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19-26 (슬픈 노래,기쁜노래)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 3: 19-26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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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고생과 근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불행과 고통이 있는가? 왜 홍수와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무서운 질병으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가? 라고 의문을 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에 직면하여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법 없이 살 사람인데 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저토록 큰 고통을 당해야 하나?" 의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귀하신 성도 여러분, 본문 렘·애가 3:33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고통과 한란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 고초(苦楚)와 재난(災難),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回想)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본문 19-21)
본서의 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알려진 대로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哭泣)하리로다."
그는 또한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야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요시야왕이 죽자 궁궐에서 배척을 당해 쫓겨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심지어 성전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탄식과 눈물로 예루살렘의 타락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서입니다.
귀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은 지금 IMF라는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슬픔의 애가가 들려옵니다. 도산한 기업가의 비가(悲歌), 단란했던 가정이 파괴되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가족들의 비가, 끼니를 걸러 배고파우는 아이들의 비가(.悲歌)....
그러면 당시 예레미야의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하나님의 노(怒)하신 매로 인한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도 때로는 진노의 매를 드시기도 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때로는 매를 들어 때리듯이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의 매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매를 말합니다. 이 나라는 지금 주님께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 백성에게 깨달음을 주시려는 의도로 때리시는 매인 것입니다.
2.기도를 물리치심에 대한 눈물입니다.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니 애통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사람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전도를 다녀보면 불신자들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저는 목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기도의 응답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얕잡아 봐서는 안됩니다.저는 이번 폭우의 재앙이 이곳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 기도해도 이뤄지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능력있는 기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의 난치병을 고쳐달라고 3번씩이나 기도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분문에 보니까 예레미야는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이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계획하는 일들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첩첩산중처럼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3.심신의 질병으로 인한 눈물입니다.
11절에 보면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 적막하게 하셨고,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저는 어제 매곡리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나무 그늘아래 둘러앉아 쉬고 계셨는데 한 할머니께서 앞이 안보인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의 눈에 손을 대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주께서 귀한 딸의 시력을 회복하시고 주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산천초목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그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나 같은 것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시니 고맙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4.조롱거리가 되어서 흘린 눈물입니다.
조롱거리, 비웃음과 우롱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패하고 넘어지면 형제와 친구사이에 그리고 사회에서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저는 수일 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가니 한 젊은이가 손수레를 끌고 빈 박스를 줍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직자로구나.'하는 생각에 그 동안 집에 모아둔 폐품을 주면서 전도할 생각으로 대화를 청했더니, 그 분은 인천에서 슈퍼마켙을 운영했는데 IMF가 닥쳐 그만 파탄이 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가출하고 딸마저 고아원에 맡겨야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비웃음거리가 되기 싫어 이렇게 한푼, 두푼 벌어 먹고 산다며 목소리가 젖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웃음 당하는 것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치욕 중에 그런 치욕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나의 과실이나 부도덕이 아니라 애매하게도 삶의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이나, 아니면 주님의 일을 하다가 받는 조롱이라면 더욱 참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애매히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처럼 비웃음과 조롱을 당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실패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 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도다 하였도다."(17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주님의 본심이 아니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낙망이 변하여 소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게 될 때,
5.중심(中心)에 회상(回想)하여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J. 칼빈은 "이 세상에서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중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므로 근심과 고통이 없고 슬픔과 병이 없는 눈물을 씻겨주시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희망은 잠깐입니다. 과자를 손에 쥔 아이의 기쁨과 같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인생의 노력에 대해 "공허하고 공허하며 공허하고 공허하니 모든 것이 공허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의 눈물을 주심은 저 하늘에 소망을 갖게 하심임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6.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매는 것이 좋습니다(27절).
사람이 젊었을 때 눈물을 흘러보는 경험은 자신을 위해서 좋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눈물을 모르고 삽니다. 부모님께 말만하면 다 들어주기 때문에 결코 어려움을 모릅니다. 여러분, 젊은이의 값진 눈물의 진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그리 인기가 없는 아비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가족에게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큰딸이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 별로 관심을 못 가졌는지라 중학생이 되어 멋진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딸의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아빠로서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모두가 교복 위에 검정 코트를 입고 등교를 하는데 전교생 중에 오직 제 큰딸만 코트 없이 학교에 다닌다고 딸의 친구가 하는 얘기를 얘 엄마가 듣게된 것입니다. 목회에 온 신경을 쏟다보니 자녀에게 너무나 등한했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새벽기도 시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그 아이가 중학교 과정을 열심히 마치고, 현재 고3으로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바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버리지 않으실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렘 애가3:30-32)
7.우리 스스로 행위를 돌아보고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
주께서 왜?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눈물을 주셨는가?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행위를 반성해봐야 합니다. 독일 유학 다녀온 선배가 한국에 와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떻게 국민소득 1만 불도 안돼는 나라가 4만 불의 독일보다 더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잘먹고 잘입는지, 그리고 주말마다 놀러 다니는지 등, 참으로 열거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심의 눈물을 흘리게 될 때, '왜 내가 이렇게 되었나' 스스로 행위를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화(禍)와 복(福)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있음을 확신합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義)의 평간(平康)의 열매를 맺는"(히12:11) 법입니다.
8. 인내와 능력을 주시려고 오늘의 눈물을 주셨습니다.
미국 어느 잡지에 수령 5천년 짜리 나무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떻게 나무가 5천년이나 살았을까' 다들 의아해했으며, 세계 유명한 식물학자들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사 결과 바위뿐인 척박한 땅, 거센 바람, 적은 수분 등의 환경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주위의 열악한 조건에 살아남기 위해 이 나무는 튼튼하고 긴긴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려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난이나 시련, 역경이 닥치더라도 힘차게 견뎌내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려고, 때로는 하나님 당신께서 원(願)치 않는 시련과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엔 강물이 얼마나 거센지 그 강을 건너는 사람은 누구나 바윗돌을 하나씩 짊어지고 건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거우면 물에 잘 떠내려가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누군가 바윗돌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귀찮다고 그냥 강을 건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벧전 5:7)
여러분의 슬픈 노래가 신령한 소망의 노래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고난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이를 믿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평강이 세세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