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동성당 10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적·성서적 의미
100년의 신앙공동체 역사 지닌 유서 깊은 성지
이웃과 함께하는 따듯한 지역공동체로 성장·발전
올해는 마산동성당이 설정된 지 1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입니다. 마산동 성당은 인천교구에 속한 본당 성당으로 김포한강신도시의 마산동과 구래동 지역을 공동체 구역으로 2013년에 2월 11일에 설립되었고 현재 약 4천여 성도들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있는 성스런 터전인데 지역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1924년 마산리공소에서 시작된 김포 천주교 역사
‘인천교회사연구소’에 의하면 본래 이곳 마산동에는 아주 오래전인 1924년에 민유식이란 사람에 의하여 마산리공소가 세워져서 운영되다가 1966년에 폐쇄되었고 89년 만인 2013년에 다시 마산동 본당으로 새롭게 세워진 곳이라고 합니다. 구래동의 선주민으로서 이 지역과 뿌리 깊은 인연을 지니고 살아온 저로서는 본당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마산동 성당과 김포지역 천주교 역사의 오래된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그 의미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현재 김포지역에는 마산동성당, 김포성당, 통진성당, 양곡성당, 고촌성당, 대곶성당을 비롯하여 15개소의 성당이 있는데 그 뿌리는 100여 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포지역 천주교 전파경로는 수로와 육로, 두 갈래 길로 들어왔습니다. 한 갈래는 서울 방면의 행주본당(1899년 설립)을 모태로 한강하구 뱃길을 따라 전래되었는데 행주본당 소속의 누산공소(1900년), 고잔말공소91901년), 걸포리공소(1904년), 원산리공소(1904년), 은행정공소(1904년), 홍도평공소(1909년) 등 김포지역 공소 대부분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른 한 갈래는 인천답동성당(1899년 설립)을 모태로 시흥 소래지역에서 육로를 통해 김포의 내륙인 마산리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시흥 소래지역 공소로는 대골공소(1902년), 새말공소(1908년), 물왕리공소(1922년), 포리공소(1922년) 등이 있습니다. 마산리공소는 소래지역 옥길리에 살던 민유식 집안의 형제들이 가현산 자락 구래리와 마산리로 이주하여 마산리에 공소를 세우고 전교활동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유식 형제의 집안이 일제의 박해와 남북간의 전란으로 자녀들을 잃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몰락하자 그 뒤를 이어받은 최윤선 형제(최기산 주교님의 큰아버지, 마산공소 회장, 양곡신협 초대 이사장)가 무너진 마산리공소(마리미공원에서 은여울공원 사이에 위치)를 옮겨 대마산 278번지(현재의 솔터 2단지)에 다시 공소를 재건하여 운영했습니다.
그 당시 주목할 분으로 마산리에서 태어나고 공소활동에 참여했던 분으로 훗날 가톨릭교회 주교이자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헌신하시다가 2016년에 선종하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마을의 마산리공소와 매월 20리길 김포성당을 오가면서 깊은 신앙심을 키웠으며 1960년대말∼1970년대 초반에 가톨릭대학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나와서 한평생 하느님 뜻을 이어받아 사제의 길을 걸었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마산리공소는 문을 닫고 1968년에 양곡공소로 통합운영되었습니다. 이후 양촌지역 통합공소로서 성장 발전해온 양곡성당이 1987년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양촌지역 신자들의 본당 공동체로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기산 주교의 노력으로 2013년 마산동 본당 세워져
역사는 순환한다는 말이 있듯이, 밀레니엄 새천년인 21세기가 도래하자 마산리와 구래리에 김포한강신도시가 들어서고 마침내 2013년에는 선사시대 이래 성스런 땅인 마산동에 하느님의 은총이 서린 마산동 본당이 기적처럼 세워졌습니다. 그 배경에는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당시 인천교구 교구장으로 활동하셨던 최기산 주교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영적인 힘이 없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산리 공소는 저희 집안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저희 어머니(미카엘라)는 마산리(옛 지명은 마리미)에서 태어나셔서 집안의 동생들과 마산리 공소를 다니다가 인접 마을인 구래리로 시집을 오셔서 1960년대부터는 구래리 출신인 저희 아버지(마태오)와 함께 통합된 양곡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 역시 1968년 6살의 나이로 양곡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성당을 오가며 신앙적 감수성과 천주교 윤리의식을 키웠습니다. 이후 젊은 시절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오랜 세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냉담생활을 하였으나 지난 2019년 6월 다시 신앙의 고향인 마산동성당과 하느님의 품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믿음과 은총이 충만한 거룩한 땅,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신성한 땅, 성스런 고향 땅에 돌아와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신앙생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마산리는 옛 지명이 마리산리-마리봉-마산리-마산동으로 변모해왔으며 고유지명은 마리미로 그 뜻은 강화도의 마니산처럼 높은 곳 또는 신성한 곳을 의미합니다. 마산리는 선사시대인 청동기 시대부터 제사장이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천신제를 지내며 하늘과 소통했던 신성한 소도이기도 하고 청동기 시대 유물이 가득한 문화재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마산동의 솔터라는 의미도 백제의 진사왕이 감암포를 통해 마산리 솔터에 와서 활쏘고 검무를 익혔다는 활터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늘과 대화하던 신성한 땅 소도라는 의미도 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옛 이름이 마리미인 마산리는 역사시대 이후에도 많은 시련과 영화가 있었지만 백성들이 고통받던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민유식이란 형제를 보내 신앙공동체인 마을공소를 만들게 하고 전례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하느님의 뜻이 온 마을에 퍼지고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했던 우상숭배와 무속신앙이 사라지고 생명과 부활의 땅, 믿음과 은총의 거룩한 땅으로 다시 거듭났던 땅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3년 올해는 마산동 성당 설정 10주년이란 큰 의미도 있지만 마산공소가 설립되었던 1924년을 기준으로 하면 99주년을 맞는 해로 마산동 성당은 100년의 신앙공동체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성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선사시대 이래 수천 년 세월을 하늘과 소통해왔던 가현산 자락의 마산동과 구래동 신자들이 마산동 본당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100년의 마산리 신앙공동체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미래 100년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본당 신앙공동체만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하는 따듯한 지역공동체의 요람으로 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함께 기도하고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 천주교사와 마산동성당의 역사>
1784년에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되고 1791년 신해박해로 한국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에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가 1801년 신유박해로 연이어 순교함.
1831년에 천주교 조선교구가 베이징교구에서 분리하여 설립되었지만 천주교인들의 고난은 계속되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4대 박해를 겪으면서 1만여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당했으며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1886년에야 비로소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천주교 포교가 허용됨.
1830년대에 비밀 전교활동이 활발했던 함박리는 이전에는 인천 소래면 소속이었다가 지금은 부천시 옥길동에 속하며 한남산맥 산줄기인 소래산 자락의 깊은 오지에 위치했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신앙생활을 하던 성스런 요람이었음.
인천의 양반가 출신으로 기해박해에 연루되어 1840년에 잡혀서 순교한 민극가 스테파노(훗날 천주교 103인 성인에 추대)도 이곳 함박리에도 와서 전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흥민씨 지애공파 족보를 추적해 보면 민극가 스테파노도 여흥민씨 집성촌이었던 함박리 태생으로 추정됨.
또한 천주교회사 사료인 <치명일기>에 의하면 함박리는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한 심원경과 심봉학 부자, 박도섭과 박사앙 부자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이라고 하며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당한 심락천도 청송심씨 후손으로 함박리에 태어나서 서울 종로에 가서 살다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다시 고향으로 와서 은거하다가 잡혀 처형당했다고 함.
1886년 이후 천주교 포교가 자유로워지자 시흥부천지역에서 제일 먼저 1902년 대골공소(대야동)가 만들어졌으며 1908년에는 대골공소에서 분화한 새말공소(신천공소)가 만들어졌고 이후 물왕리공소(1922년), 포리공소(1922년), 도창공소(1926년), 소사공소(1938년) 등이 설립됨. 천주교 요람이었던 함박리의 신앙의 물결은 인근 지역인 옥길동, 과림동, 대야동, 신천동, 신현동, 은행정, 서창, 소사읍 등으로 확산되어 시흥부천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역할을 함.
1866년 병인년에 대원군의 척양척외 쇄국정책과 무자비한 천주교 탄압이 자행되면서 양화진 나루터가 있는 잠두봉에서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당해 한강 물에 내던져지는 등 집단 순교사태가 발생했으며 이후 한국 천주교는 1956년 이 일대 땅을 매입하여 천주교 성지 성역화사업에 나섰으며 현재 순교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시고 있음.
1871년 신미양요 당시에는 강화도 갑곶에서 미국 군함에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박상손, 최순복, 우윤집 형제가 관헌에 제일 먼저 잡혀서 순교당했으며 이후 그 터를 매입하여 2000년에 갑곶을 가톨릭 순교성지로 정하고 기념함.
1889년에 인천답동성당이 설정되고 1899년에는 행주성당이 설립되었으며 한강변 뱃길을 따라 1900년에 누산공소가 만들어지고 1901년 고잔말공소, 1904년 걸포리공소, 원산리공소, 은행정공소에 이어 1909년 홍도평공소가 만들어짐
일제식민통치기인 1924년, 시흥소래지역 옥길마을에 살던 여흥민씨(지애공파) 민유식이라는 분이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경기 서부권 육로를 따라 부천과 계양을 거쳐 김포 땅으로 들어와서 마산리에 공소를 세우고 전교활동 시작함.
1940∼50년대에는 마을 사람들이 마산리공소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와 생활공동체를 강화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연이은 6.25전쟁,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했으나 마산리공소를 세웠던 민유식 형제는 집안이 몰락하여 공소활동을 같이했던 최윤환 형제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의 솔터 아파트 단지(구 마산 3리 278번지)에 공소를 다시 세우고 운영함.
1960년대 들어와서 인천교구는 1961년에 설립된 양곡공소 활성화를 위해 마산리공소(1924년)와 누산공소(1900년)를 1966년에 폐쇄하고 1968년부터 통합공소 양곡성당을 중심으로 공동체 유대구역을 양촌면 전체로 확대했으며 이어서 양촌지역 8개 사목구역과 양촌지역 3개 공소 조직들이 모여 양곡신용협동조합(현 김포한강신협, 초대 이사장으로 마산리공소 회장인 최윤환 형제를 선출)을 설립하여 신협을 통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사회와의 협력도 도모함.
2013년에 마산리공소 출신으로 인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최기산 주교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마산공소 폐쇄 이후 47년 만에 바로 김포한강신도시 마산동에 하늘의 은총을 다시 입은 마산동성당이 다시 세워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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