉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우리가 신성한 순서를 거스를 때마다 결과는 실패이다. 주 예수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그분 안에서 확실하게 안식하는 것이다. 그분이 보좌에 앉으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역량 안으로 인도된 것이다. 모든 진실된 영적인 체험은 다 안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앉는 것에서 시작한다 할지라도 앉은 다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 일단 우리가 합당하고 참되게 앉고 또한 앉아서 힘을 얻었다면 우리는 실제로 행하기 시작해야 한다. 앉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하늘에서의 위치를 말한다. 행함은 하늘에 속한 위치가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 이상 이 땅에서의 우리의 행위는 반드시 하늘에 속한 표시를 지녀야만 한다. 이것이 새로운 문제를 전개한다. 즉, 행함에 관하여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서신이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중의 첫 번째를 보기로 하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4:1-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4:17, 23).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5: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하, 10).
'행하다'라는 단어는 에베소서에서 여덟 번 사용되었는데, 원문의 뜻은 '도처에 다니다'로써 바울은 여기에서 비유의 방식으로 우리의 행함을 말한 것이다. 이 단어는 즉시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이 서신의 두 번째 요점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인의 교통이 에베소서에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주제임을 보았다. 이제 4장의 성별된 행함은 이러한 교통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부르심의 빛 가운데서 전진함에 있어 가정생활의 방면과 사회생활의 방면을 포함한 우리의 각종 관계 - 이웃,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 - 를 매우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늘에 속한 상황을 생활로 가져가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추상적이고 진실되지 않으며 단지 일종의 하늘에 속한 나타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써 우리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대한 진정한 시험이다. 분명히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요원한 하늘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상황을 우리의 거처와 사무실과 상점과 주방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 그리고 그곳에서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부모와 자녀들이 신약을 잘 찾아서 부모된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볼 것을 제안한다. 나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은 사람인 것을 많이 말했지만 가정에서의 행함에 있어서는 문제가 아주 많을까봐 두렵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도 꽤 많은 성경 구절이 있다. 에베소서 5장을 읽은 후에 고린도전서 7장을 자세히 읽고 진정한 결혼 생활 - 단지 이론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생활 - 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당신은 실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이제 그리스도인의 각 방면의 관계에 관해 하나님께서 이 단락에서 우리에게 펼쳐 놓은 명령이 얼마나 단순 명료한지를 보기로 하자. "모든 겸손과 ...서로 용납하고",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너희는 모든 악독과 ...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종들아 두려워하고...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며",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엡 4;2, 25, 26, 28, 31, 32, 5;21, 6;4, 5, 6). 이 명령보다 실제적인 것은 없다. 나는 주 예수 자신이 이 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것으로 당신을 일깨우겠다. 그분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이 단락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기 바란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희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아마도 당신은 '그러나 나는 행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불가능한 요구이다'라고 말하며, 내가 1장에서 말한 어느 기사(技師)와 같이 당신은 배반을 당했으며(아마도 대단한 배반일 것임) 당신 자신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 자신은 옳으나 당신의 원수의 행동은 전적으로 불의하므로, 그를 사랑하려는 것은 이상(理想)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버지의 완전함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날부터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단정짓는 데 바쁘다. 천연적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옮고 그름과 의와 불의의 표준을 정하고 이러한 것들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다르지만 우리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때부터 일종의 새로운 정의감이 우리 안에서 발전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도 선악의 문제에 상당히 바쁘다. 그러나 우리의 출발점은 그들과 다르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시다. 우리는 도덕의 옳고 그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무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으로 시작하며, 우리의 모든 문제는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이 옳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해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로 가득하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대접이 공평한가 공평하지 않은가를 스스로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표준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십자가를 지는 문제이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사람이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묻는 다면, 나는 "물론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꼭 옳아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준은 결코 '옳고 그름'이 아닌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원칙이 곧 우리 행동의 원칙이다. 하나님께 찬미하는 것은 그분은 해를 선한 사람에게도 비추시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추신다는 것이다. 그분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분의 은혜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옳고 그름'은 이방인과 세리의 원칙이다. 우리의 생활은 십자가와 아버지의 완전한 원칙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
"너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논에 물을 대는 이야기
중국 남부에 사는 한 형제가 산 중턱에 논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들었을 때 그는 발로 밟는 수차(水車)를 이용해서 웅덩이의 물을 논에 대었다. 그의 이웃집 사람도 그 아래에 논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이웃 사람은 그 형제의 논두렁에 구멍을 내어 모든 물이 자기 논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 형제는 구멍을 잘 메우고 더 많은 물을 논에 대었으나 그의 이웃 사람은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했고 그 후로도 이와 같은 일을 서너 차례 반복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과 상의했다. 그는 "나는 지금까지 인내하며 보복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그들이 이 일을 놓고 함께 기도한 후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옳은 일을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가련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옳은 일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형제는 매우 감동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기 논 밑에 있는 이웃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대 주고 오후에는 자기 논에 물을 대었다. 그랬더니 그의 논 안에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이웃 사람은 그의 행동에 매우 놀라서 그 까닭을 묻게 되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옳음 위에 서지 말라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당신의 옳음 위에 서지 말라. 당신이 십 리 길을 가 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의를 행했다고 생각지 말라. 십 리 길은 단지 십오 리, 이십 리 길의 상징일 뿐이다. 원칙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우리는 비호할 어떤 것도 없고 요구하거나 명령할 것도 없다. 우리는 다만 주어야 할 뿐이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결코 우리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은혜가 그분을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이 얻어야 할 것을 그들에게 주어야 하며 또한 많이 주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것으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우리가 실패하지만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실패를 시인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한 마땅히 행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행하길 원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렇게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마 5:45) 때문이다. 문제는 실제적인 아들의 자격이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자격을 얻게 하셨다"(엡 1;5, 원문 참조).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이미 성숙한 아들인 '성년'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틀린 것이다. 산상수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녀가 아들의 책임을 감당하는 정도는 그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영과 태도를 얼마나 나타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은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어 그분의 은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심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2, 원문 참조)고 말했다. 우리는 도전에 직면했다.우리는 아마도 마태복음 5장의 표준이 너무 높아서 올라갈 수 없다고 느낄지 모르나 바울은 에베소서의 이 단락에서 그 표준에 동의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 안에서 천연적인 것을 따르므로 그 표준 -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 5:3) - 에 이를 방법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대한 답안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그 비결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3:20)이다. 그는 또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말했다.
내적인 안식을 의뢰함
우리는 다시 에베소서의 첫째 단락으로 돌아왔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과 능력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능력을 얻는가? 내가 한마디로 여러분에게 해답을 주겠다. 그리스도인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에서 오는 것이다. 모든 앉은(坐) 사람은 다 행(行)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는 후자가 자연스럽게 전자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계속 사람들 앞에서 행할 수 있도록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단 그분 안에서 안식의 위치를 벗어나면 우리는 곧 넘어지게 되고 세상에서의 우리의 간증도 훼손된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그 안의 위치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며, 우리가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도 그분께 합당하게 된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전진을 예를 들어 설명하려 한다면 먼저 달리기를 하는 경주차를 생각하지 말고 차에 탄 사람을 생각하라. 더 좋은 것은 자동으로 움직이는 장애자용 차를 탄 장애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행하나 그는 또한 앉아 있다. 그는 계속 앉아 있음으로 계속 행한다. 그의 전진은 그가 앉은 그 위치를 따른 것이다. 물론 이것이 결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전한 그림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적인 안식을 의뢰하는 데 달려 있음을 일깨워 줄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말을 설명해 준다. 그는 먼저 앉는 것을 배웠다. 그는 하나님 안의 안식하는 곳으로 왔다. 결과적으로 그의 행함은 그의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그가 힘을 얻은 비결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앉은 사실을 보았으므로 그가 사람 앞에서 행한 것의 근원인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에베소의 성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라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밖으로 행함
시계는 어떻게 가는가? 스스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가? 당연히 그것이 가는 것은 먼저 밖의 힘의 추진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야만 그것은 비로소 정해진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도 정해진 일이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사도 바울은 빌립보인에게 편지하기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작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다(빌 2:12 하 -13). 하나님께서 안에서 역사하신 것을 당신은 밖으로 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비결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 역사하시게 하기를 원치 않고서 우리가 무엇을 해내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식한 일이다. 우리는 항상 온유와 온순을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온순을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려 하다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음을 알고 주님께 사랑을 구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여긴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
다시 예를 들겠다. 만일 당신을 자주 어려움에 빠뜨리고 당신이 매우 어렵다고 느끼는 어떤 형제가 있다 하자. 당신이 그를 대할 때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항상 당신의 분노를 일으킨다. 이것이 당신을 곤란하고 어렵게 한다.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응당 그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매우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여, 나에게 그에 대한 사랑을 더하여 주소서. 하나님, 나에게 사랑을 주소서"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단호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온갖 의지를 다 동원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당신이 간구한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려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앞에 가면 한 가지 일이 생겨 당신의 선한 의도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는 당신의 반응으로 격려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아 당신의 옛 분노에 즉시 불을 붙이게 되고, 당신은 기껏해야 다시 한번 예의로 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당신이 하나님께 사랑을 구한 것은 물론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잘못은 사랑을 어떤 물건이나 용품(用品)처럼 여긴 데 있다.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은 당신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은 오늘날 그분 이외에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주신 것이 없다. 성령은 이미 보내심을 받아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산출하시는데, 그분과 분리된 것이나 혹은 그분 이외의 어떤 것을 산출하시지 않는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며...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3:16,18). 우리 바깥에 나타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중대한 말씀을 회상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 곧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분은 "우리의 ... 이 되셨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을 이 구절의 말씀 안에 놓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잘 준비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자신이 우리의 부족한 그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성결을 미덕으로 여기고, 겸손을 은혜로 여기며, 사랑을 하나님께 구하는 은사로 여기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시다. 많은 경우 나에게 어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다른 한 인격으로 여기고 실제적으로 그분을 내게 필요한 어떤 '것'으로 깊이 느끼지 못했다. 근 이 년 동안 나는 이러한 흑암 속에서 더듬으며, 내가 느끼기에 반드시 조성되어야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미덕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오히려 헛수고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 1933년 - 빛이 하늘에서 내게 임했고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풍성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보았다. 내 생각과는 얼마나 다른지! 아, '사물'은 다 공허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 이외에 붙잡는 모든 것은 다 죽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보았다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될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의 성결은 인격이 있는 성결일 것이며, 우리의 사랑도 인격이 있는 사랑일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대한 응답이심을 게시하신다.
노력하지 말라
이제 다시 그 처리하기 어려운 형제에게 갈 때, 당신은 가기 전에 하나님께 이같이 말하라. "주여,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자신 안에서는 조금도 그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안에 다른 생명,즉 당신의 아들의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의 율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생명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며 그분의 생명을 의지하면 된다. 이같이 하면 당신은 담대하게 가서 그 형제를 만날 수 있고, 또한 그에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다! 당신은 완전히 부지불식간에('부지불식간에' 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각이 그 후에 오기 때문임) 매우 유쾌하게 말하게 되고, 부지불식간에 그를 사랑하게 되고, 부지불식간에 그를 당신의 형제로 여기게 된다. 당신은 자유롭게 진실한 교통안에서 그와 이야기하게 되며, 돌아갈 때에는 놀라서 말하기를 "어찌된 것이지? 내가 방금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니! 주님이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와 함께하셨고 그분의 사랑이 승리했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억지로' 행하는 것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대부분 거짓되다.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하고, '영적인'말을 하고, '영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이 모든 일을 한다. 여기에 포함된 노력은 마땅히 그들에게 어떤 것이 틀렸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억지로 어떤 것은 행하지 않고 어떤 것은 말하지 않으며 또 사람을 속이지 않으려 하는데,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낀다. 이것은 마치 중국인이 외국어를 해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항상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국어를 말할 때는 이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심지어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잊어버려도 여전히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흘러나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어떠함을 나타낸다.
생명의 율
우리의 생명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 안에 전달된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또한 이 생명의 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헛된 노력을 그치고 가장된 것을 버릴 것이다.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없다. 우리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되도록 외면적인 노력을 멈추는 것보다 더 축복된 일은 없다. 그럴 때 우리의 말과 기도와 생활은 억지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나타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를 발견했는가?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만큼 아름답고 선하시다!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했는가?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은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분의 생명은 이전처럼 능력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담대히 믿는 성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능력은 이전보다 못하지 않다.
왕국의 율법
우리의 주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분은 계속 반복하여 "너희가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의 요구와 그분 자신의 지고한 요구를 비교하신다. 그러나 이미 과거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첫 번째 표준(모세의 율법)에 이르기를 추구했으나 다 실패했다. 그런데도 주님은 어째서 더 높은 표준을 제시했는가? 이것은 오직 그분만이 이와 같이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믿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가장 엄격한 요구를 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틀림없이 우리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 제시된 왕국의 율법을 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율법은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이 그분의 자녀에게 얼마나 효력이 있는가에 대해 확신하심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이 세 장은 신성한 생명의 신성한 책임을 나타낸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요구가 이렇게 높은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두신 자원이 이러한 요구에 완전히 응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실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우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의지하여 그분이 하시게 해야 한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
우리가 지금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가? 그것은 옳은가 그른가에 문제인가? 아니면 선한가 악한가의 문제인가? 우리는 지혜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적용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끊임없이 그분의 옳고 그름의 표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며, 동시에 이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영 안의 마땅한 태도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아주 많은 일이 발생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의 느낌을 손상시키려 하며,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를 시험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원칙을 배워야 한다. 즉, 오늘날 우리의 표준은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인데, 이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엡 4:22-24). "주여, 저는 항변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다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요, 모든 것이 다 당신에게 있습니다!" 나는 나이 든 일본 자매 한 분을 아는데, 그녀는 집에 도둑이 들어 소란을 겪은 적이 있다. 그녀는 간단하지만 실제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여 그에게 밥을 한 그릇 주고 나서 그녀의 집 열쇠를 주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부끄러워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간증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오늘날 그리스도 안의 형제가 되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들이 많은 교리를 알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모든 것에 관해 알지만, 4장부터 6장까지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모순이 있는 것은 교리가 없느니만 못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일을 분부하셨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의지해 그분이 친히 그분이 분부하신 것을 실행하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사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은 다만 우리가 옳다는 것을 초월하여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주시기 원한다.
세월을 아끼라
그리스도인의 행함이라는 이 주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한 것 이외에도 더 진보된 말을 추가해야 한다. '행하다(行)'라는 말에는 설명한 것 이외에도 더 진보된 뜻이 있다. '행하다(行)'라는 말은 행위나 거동을 가리키지만 전진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전진한다',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목표를 향해 전진하느냐 하는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당신은 위의 성경 구절에서 지혜 있는 자와 우매한 자의 차이점과 관련된 시간의 관념을 주의할 수 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세월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이제 두 군데의 다른 성경 구절을 제시하겠는데, 똑같이 이러한 일들을 제기하고 논한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져가니... 저희가 사러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마25:1-13).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5).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이루심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경의 많은 장과 절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그분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확증한다. 우리의 구주는 철저하게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설사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절반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종적으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이면 이 점이 우리가 다음에 말하려는 것의 배경이므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같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빌 1:16).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분은 "능히...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는" 분이시다(유24, 딤후 1:12, 엡 3:20 참조).
첫 열매와 곡식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의 주관적인 방면 - 지금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 가운데 실제적으로 나타난 효과 - 을 본다면 우리는 곧 시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계시록 14장에는 '처음 익은 열매'(4절)가 있고 '곡식'(15절)이 있다. '곡식'과 '처음 익은 열매'의 차이는 무엇인가? 물론 이것은 다 농작물이므로 품질의 문제는 아니다. 차이는 성숙되는 시간의 빠르고 늦음에 있다. 어떤 열매가 다른 열매보다 먼저 익는다면 그것이 '처음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다.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나의 고향은 귤로 유명하다. 물론 편견일 수 있겠지만, 나는 세계의 어떤 지방에도 그와 같은 귤은 없다고 믿는다. 귤이 익을 무렵에는 산 위의 모든 귤나무가 다 청록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좀더 자세히 본다면 나뭇잎 사이로 금빛의 귤을 군데군데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금빛의 귤이 짙은 녹색의 나무에 산재한 풍경은 정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다. 나중에 모든 귤이 다 익으면 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러나 먼저 수확하는 것은 처음 익은 열매들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따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파는데, 항상 수확기 가격의 세 배이다.
슬기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
모든 열매는 늦든 빠르든 다 익게 된다. 그러나 어린양은 '처음 익은 열매'를 찾는다. 비유에서 말한 '슬기 있는 자'는 더 잘 행한 자가 아니라 비교적 일찍 잘 행한 자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도 처녀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일 뿐 가짜는 아니다. 그들도 슬기로운 처녀들과 함께 나가서 신랑을 맞았다. 그들도 등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등도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지체하시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들의 등은 꺼져 가는데 그들은 그릇에 기름을 예비해 두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도 그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에 의아해한다. 만일 그들이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려진(고후 11;2) 그분의 참된 자녀를 대표한다면 그분이 어떻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유가 말 해 주는 교훈의 중점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자녀들이 장래에 그분을 섬기는 특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다섯 사람이 문 앞에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문인가? 물론 구원의 문은 아니다. 당신이 만일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면 하늘 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 하신 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상해의 한 재판관의 아들이 운전 부주의로 즉결 심판에 넘겨졌다. 그는 법정에 들어서자 그의 아버지가 판사석에 앉아 있는 것을 알았다. 법정의 심문 절차는 세계 어디서나 거의 비슷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삽니까?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라는 등의 심문을 했다. 그는 아주 놀라서 그의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를 모른단 말씀입니까?" 라고 말했더니, 그의 아버지는 책상을 쾅쾅 치면서 "젊은이,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고 또 어디에 삽니까?" 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알지만 그곳에서는 그를 모른다. 비록 그가 재판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반드시 법원의 절차를 따라야 하고 또한 벌금도 내야 한다. 그렇다. 열 처녀는 다 등 안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미련한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있었으며 사람 앞에서도 간증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간증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하룻밤을 넘길 식량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으나 우리는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긴한 때에 이르러서 그들은 반드시 나가서 기름을 더 사야 했다. 물론 결국에는 열 사람 모두 충분한기름을 가졌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슬기로운 사람은 언제나 충분한 기름이 있었고, 미련한 사람은 결국에는 쓸 기름이 충분했지만 기름을 준비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간의 문제이며, 또한 주님이 이 비유 마지막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결론의 말씀은 단지 제자들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깨어 있는 제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마태복음 25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며, 성령께서 그분의 종에게 임하여 그들로 영적인 은사를 얻게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의 문제로서 곧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든지 간에 우리가 그 영의 끊임없는 놀라운 내적 공급으로 말미암아 빛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이 비유에는 등이 있고 그릇도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등이요 또한 그릇이다). 이러한 내적인 충만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어찌 하늘에 속한 영세(永世) 안에 살 수 있겠는가? 이것에 예외일 수 있는 처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능한 모든 단계를 취해서 지금 우리를 이끌어그 충만을 알게 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성령과 관련하여 사용된 보기 드믄 표현이다. "너희 자신을 끊임없이 충만케 하라." 이것은 오순절과 같은 그런 관문을 통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속 있어야 할 상태이다. 이것은 밖의 일이 아니라 안의 일이며, 영적인 은사나 외면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영 안에서 친히 임재하시고 활동하시어 그릇 안의 빛이 꺼져 가지 않고 필요하다면 밤새도록 탈 수 있게 보증하시는 것이다.
보좌 앞에 새 노래는 부름
더욱이 이것은 완전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의 구절(엡 5:19)이 확실히 말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함께 누리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이 구절의 문맥상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뿐만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독창은 아주 쉽지만 사중창이나 이중창등의 중창은 화음과 박자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 영안의 하나에 관한 메시지는 에베소서의 둘째 단락의 중심이다(4:3, 15-16). 그 영의 충만은 우리를 보좌 앞에서 함께 새 노래를 부르게 한다(계 14:3).
하나님 뜻을 분명히 앎
나는 우리의 중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말하는데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는 단지 이 점에 있다. 당신이 만일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조금 더 일찍 이 충만을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미련한 자라면 나중으로 미룰 것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모요, 또 어떤 사람은 자녀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성격에 있어서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자녀는 즉시 순종하나 어떤 자녀는 미루면서 순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진실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여 그에게 순종을 회피할 여지를 준다면, 사실상 순종하기를 미루기만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말이 운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순종한 자녀가 당연히 더 슬기로운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별것 아니라면 회피하려는 생각은 그리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은 분이시고 변치 않는 뜻을 가지셨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세월을 아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을 공급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퉁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3:19) 되는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성경은 미련한 자가 어떻게 기름을 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도 그분이 결국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성숙한 단계로 이끌도록 어떤 진일보한 절차를 취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관심할 바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는 것은 '처음 익은 열매'이다. 우리는 다만 전진하도록 자극을 받을 뿐, 전진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하게 된 일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의 길
당신이 회피하거나 도망한다면 성숙될 수 있는 길은 없다. 회피한다면 성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지혜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세월을 아낀다. 나의 만년필에 잉크가 가득 차 있어 내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과 합하여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을 그분께 드리고 합당한 그릇이 되어 언제든지 그분이 쓰시도록 한다.
바울의 본
사도 바울을 보라. 그의 열심은 타는 불과 같았다. 그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때가 찰'(엡 1:9) 때에 있음을 보았다. 그는 '오는 여러 세대'에 완전히 나타날 구원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이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이 있는 사람이었다(엡 2:7, 1:12). 이것으로 비추어 볼 때 그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행했다. 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달렸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사람이 영적인 일을 깨닫고 주님을 따라 전진하기 시작할 때에 나는 마음속에서 이러한 것을 느낀다. "아, 그들이 5년 일찍 이 일을 보았더라면!" 우리가 전진할지라도 시간을 너무도 짧으므로 이같은 간절함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주님이 반드시 무엇을 얻으셔야 하는가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주님은 잘 예비된 그릇을 얻기를 원하신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 세대가 악하기'(엡 5:16). 때문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의 상황은 급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다루실지도 모른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고전5:8)라고 말했다. 그는 중대한 관문을 통과하여 그가 그 당시에 이르러야 하는 곳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힘을 다해 달렸다. 이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어떤 일을 속히 행하셔서 시간을 단축하셔야만 하는지도 모르며, 또한 그분은 반드시 그렇게 많이 하셔야만 한다. 우리 마음의 눈이 빛 비춤을 받아 그분의 은혜의 부르심이 얼마나 소망이 있는지를 알기 원하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뜻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 되어 행할 뿐 아니라 더욱 달리기를 원한다(엡 1:18, 5:17). 주님은 항상 간절한 사람을 좋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