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지각이 몇 개의 판으로 이루어지고, 지표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바다의 무게가 이들 판들이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한다. 판들의 운동은 때때로 화산을 폭발시켜 지구에 이산화탄소를 제공하고, 바다는 역으로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녹여서 대기중의 이산화탄소양을 유지시켜 지구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물론 바다의 플랭크톤과 육지의 식물들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수억년동안 이루어진 이 기막힌 균형이 개미보다 훨씬 개체수도 적고 코끼리에 비하면 턱도 없이 가벼운 인간들이 불과 수백년에 걸쳐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위협당하고 있다. 정상적인 순환이라면 북극의 얼음이 더 두꺼워져야할 빙하기 초기에 접어든 지구가 인간들의 탐욕 덕분에 더 따뜻해지고 있다. 지금의 환경파괴와 이산화탄소 배출이 지구의 생태균형을 한순간에 파괴시켜 대재난을 초래할 것이라는 예상은 '투모로우'라는 미국영화에서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대재난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대중의 압박에 의해 그러한 상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그만두어야 한다. 소위 좌파정권이라고 불리는 룰라의 브라질조차 밀림의 민간개발을 허용하는 등,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순간 그 염원은 도루목이 되기가 십상이다. 지구환경이 파괴되는 속도와 대중의 압박에 의해 사태를 호전시키는 속도는 비교가 안 된다. 후손들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하루빨리 분쇄하고 지금의 사태를 결정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지구생태와의 양립가능성? 흔히 풍요로운 사회는 소비생활이 풍부해 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채집경제에서 약탈경제로 1만년전에 진입한 인류가 에밀리안코 효도르를 포함해 60억명으로 늘어난 지금은 소비를 덜해야 하는 것이 미덕임을 양식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자원 소비량을 비약적으로 늘려왔으며, 이 추세가 완화될 기미는 없다. 산업혁명은 동력산업의 성장과 함께 했다. 금속 제련기술로만 보면 3,000년전 주나라 때가 훨씬 규모가 컸지만 영국은 동력원으로 수력, 나중에는 석탄을 사용함으로써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산업혁명은 그만큼 화석연료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함께 진행되었다. 환경운동가들은 화석연료에 대한 대안으로 태양력을 비롯한 재생에너지사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석탄, 석유를 비롯해 주요 에너지원을 장악하고 있는 국제상인들의 농간으로 그 또한 용이하지 않다. 문제는 인류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농업에서조차 에너지 사용이 늘어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그린산업, 녹색산업이라고 불리는 농업도 알고 보면 거대한 에너지 산업이 된 지 오래다. 농촌벌판에 세워져 있는 비닐하우스는 사실상 굴뚝 산업이다. 도시는 엄청난 분뇨를 처리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농촌은 유기물의 부족 때문에 비료회사들이 전기를 이용해 만든 비료를 토지에 퍼붓고 있다. 역사적 경험 갈탄 사회주의라 불러도 좋을 만큼 전기생산을 갈탄에 의존했던 동독지역의 화력발전소로 말미암아 구 동독지역과 체코지역에 걸쳐 있는 오레산맥이 민둥산이 되었다. 소련에서 전기생산을 원전에 의존해 마구잡이로 원전을 건설한 결과 체르노빌 원전사고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인근에서는 아직도 기형아가 출산되고 있고, 사고지역은 지금도 폐쇄되어 있다. 대중의 감시체계가 소홀했고, 자주적인 환경운동도 극도로 억제되었던 기존 노동자국가에서 환경인지적 개발전략은 관료들의 이해정도 만큼만 진행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은 열악한 자연환경이라는 악조건을 딛고 농사를 져야 했기 때문에 땅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심경(깊은 밭갈이)을 해야 하는 조건에서 트랙터 공급량은 언제나 국가적 관심사였다. 토지와 기계의 결합을 통한 단기간에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사회주의 농법으로 이해된 만큼, 비료를 비롯한 토지에 대한 에너지 투입이 국가목표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려는 노력으로 토지의 약탈이 단시간에 이루어졌다. 덕분에 토지 생산력은 고갈되고, 토지는 비료를 투입하지 않고는 기대하는 생산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북한의 식량문제를 악화시킨 주원인이기도 하다. 생태문제에서 기존 노동자국가들이 자본주의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적자본이 설치지 않고 중앙계획에 의한 생산통제 덕분에 무분별한 개발을 허용하지 않은 정도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이칼호의 철갑상어 개체수가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캐비어 수출을 위한 남획으로 멸종위기까지 같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이너스 성장을 추구하는 계획경제 지구에 대한 고도의 수탈을 막는 대안은 우선 한 사회가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거지와 일터가 통합되어 수송수단에 의한 에너지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 또한 도시와 농촌의 인구비율을 유지해 유기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지구생태에 적응할 수 있는 신기술개발에 사회적 재원을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환경파괴를 막아야 한다는 결단을 할 수 있는 경제체제의 수립이다. 계획경제에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자본주의의 제한적인 시도보다 압도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일인당 석유소비량이나 오염량을 줄이기 위해 자원소비량을 줄이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계획경제는 사회구성원의 합의 속에서 실시할 가능성이 어느 체제보다 높다. 이것은 강제조치도 그리고 누군가의 선동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자각과 고도의 평등이 실현될 때 가능하다. 계획경제에서는 사회적 비용, 나아가 전지구적 생태비용이 지나치게 높게 들어가는 편의시설, 산업을 억제하고 궁극적으로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싱가폴처럼 차량종량제를 실시해 그 수를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계획경제는 이처럼 조금 더 적게 소비하고, 덜 버리는 것이 미덕이 되는 그러한 사회체제를 수립하는 노력을 각 부문에서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도시와 농촌의 고질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계획경제는 전진할 것이다. 지금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현상은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만만치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도시는 과밀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반면 농촌은 인구가 점점 희박해지고 있고, 도시인들이 소비하는 육류와 계절과 무관하게 소요되는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도시와 인접한 농촌은 자본주의 상업농이 번창하고 있다. 따라서 감당할 수 없는 축산 오폐물들과 비닐하우스를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연료소비로 농촌의 오염정도는 도시 못지않게 되었다. 농촌은 유기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적절한 규모의 인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료를 막대하게 소비하고, 기계화에 따른 연료소비량이 거대한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농업이 기계화가 된다면 불과 수십년안에 지구상의 에너지자원은 고갈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예측은 단지 엄살만이 아니다. 우선 대다수 인구가 영양과잉상태에 놓여 있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를 인수한 계획경제는 비대해진 축산업을 축소하려 할 것이다. 곡물이 고기로 전환되는데 엄청난 칼로리가 낭비된다. 즉 1Kg의 곡물을 소비해서 얻어지는 육류는 칼로리량이 소비한 칼로리의 반도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 인류는 단백질에 대한 탐욕이 지나치게 커진 결과 지극히 비효율적인 에너지 섭취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계장, 낙농단지, 축산단지는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초원지대에서 길러지는 축산물을 수입하는 방향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농촌을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진 지역으로 변모시켜 도시인구의 적절한 분산을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농촌은 인간으로부터 적절한 유기물을 채집해서 토지에 재투입할 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계획경제는 환경문제가 아니더라도 적절한 규모의 인구분산을 요구한다. 소비자 위원회든 생산위원회든 적절한 인구분포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민주주의의 유지와 일정한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다. 안정된 삶이 보장됨에 따라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커질 것이고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인구는 꾸준히 늘어날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농업노동경험을 아이들에게 체험시켜주려는 의도로 농촌을 선호할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가난한 평등이란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환경의 구성원으로서 겸허한 생활철학을 갖는 것이다. 계획경제에서는 인류사상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정복이 아니라 스스로 고개를 숙여 동화되는 인류를 창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