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668)과 부흥 운동
나․당 연합군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 시작(661)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러, 이듬해 당의 수륙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도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연개소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참패하여 철수하고, 신라군(김유신)도 혹독한 추위와 고구려군의 저항에 막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구려 말의 정세(잦은 전쟁으로 국력 소모, 백제 멸망으로 외교적 고립, 거란 ․ 말갈족의 당 복속으로 요동 방어선 약화, 연개소문 사후의 권력 투쟁 - 665년.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남건, 남산이 남생 축출하자 당에 투항하여 원병 요청. 연정토 신라 투항, 남생은 당에 항복하여 당의 고구려 공격 때 길잡이가 되었다.) → 국력 약화 → 나 ․ 당 연합군(신라 - 김인문, 당 - 이세적)의 고구려 공격 → 이세적이 이끈 당군은 요동 방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고,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도 평양성에서 당군에 합세하였다. →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면서 1년간이나 항거하였지만 끝내 성이 함락되어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669) 2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669년에는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약 2만 8천여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 당의 고구려 지배 시작 →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에 대해 고구려 유민(遺民)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다.
♣ 고구려와 백제의 공통된 멸망 원인
① 국론(國論, 국민 또는 사회 일반의 공통된 의견) 분열
②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으로 일체감 상실되어 국가의 힘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 못함
③ 지나치게 힘을 숭상하고 전쟁을 선호(고구려)
3) 부흥(復興.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운동
① 백제 부흥 운동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 (遺民.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들은 곧 재기하여 힘을 모으는데 노력하였으며, 백제의 부흥 운동은 일본과 고구려의 후원을 얻어 국제적인 양상을 나타내는 등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부흥군의 왕성(王城)으로 보이는 주류성을 비롯하여 한때는 2백여 성이 백제 부흥 운동에 호응할 정도였으나, 이러한 규모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성이 220이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백제의 거의 전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 주류성(복신· 도침· 왕자 풍), 임존성(흑치상지) 중심으로 전개 → 지배층의 내분(內分) 발생, 일본 지원군 백강 전투에서 패배 → 백제 부흥 운동 실패로 끝남
② 고구려 부흥 운동
668년 평양성을 함락한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전역(全域)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고구려인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력한 고구려인 2만 8000여 호를 중국의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러한 당나라의 정책에 반대하여 669년 대형(大兄)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을 근거지로 하고 안승(安勝)을 왕으로 옹립, 고구려 부흥을 기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신라와의 연합도 꾀하였다.
그리하여 670년 고구려의 유장(遺將) 고연무(高延武)와 신라의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이끄는 연합군이 요동지역으로 진격, 말갈족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당나라의 대규모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흥군의 내부에서는 의견의 대립으로 분열,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사태(실패 원인)로 발전하였다.
한편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보덕국왕)으로 책봉함에 따라 부흥군 세력과 신라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671년 안시성이 당나라 군에 함락되고, 672년과 673년의 백수산(白水山) 전투와 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의 패배로 부흥군의 잔여세력은 신라로 들어갔다. 이로써 부흥군의 무력 활동은 끝이 나고 당나라와의 무력대결은 신라가 담당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들 유민들을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 보덕국)에 집단 이주시켰으며, 그들은 684년 대문(大文)의 반란을 계기로 해체되어 군· 현으로 재편되었다.
(3) 나 ․ 당 전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1)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비밀 협약(약속)을 당은 어기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보임 → 웅진도독부
(백제의 옛 땅 : 5개 도독부 설치), 안동도호부(고구려의 옛 땅 : 9개 도독부 설치), 계림도독부(신라 땅에 계림도독부 설치: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만주지역은 물론, 한반도까지 지배하려 함
2) 신라의 당군 축출(逐出, 몰아 냄)
신라는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 운동군을 후원하고, 안승을 보덕국왕(금마저 : 전북 익산)으로 삼고 후원하였으며(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군을 이용하여 당군을 축출하려함),당군이 지배하고 있던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없앤 후, 소부리주(부여. 신라 직속령)를 설치하여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함(671) → 김유신 사망(673) 후 통일 유업(遺業,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은 아들 원술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문무왕. 661- 681)에 의해 마무리 됨 → 당은 김법민의 동생 김인문(김춘추의 둘째 아들)을 신라왕으로 삼고(신라 분열책) 수십만의 대군(大軍. 말갈· 거란군 동원)으로 신라를 공격해 옴 → 신라 연합군(신라군 +고구려, 백제 유민군)은 매소성(경기도 양주)에서 당의 육군(이근행)을 격퇴하였고, 기벌포(금강 하구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당의 해군(설인귀)을 격퇴하였다 → 대동강 이남의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냄 → 삼국 통일 이룩(676) →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김.
■ 신라의 당군 격퇴
▪ 육군(마전=연천, 적성=연천, 매소성=양주)
▪ 해군(기벌포 = 금강 하구의 장항)
3) 삼국 통일의 의의(意義. 가치 = 의미)
① 자주적 통일(自主的. 남에게 의지하거나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당)를 이용한 것이지,
외세에 의한 타율적(他律的)통일이 아니다.
② 최초의 민족 통일 → 민족 문화 형성의 기틀 마련,
한민족(단일 민족) 형성의 계기 마련
③ 한반도에 평화 정착
④ 한계(비판)
민족 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인 점,
불완전한 영토(고구려 지역 대부분 상실) 통일(대동강 ~ 원산 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