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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22:29-40) 한 장소의 네 마음
오늘 왕상22장 말씀 중심으로 <한 장소의 네 마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한 장소에 네 가지의 마음이 모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인생의 한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속도로를 가다가 휴게소에 들어가면 언제나 짧은 순간이지만, 우두커니 앉아서 반복해서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옆 테이블에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한 장소에서 밥을 먹고 있어요. 그 마음속에 도착하려고 하는 곳의 목적지의 방향이 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야릇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서로 다른 마음들이 전쟁터에 모였습니다. 네 가지의 마음이 모여 있는데 마음의 움직임이 각기 다릅니다. 목적하는 바가 다르고 그 네 가지의 마음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우리 인생의 삶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어떤 현장이든지 이 네 가지 마음 중에 어느 하나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연합군이 벤하닷이 이끄는 아람과의 전쟁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이 나가기 전에 아합 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왕복을 그대로 입고 전쟁에 나가십시오. 나는 왕복을 벗고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을 하고 전쟁터에 들어가겠소’라고 합니다. 일종의 꼼수지요. 왕의 위치가 부각돼서 공격의 어떤 포커스가 될까 수를 쓰는 겁니다. 그리고 벤하닷과 아합과의 관계는 아주 숙적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로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아합이 이기면서 벤하닷이 아합 밑으로 들어왔습니다마는, 길르앗 라못을 내주지 않자 또다시 적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분명히 자기를 강하게 공격해 올 것을 예측하고 변장을 하고 들어가 싸우게 됩니다.
또 반면에 아람 왕 벤하닷은 32명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큰 자나 작은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워라.’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군대 안에도 천부장, 백부장이 있고 오십 부장이 있고 그 밑에 부하들이 있습니다. 부하들은 작은 자는 백부장, 오십 부장, 천부장은 큰 자들이지요. 그런 사람들과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 백전노장 장군들은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32명 모두가 다 아합 왕에게 집중포화를 쏟아 부을 것을 말합니다. 이를 악물고 아합 왕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겁니다.
반면에 여호사밧은 성경상의 기록을 보면 향방을 알 수가 없어요. 단지 그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보면 이 전쟁 얘기를 하게 될 때에 ‘내가 돕기는 돕겠다. 길르앗 라못을 이스라엘이 탈환하는 것을 위하여 형제의 나라 입장에서 돕겠다. 그러나 먼저 이 전쟁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물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마음의 향방은 거기에 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합 왕과는 형제의 나라라는 의무감 때문에, 그냥 지금 따라 갔다가, 32명의 벤하닷의 장군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해오자 깜짝 놀라고 두려움에 소리를 지릅니다. 32명의 장군들이 공격하려고 하다가 보니 아합 왕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호사밧 왕은 별로 그렇게 지금 이 전쟁터에 대해서 전쟁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요. 벤하닷은 벤하닷 대로 아합 왕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있고, 그리고 아합 왕은 아합 왕대로 전쟁을 치르기는 치르지만 살기 위해서 벤하닷의 집중 공격을 예상하고 변장해서 왕복을 벗고 일반 사병의 복장을 하고 전쟁터로 들어갔습니다.
한 번 볼까요? 여호사밧 왕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그것에 마음의 관심이 가 있었고, 아합은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벤하닷은 이를 악물고 아합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합세를 합니다.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마음가짐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이 전쟁터에 가세를 합니다. 그래서 네 가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이 함께 공존하는 삶의 현장, 매순간 내가 가족들과 있을 때도 그렇고 직장에 나갔을 때도 그렇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네 가지의 마음 중에 어느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물론 하나님의 마음은 빼놓고, 인간으로서는 이 세 가지의 마음중 하나를 갖고 있는데, 항상 하나님의 마음까지 가세를 해서 네 가지 마음이 한 현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마음의 귀결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요.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하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 아합은 철통같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인생에 있어서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이 마음가짐처럼 갑옷을 입었는데 아람군대의 한 사람이 화살을 쏘았습니다. 우연히(무심코) 라고 하는 말이 본문에 기록이 돼 있는데, 이 우연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 한 사람을 겨냥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와- 몰려오니 거기다 대고 그냥 공중에 대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내려오면서 아무에게나 맞겠지 하는 마음으로 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맞혔다고 합니다. 갑옷 솔기가 뭐냐 하면, 흉부부분과 갈비뼈 부분을 이렇게 쇠로 막아버리는데, 너무 무거우니까 전신으로 입지를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심장부분을 막은 다음에 이 배(명치) 아랫부분 하복부와 허리, 옆구리 부분은 쇳조각을 이어서 만든 겁니다. 쇠로된 심장 부분의 하단 부를 갖다 이은 것입니다. 그런데 상단부와 하단부를 잇는 그 사이를 비집고 화살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자기 목숨을 지키겠다고 왕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 왕이 멍청하게 있는 사이에, 그 갑옷의 상단부와 하단부를 이어주는 이음새 사이를 비집고 화살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화살이냐? 아합 왕인 줄 알고 겨냥해서 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나 맞으라고 쏜 화살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시쳇말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지키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벤하닷의 마음을 한 번 봅시다. 벤하닷의 마음은 반대로 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마음의 모양은 아합 왕과는 반대로, 아합 왕은 지키려고 하는 반면에, 벤하닷은 움켜쥐려고 한 것입니다. 공격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를 악물고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32명 장군한테 너희는 어찌하든지, 백전노장의 젖 먹던 힘을 발휘해서 ‘아합 왕 하나를 죽여라. 집중적으로 찾아내서 공격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코믹하게, 코미디 같이 한 쪽에서는 벤하닷이 있는 힘을 다해서 아람 군대 전체를 이끌고 아합을 공격해서 죽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여호사밧을 쫓아가다가 전쟁터에서 아합을 찾느라고 헤매는 것입니다. 쫓아가다가 여호사밧이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놀래서 어, 이거, 아니잖아. 아합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아합이 죽는 것은 엉뚱하게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는 겁니다. 벤하닷이 아합을 죽이려고 했지만 이 벤하닷의 마음이 적중해서 죽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자기를 지키려고 하고, 자기의 가정과 내 돈과 내 건강과 심지어는 내 자존심까지라도 지키려고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벤하닷처럼 뭔가 공격적으로 내가 얻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합이 죽긴 죽었지만 벤하닷이 얻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아합을 공격해서 죽인 게 아닙니다. 또 아합처럼 자기가 지키려고 별 수를 다 썼지만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뭡니까? 하나님의 마음대로 돼 가는 것입니다. 아합을 죽이려고 하는 벤하닷의 마음이 적중한 게 아니라, 벤하닷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아합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죽인 것이지, 벤하닷이 죽이려고 해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마음대로이지 사람이 지키려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책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표를 세워라.’ 그 목표를 세워서 그것을 이루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룬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이루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벤하닷이 아합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죽은 이유가, 벤하닷의 공격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아합에 대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공격하려고 했고 우리가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니까 얻어진 것입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재벌이 2008년도 목표를 세웠는데 달성을 했다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책을 씁니다. ‘이 회사가 이렇게 목표를 세웠고 이런 목표달성을 위해서 이렇게 대책을 세웠고 노력했기 때문에 얻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유혹입니다. 그 계획 때문에 얻은 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이 얻게 해 주셨어요. 그 얻게 해 주신 것이 축복일 수도 있고 심판일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합은 지키려 해도 지켜지지 않고, 벤하닷은 얻으려 해도 얻어지지 않고, 오직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만이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내가 지금 지키려고 해서 가정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지키고 계시니까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사밧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다가 사실 이 상황자체를 보면 어리버리한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의 모습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치 않으면 가지 말아야지요. 아무리 동맹군 아니라 형제의 나라라고 해도 가지 말아야지요. 그러나 여호사밧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긴가민가 하는 것에 가 있음이 여호사밧의 마음의 향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 치열한 전쟁터에서 이 여호사밧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라야 될 텐데. 뜻이라야 될 텐데.’ 라는 이 마음 하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버리한 마음, 다부지게 전쟁터에 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벤하닷의 부하 32명의 장군들이 몰려왔을 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왕이 왜 소리를 지릅니까? 싸우려면 싸우고 도망가려면 도망을 가야지. 마치 그런 것 같아요. 계집애가 무슨 이상한 일을 당하고 깜짝 놀랄 일을 당하면 어머나! 그러는 것 같아요. 전쟁을 하기 위한 다부진 마음가짐이 안 돼 있는 겁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어리버리한 상태라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야 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은총이 주어지는 겁니다.
벤하닷은 결국 마지막에 자기 밑에 있는 장관 중의 한 사람인 하사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남이 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아도, 그 사람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벤하닷의 이야기를 잘 묵상하셔야 됩니다. 내가 목표를 세워서 얻게 되었다고 해도, 이 아합을 죽이려는 게 목표였다고 하더라도 벤하닷이 세운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는, 네가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가 나와 관계없이 내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세운 내 계획을 이루었다고 해도, 나와 아무 상관없이 나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중에 내가 세운 목표가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목표를 세웠다고 내게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을 과제로 삼지요. 내 자식을 지키려하고 내 사업을 지키려하고 내 건강을 지키려 합니다. 아니면 돈을 얻으려하고 인생의 성공을 얻으려하고 공격형 아니면 수비형으로 살아가요. 한 사람의 생애를 보아도 공격적일 때가 있고 방어적일 때가 있습니다. 지키려할 때가 있고 얻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키려 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마음만 성취되어가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 가는데 그 하나님의 뜻이 여호사밧 왕처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려는 사람에게는, 은총으로 자비로 불쌍해서 그냥 살려주는 것입니다. 은총과 자비로 나타나고.
내가 방어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공격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다 그렇게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벤하닷은 자기가 목표 세운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하사엘을 통하여 반역이 일어나고 하사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까지 유보되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합 왕은 이렇게 죽습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자기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흐른 마차병거를 사마리아에 있는 연못에서 씻는데 그 연못이 우리가 앞서 본 홍제원 얘기 했지요. 환향녀들이 목욕하는 홍제원, 그런데 이 연못이 창녀들의 목욕장소 이었습니다. 거기서 병거를 씻는데 그 아합 왕의 피가 섞인 물을 개들이 핥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입니까? 왕으로 살았던 인생이 개가 핥아버릴 정도의 비천한 생애가 돼 버렸다는 것입니다. 창기가 몸을 씻는 곳에서 그의 피가 묻은 병거를 씻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합이 더러운 창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주님께서 오셔서 아합 왕도 부활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다 합시다. 그럴 때 이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때에, 이세벨도 있고 400인 선지자와 시드기야도 있고 자기에게 흉한 예언만 했던 미가야도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이제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겠습니까? 심판대 앞에 서고 보니까 자기인생 최대의 원수가 이세벨입니다. 자기인생 최대의 원수가 자기의 숙원, 자기의 소원을 늘 긍정적으로 말해 주었던 선지자 시드기야와 400인의 선지자가 아주 천하에 악마 같은 놈들이었다는 겁니다. 자기 마누라하고 다.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다니까 이세벨이 ‘내가 갖다 줄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소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는 최대의 악마 중의 악마였다는 것입니다. 원수 중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미가야 이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을 계속 얘기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에게 친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된다고 외치는 제가 훨씬 더 친할 걸요? 심판대 앞에 가면 여러분을 저처럼 진짜로 생명을 생각해서 계속해서 떠든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걸요?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아주 친하지요. 아주 가깝지요. 그러나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그래도 태 목사가 십자가에서 죽어라. 죽어라 했던 그 때가 좋았던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아합 왕의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렇게 미웠던 미가야, 하여간 뭘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미가야.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우리의 소원, 우리의 계획, 지키려고 하는 것이든 얻으려고 하는 것이든 모두 안 되는 것입니다. 다 죽어야 됩니다. 다 죽어야 된다고 하는 이 말이 내 생명을 보존하고 하늘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에요. 아합 왕의 비참한 처지가 나나, 우리가족이나, 누구에게도 임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삶의 현장을 살아가실 때 네 개의 마음이 임할 것입니다. 여호사밧 입장을 취하되 더욱 적극적으로 취해서, 오직 그 현장에 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마음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거부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어 갑니다. 그런데 거부하는 자에게는 결국은 벤하닷과 아합에게 공통적으로 심판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으로 임할 사람들이 자기가 세운 목표를 이룬다고 해도, 그들이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시는 중인 것뿐입니다. 네 가지 마음이 있을 수 있는데 오직 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만 현실이 되어가는 것임을 아시고 이 하나님의 마음에 찰싹 달라붙는 사람의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마음과 동떨어진 마음으로 혹시 생각했던 것을 이룰 때도 있고 혹시 지키려고 했던 것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마는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내가 지키려 했기 때문에 지켜진 것도 얻으려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뜻이 있어서 오히려 내가 성공하고 형통할 수도 있고 또 사랑과 은총의 뜻이 있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와 성공, 지킴과 얻음에 연연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붙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꼭 지닐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