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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옷 제작
39:1-21
1.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2. 그가 또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을 만들었으되 3.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실을 만들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에 섞어 공교히 짜고
4. 에봇을 위하여 견대를 만들어 그 두 끝에 달아 서로 연하게 하고
5. 에봇 위에 에봇을 매는 띠를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붙여 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6. 그들이 또 호마노를 깎아 금테에 물려 인을 새김 같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그것에 새겨
7. 에봇 견대에 달아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 보석을 삼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8. 그가 또 흉패를 공교히 짜되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하였으니
9. 그것의 장이 한 뼘, 광이 한 뼘으로 네모 반듯하고 두 겹이며
10. 그것에 네 줄 보석을 물렸으니 곧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 첫 줄이요
11.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2. 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13. 네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이라 다 금테에 물렸으니
14.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인을 새김 같이 그 열 두 지파의 각 이름을 새겼으며
15. 그들이 또 정금으로 사슬을 노끈처럼 땋아 흉패에 붙이고
16. 또 금테 둘과 금고리 둘을 만들어 그 두 고리를 흉패 두 끝에 달고
17. 그 두 땋은 금사슬을 흉패 끝 두 고리에 꿰어 매었으며
18. 그 땋은 두 사슬의 다른 두 끝을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에 매고
19.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두 끝에 달았으니 곧 그 에봇에 대한 안쪽 가에 달았으며
20.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에봇 앞 두 견대 아래 매는 자리 가까운 편 곧 공교히 짠 에봇 띠 윗편에 달고
21. 청색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공교히 짠 에봇 띠 위에 붙여서 에봇을 떠나지 않게 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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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입는 옷은 보통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을 보호하는 기능 입니다.
몸이 춥지 않게 따뜻하게 하든지, 안전하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패션기능입니다.
특히 여성들은 할 수만 있으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능보다 패션에 더 중점을 둡니다.
셋째는 신분을 나타냅니다.
교복을 입은 사람은 학생이며 하얀 가운을 입고 목에 청진기를 걸쳤다면 의사일 것입니다.
특히 가슴에 훈장을 단 군복을 입은 사람은 공을 세운 군인일 것이고,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체육복을 입은 사람들은 아마 국가대표 운동선수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 그 옷이 자기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옷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입는 옷은 이세상의 옷 중에서 가장 특이한 옷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 중에도 속옷 위에 입는 에봇이라는 조끼 같은 옷이 있는데 이 옷에는 열두 개의 보석이 가슴에 달려있고 그 옷의 양 어깨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여섯 개씩 새겨진 보석이 달려있었습니다.
이 옷의 특징은 사람이 고안하거나 디자인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안하시고 명령하셔서 만든 것이고, 이 옷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 화려하게 만든 옷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점이 이 옷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본문에도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만들었다는 말씀을 단락마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제사장에 임직되었다 하더라도 제사장이 이 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옷을 입지 않고 나아가면 제사장은 즉사하였으나, 이 옷을 입고 나아가서 제사하면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대한 설명은 작년 7월에 출 28장을 설교할 이미 상세히 말씀드렸지만 아마 많이 잊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 명령하신 그대로 그 옷을 정성껏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옷은 사람들 앞에서 뽐내라고 만든 옷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성소와 지성소,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는 옷으로서 오직 하나님이 보시려고 입으라고 하신 옷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패션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옷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특별한 옷을 만들어 입고 제사하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인간은 죄인이므로 죄 된 몸을 온전히 가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출28:4에 의하면 제사장이 입는 옷중에 반포 속옷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말로 하면 속바지입니다. 출39:27, 28에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 “가는 베실로 짜서 세마포 속바지를 만들고” 라고 하셨습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인데, 반드시 이것을 속에 입고서 그 위에 겉옷을 입게 되어있었습니다. 에봇 받침이 되는 이 속옷은 절대 제사장의 발이 보이지 않도록 땅에 끌리게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속에는 반드시 팬티를 입어야 했고 머리에는 관을 써야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의 부끄러운 육체를 가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는 수치와 두려움이 없었고 그래서 옷도 입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에 부끄럽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무화과 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옷은 원래 수치를 가리는 수단이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의 죄를 치료하는 곳입니다. 이미 지은 죄는 짐승을 잡아서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받아서 형벌이 내리지 않게 하는 곳이고, 아직 짓지 아니한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심판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경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일을 감당하는 제사장은 당연히 깨끗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는 너의 죄 된 몸을 완전히 가리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레6:10에서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라고 하셨고, 출 28:42-43에서는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고의라는 것은 팬티입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중동의 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속에 팬티를 입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에게는 철저하게 팬티를 입게 하셨습니다. 네가 남의 죄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앞에 나아오려면 우선 네 몸부터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죄인 중에서 임시로 뽑은 사람이지 정말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를 가진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똑같은 죄인이면서 하나님앞에 남의 죄를 위해서 제사하고 제물을 드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목사도 하나님이 보실 때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하러 단에 올라갈 때에는, 너 자신부터 죄가 없는지 살피고 자신을 단속하는 생활을 하면서 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는, 천주교처럼 “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종이다.” 라는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는 것이 아니라 “나는 더럽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내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날까 부끄럽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제사장의 옷처럼 자기를 감추는 옷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그것을 모르고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라고 박사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이나 종교개혁정신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가운을 입는 것도 예배당 분위기를 멋지게 하려는 패션의 목적이 아니라 각기 자기가 입은 옷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덮어씌우는 의미가 더 큽니다. 영국이나 스콧틀랜드의 전통 있는 교회는 반주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자기의 기량을 뽐내면서 반주하는 교만을 행하지 못하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랍니다. 목사고 장로고 성가대원이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올라올 때에는 가운을 입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는 죄가 가득해서 부끄럽고 송구해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자세입니다.
출 20:26에 보면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고 하시어, 제사장이 긴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제사장도 죄 된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앞에 나갈 때 죄를 덮어야 하고 나의 죄를 온전히 덮어주실 분을 만나야 합니다. 이 긴 옷은 에봇으로 제사장을 덮어줌같이 장차 너희의 죄를 온전히 덮어주고 사해줄 구원자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둘째, 제사장은 그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데려가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당시에 그렇게 귀한 청색, 자색, 홍색 베실로 수놓고 금을 얇게 쳐서 실을 만들어 금실과 함께 짜서 천을 만든 비싼 것이었고, 어깨에는 견대라는 것을 얹게 하되 그 위에는 호마노라는 보석에 열두지파의 이름을 새겨 물리고, 가슴에는 열 두 보석이 달린 흉패를 달았습니다. 제사장은 그 옷을 입고서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사장이 그 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갈 때 위에서 보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제사장의 어깨위에 얹혀있는 열두 이름들을 보십니다.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당신이 조성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께로 오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견대에 물릴 보석들을 지정하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기에 새길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조성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이름을 거기에 새겨 어깨에 메고 내게 오라고 하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누가 만약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간다고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여당의 대표라도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미리 깨끗한 명함을 제출하고 면회청원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예약된 날짜에 들어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문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날 것입니다.
제사장이 양 어깨 위의 보석에 이름 열둘을 달고 오라는 것은, “너는 내게 들어올 때 그들을 데리고 오라. 그들이 내게 나아올 때 내가 맞아주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주 예수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앞에 제출되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골고다에서 우리 대신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분께 우리의 일을 말씀드리면 거절하시겠습니까? 심지어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도 아까지 않고 내어주신 그분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출입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제사장의 옷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의 성소에도 평민은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이스라엘이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 지성소에서 그들의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갔지요? 제사장의 어깨에 얹혀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까요? 다만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힘입어, 십자기를 지신 그분의 어깨에 얹혀서만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깨는 짐을 짊어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려가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갈 수 없는 그곳을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어깨에 우리를 메고 가셔야만 하나님의 보좌 앞 영생의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깨받이는 튼튼하게 에봇에 붙어있었고, 멜빵으로 제사장의 몸에 묶었기 때문에 그 어깨받이에 달려있는 열두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은 제사장이 아무리 뛰고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처럼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얻은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는 그리스도의 견고한 어깨에 붙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견고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는 영원히 견고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 때문에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을 달고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고 구원하신 성도들을 당신의 보석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눈으로 보실 때에 우리는 음식 썩은 쓰레기보다도 더 냄새나고 추한 죄인이고, 우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리는 구제불능이어서 스스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하나님은 그런 인생들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큼 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합시다.
이 보석들은 모두가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빛도 다릅니다. 이 보석들을 보면 어떤 것은 빨간색이고 어떤 것은 파란색이고 어떤 것은 노란 색이고 어떤 것은 아주 단단하고 어떤 것은 좀 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보석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성격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지만 다 같이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을 모두 보석같이 취급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그렇게 귀한 존재로 여기시는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우리를 보배처럼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표현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원인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입니다. 자기의 아들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다가 그들을 위하여 죽은 존재들, 아들의 애틋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달린 보석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결혼하고 멀리 분가를 해서 나가도 아직도 그 자식이 가슴속에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자식생각 뿐이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거나 무슨 사고가 났다고 뉴스가 전해지거나 하는 어떤 경우에도 가장먼저 자식을 떠올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죽기 까지는 자식 걱정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그렇게 당신의 가슴에 품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그의 서신들마다에서 자기는 지금 그분 때문에, 그 안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안에” “그 안에” 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열두 보석을 열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흉패의 보석은 각기 자기자리에 세팅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에 네 줄 보석을 물렸으니 곧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이라. 다 금 테에 물렸으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10-14)
하나님은 이 보석들을 따로 따로 하나씩 두게 하시지 않고 열둘을 한 판에 물려 자리까지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들 열 두 개가 합해져 있을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보석이지 이들이 따로따로면 하나님 앞에 보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은 서로가 하나 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서 모두 자기만 잘나서 남을 미워하고 반 공동체적인 모습을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가 죽어지더라도 하나의 보석에 물려있어야 구원을 받지 자기만 튀려고 공동체에서 떨어지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도 구원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뉠 수가 없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이 제사장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합니다.
이 제사장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요? 백성의 죄를 위해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요, 그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피를 바칠 때 생명 걸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요, 그때 그는 자기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이름을 어깨와 가슴에 달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날마다 기도를 상징하는 향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죄인인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서 남의 피인 짐승의 피를 바친다고 해서 과연 죄인의 죄가 사해졌겠습니까? 이미 말씀 드린대로 이것은 하나의 교육용 제사였습니다. 장차 이처럼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실 진짜 제사장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 상징인 제사와 함께 진짜 제사장이 오신다는 예언도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그 예언의 당사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요, 그분은 당신의 피로 인류의 죄를 속하실 분이요, 당신의 공로를 죄에서 건진 사람들을 보배처럼 여기고 가슴에 안고, 어깨에 메고 하나님의 보좌 안으로 들어가실 분이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계속하실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분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옷은 청색실로 수를 놓았고,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피 흘리실 분이므로 피의 색깔인 홍색 실로 수를 놓았으며, 그분은 비록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으나 본래 티 없이 맑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옷은 하얀 세마포가 바탕이고, 그분은 비록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처참하게 죽으셨으나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에 그분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서 금실로 공교히 짰고, 그는 영원 전부터 평강의 왕이셨고 영원히 왕 중의 왕이시기에 왕의 색깔인 자색 실로 제사장의 옷에 수를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로운 옷을 입고 백성들을 위하여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이름을 보석에 새겨 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그 제사장은,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뽑힌 또 한사람의 죄인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어 인류의 구주가 되시고도 남는 예수님 한분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히3:1에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으며,
히4:14-15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하였습니다.
히9:11-10:1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심으로 제사가 완성되었고,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여 이 세상의 이웃을 구원하는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세상의 제사장입니다.
벧전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성도는 제사장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시대의 모든 신자들이 각자 직접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요, 오늘 이웃을 위하여 제사장처럼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웃이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복음으로 전도하는 이 시대의 제사장이 됩시다. 그 일이 우리의 힘이요 축복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