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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을 떠나 오장원(五丈原)으로 간다. 오장원은 제갈량이 한나라 부흥을 위해 북벌을 시작하고 장안을 목표로 출병해 수많은 전투를 했지만 결국 장안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다가 한 많은 삶을 정리하고 숨을 거둔 곳이다.
▶ 오장원 위치도
어제 예매해둔 기차는 아침 8시56분 출발, 10시14분에 도착하는 기차(1人/19.5元)인데 약간 연착해 9시 15분에 출발, 차이지아포(蔡家坡)역에 10시 34분에 도착한다. 차이지아포 역은 아주 작은 시골 역으로 기차는 시안 역에서 자주 다니고 버스보다 저렴하며 빠르며 편리하고 가깝다.
차이지아포역에서 오장원으로 가는 방법은 역에서 기차를 내려 역 광장 앞에서 시내버스(2路)를 타면 시외버스 터미널이 종점이다. 그런데 시내버스는 기차역에서 내린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콩나물 시루처럼 한없이 승객을 태운다.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까우니 망정이지 배낭에 캐리어까지 든 여행자가 타기엔 너무 힘들다. 터미널에 내려 제갈량 묘로 가는 표(1人/3.7元)를 사 검표원에게 보여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짐을 가게에 맡기고(4元) 잠시 화장실을 다녀 와 보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없어 다시 검표원에게 물으니 빨리 가 타라고 한다. 계파촌으로 가는 미니버스엔 이미 승객들이 만원이다. 입석인 채로 터미널을 출발하지 못하는 중국 교통 규정이 있는지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다른 버스를 타고 터미널 밖 사거리에서 미니버스를 기다려 탄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런지 오장원을 가는 학생 승객들이 많은 것 같다. 11시에 출발하는 계파촌 행 미니버스는 시골길을 한참 달려 구불구불한 고개 길을 30분 만에 제갈량 묘 앞에 도착한다.
▶ 오장원 주변 위성지도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니 위하를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이 강은 삼국지에 많이 나오는 강이다. 공명이 오장원 언덕 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사마중달은 오장원 아래에 주둔하고 대치했던 강이 바로 이 위하와 그 옆으로 흐르는 사수다. 강태공이 낚시질했던 강도 위하였다. 위하는 중원을 남북으로 나누는 강이다. 동서로는 바로 오장원이 걸쳐있는 진령산맥이다. 그러니 바로 여기가 중원의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꼭짓점인 셈이다. 서량군 마초가 조조와 큰 전투를 벌일 때도 위하를 사이에 두고 싸웠는데 이때 조조는 도망에 급급해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야반도주했고 자기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던 곳이 이곳이다.
▶ 오장원 석비
오장원이라는 석비가 보인다. 얼마나 많은 세월 속에 회자한 지명인가? 지금은 산 위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곳이 오장원이다. 오장원이라고 쓴 석비를 보니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갈량 묘는 바로 오장원이라고 부르는 산(언덕?) 위의 넓은 들판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도 너무 힘겨운지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릴 때는 오장원촌에서 내리지 말고 제갈량 묘 입구에서 내려야 한다. 만약 오장원촌에서 내리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제갈량 묘 입구에서 내리니 아주머니들이 향을 들고 몰려와 떠맡기다시피 향을 사라고 한다. “뿌야오!(不要!, 필요 없어요!)”라고 몇 번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다. 할 수없이 조금 언성을 높이자 물러난다.
▶ 휴일을 맞아 오장원을 찾은 인파
제갈량 묘의 입장료(1人/20元)인데 휴일을 맞이하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래서 그런지 길가에 노점 상인들도 무척 많아 오장원 제갈량 묘 입구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 오장원 전경을 그린 그림
▶ 오장원 구릉의 밀밭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아나 있는 구릉이다. 대략 150m 정도 솟은 구릉인데, 윗부분은 평평하다. 이곳을 오장원(五丈原)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언덕이 바로 악기 비파 모양으로 생겼고 비파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거리가 다섯 장 정도라고 해서 오장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장원 언덕 위에 있는 밭을 제갈전(諸葛田)이라 하는데 이곳에 공명이 군사를 주둔시키고 직접 밭은 일구며 농사지어 군량미를 보충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밭의 모양이 남아있고 마을이 있어 사람이 살며 농사짓고 있다.
▶ 오장원 언덕
▶ 오장원 촌 마을
▶ 오장원 앞을 흐르는 위수
제갈량 묘로 들어가기에 앞서 언덕 끝으로 내려와 오장원 아래를 바라보니 언덕 북쪽에는 위수라는 강이 흐르고 오른쪽인 동쪽으로는 사수라는 강이 흐른다. 또, 남쪽으로는 태백산을 등지고 있고 지대는 주변보다 높아서 경계와 조망에 유리해 원정군의 주둔지로는 안성맞춤이라 보인다. 공명은 바로 여기 오장원에 진을 치고 아래 강 건너 진을 친 사마중달의 영채를 바라보며 서로 대치했을 것이다. 오장원은 중국 서쪽 쓰촨을 가르는 진령산맥의 끝자락에 있다. 지도를 보면 차이지아포의 제갈량 묘는 시안에서 서쪽으로 가다 바오지(寶鷄)란 도시 조금 못가서 있다. 바오지는 예전에 그 유명한 진창이라는 곳이다. 공명이 2차 북벌을 감행한 곳으로 공략하다 실패하고 포기한 난공불락의 진창성이 있던 곳이다.
▶ 제갈량 묘 옆 삼국성
제갈량 묘 입구 옆에는 삼국성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들어가려면 별도로 돈을 내야 한다고 해 들어가지 않는다.
▶ 심외무도하 새겨진 바위<퍼 온 사진>
제갈량묘 입구로 들어간다. 마당 한편에 심외무도(心外無刀)란 글이 새겨져 있다. 가슴에 품은 것은 칼이 아니라 마음 밖에 없다는 말로 정말 무서운 말이다. 원자폭탄 만들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공갈치는 김정은이란 놈보다 더 무서운 것 같다. 제갈량은 오나라 주유의 염장을 질러 더 빨리 죽게 하고도 뻔뻔하게 조문까지 간다. 조문하러 온 공명을 오나라 장수들은 죽여야 한다고 난리쳤지만, 노숙의 만류로 잠시 멈추었는데 그만 공명의 애통해하는 조문을 듣고 공명을 요절내려고 오나라 장수들이 상복 안에 감추었던 칼을 모두 버리고 제갈량과 함께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제갈량에겐 칼보다 더 강한 세 치 혀가 있으니 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계략에 걸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차라리 칼로 싸웠다면 오히려 사람이 덜 죽었을지 모른다.
▶ 종루
▶ 종루에 걸린 종
▶ 고루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종루가 보이고 왼쪽엔 고루가 있다. 학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은 지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는 글이 보인다.
▶ 오장추풍 현판
정면을 바라보면 편액에 오장추풍(五丈秋風)이라 쓴 글씨가 눈을 끈다. 오장원의 가을바람? 가을바람은 원래 서글프다. 인생의 가을은 더 그렇고. 나도 지금 가을이다. 삭풍이 불어오면 몸도 마음도 더 시릴 것 같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좀 더 인생을 살찌워야겠다.
▶ 출사표를 탁본ㅘ는 모습<퍼 온 사진>
잠시 들어온 문을 뒤돌아본다. 산문 입구를 중심으로 양쪽에 제갈량이 썼다고 하는 출사표가 전, 후로 나누어 돌에 새겨놓았는데 탁본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 사당 입구의 현판
▶ 장상사표 현판
그 뒤로 바로 공명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 입구엔 영명천고(英名千古)라 써 있다. 영웅의 명성은 천년을 흘러도 변함없다는 뜻이니 제갈량을 칭송하는 말이지 싶다. 장상사표(將相師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모든 장수와 재상들의 모범이 되는 스승이란 뜻이다. 공자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 해 영원한 스승인데 공명도 공자만은 못하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존경 받는 사람인가 보다.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제갈량은 정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 물론 그의 아들도 청렴결백해 죽을 때 남긴 글대로 재산이 정확했으며 그 후 하나도 늘지 않았다 하니 고금을 통틀어 모든 정치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다.
▶ 제갈공명 조상
▶ 왕평과 관흥
▶ 장포와 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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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을 지키는 마대(좌)와 위연(우)
사당 안에는 청나라 때 만든 제갈량의 금빛 조상이 있다. 죽을 때도 무덤 안에 아무것도 넣지 말고 무덤의 담장도 세우지 말고 소박하게 장사지내라고 한 제갈량이 지금 저런 화려한 모습을 보면 오히려 화를 낼 것만 같다. 공명을 모신 사당 왼쪽 방에는 왕평과 관흥이 지키고 오른쪽에는 장포와 요화가 지키고 있다. 관우와 장비의 아들이 지키는 게 특이하다. 누구는 공명의 좌우에서 따로 방을 만들어 있으라 하고 위연과 마대는 바람만 횅하니 부는 산문 밖에서 지키라 하니 만약 위연과 마대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섭섭할까.
▶ 강유의 조상
▶ 양의의 조상
사당 옆 작은 방에는 제갈량이 죽음을 맞이할 때 곁에 있었던 강유(姜維)와 양의(楊儀)의 조상도 보인다.
▶ 팔괘정
팔각으로 만든 팔괘정(八卦亭)이란 정자가 하나 보인다. 천장에 팔괘를 그려놓긴 했으나 이게 제갈량의 팔괘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 제갈량5차북벌진열실
▶ 유비와 환담을 하는 공명
▶ 유마
▶ 공명의 5차 북벌도
사당 뒷편에는 제갈량오차북벌진열관(諸葛亮五次北伐陳列館)이 있다. 진열관을 들어서면 제갈량과 유비가 차를 마시며 세상의 형세를 논의하는 조형물이 있는데 탁자 위엔 관람객들이 놓고 간 돈이 수북하다. 또한 제갈량의 발명품이란 목우 유마도 전시되어 있고 5차 북벌에 대한 지도와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 낙성석이 있는 정자
▶ 낙성석
낙성원이라 쓴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낙성원이라는 정원이 있는데 정원 안에 누각이 보이고 그 안 비석에는 낙성석(落星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서울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로 장군께서 태어날 때 하늘의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라 친숙한 느낌이 든다. 비석 뒤를 돌아가 보니 공명이 죽을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바로 돌로 돌의 모양이 범상치 않다. 공명이 죽을 때 오장원 아래 진을 치고 있던 사마의도 동북방향에서 서남방향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한다. 오장원에 주둔한 공명의 영채에 떨어진 그 유성을 주워 여기다 전시한 모양이다. 워낙 신비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 중국이기에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웃고 넘어간다.
▶ 월영대
▶ 공명의 부인 황월영 조상
그 옆으로 가면 월영전이라는 팔각형 건물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본다. 공명의 부인 황월영(黃月英)을 모신 사당이다. 황월영을 아추(阿丑)라고도 는데 阿는 아명이나 성씨, 호칭 앞에 붙여 쓰곤 하는 친밀하게 부르는 뜻으로 지금도 중국 남방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추(丑)는 醜와 같은 자로 추하다는 뜻의 우리 말 "못난이" 정도인데, 정말 못생긴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훌륭한 가문으로 부친은 제갈량의 스승 사마휘의 친구인 황승언(黃承彦)이고 모친은 채(蔡)씨로 형주를 장악하고 있던 유표의 부인과 그 남동생이자 형주의 실권자의 하나였던 채모와 형제자매였으니 권력자 집안의 딸이다. 야사에 의하면 황월영은 참으로 총명하여 많은 아이디어를 제갈량에게 비밀스럽게 주었는데 북벌 전투 가운데 환타지에 버금가게 등장하는 먹이도 안 먹고 식량을 운송하는 기계, 목우(木牛)와 유마(流馬)도 황월영이 연구해서 제갈량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제갈량은 마누라 황월영이 가르쳐준 것을 부채에 메모해서 그 이야기를 할 때 입을 가리는 척하면서 부채에 쓰인 그 메모를 봤다고 한다. 그럼 제갈량이 부인의 로봇였단 말인가? 아무튼 황월영은 외모는 못 생겼지만 총명한 현모양처였고, 권력자의 부인이었으나 티 내지 않았고, 부잣집 딸이었으나 돈 많은 티도 내지 않았던 소박했지만 속이 꽉 찬 여인네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살아서는 맨날 싸움질한다고 집을 비우더니 죽어서라도 가까이 하라고 함께 모셨나? 이렇게 죽어서라도 함께 있다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사당에는 볼이 도톰한 선이 부드러운 여인의 좌상이 보인다. 저런 정도 외모에 학식과 배경을 가졌다면 요즘 청년들의 입장에서 보면 퀸카가 아니었을까?
▶ 팔괘진 입구
월영전 옆에는 팔괘진이라는 미로가 있다.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이 사마의와 전투를 할 때, 제갈량은 팔괘진(八卦陳)을 펼쳤고, 사마의 군사가 이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한 채 오히려 70-80%의 군사를 잃는 패배를 당한 것으로 돼 있다. 이 팔괘진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팔괘의 원리를 사용했다는데, 자세한 건 오늘날에도 전해진 게 없다. 제갈량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기 위해 작가 나관중이 생각해 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한 팔괘진을 곳곳에 이런 미로를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소설을 기정사실화 해 각종 기념물과 유사 유적을 만드는 중국 사람들의 발상법이 재미있다.
▶ 의관총 전경
의관총이란 무덤이 보인다. 공명은 이곳에서 죽었지만 그의 시신은 이곳에 묻지 않고 정군산 기슭에 묻었으니 여기는 제갈량 묘라고 하지만, 사당이라는 묘(廟)고 우리가 생각하는 무덤(墓)은 아닌 것이다. 섭섭했는지 의관총을 만들어 옷과 모자를 넣었다고 한다. 의관총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인하진 못했지만 제갈량이 죽은 지 근 4백년이 지나 이곳에 제갈량 묘가 만들어졌다는데, 어디서 제갈량의 의관이 보존하다 이곳에 의관총을 만들 때 옷과 모자를 묻었을까? 사당에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신빙성이 없는 것 같다. 이곳은 찾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아주 조용한 분위기지만 의관총 주변엔 화약을 터뜨린 흔적과 붉은 띠들이 수없이 많이 둘러져 있어 좀 지저분해 보인다.
▶ 제갈량의 의관총 무덤
제갈량의 묘 앞에서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음을 생각해 본다. 위수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봄이 되도록 촉과 위는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일절 거병을 하지 않던 공명의 촉군은 드디어 지구전에 유리한 이곳 오장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진지 속에 꼼짝도 하지 않는 사마의를 약을 올려 움직이려고 여자 옷과 노리개도 보내보지만, 허사로 돌아간다. 사마의는 공명이 보낸 사신에게 공명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고 귀신같이 공명의 삶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마의는 성채 안에서 숨만 쉬었지 꼼짝을 하지 않는다. 사마의는 이제 장기전으로 들어가 버티기에만 들어가면 승리는 보이는 듯하자 수하 장수들마저 이런 사마의에게 불평을 해도 사마의는 영채 안에서 버티고 또 버틴다. 며칠 후 공명은 밤에 잠시 산책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다 드디어 자신의 운명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고 급히 강유를 부른다. 세 개의 성좌에 객성의 빛이 강하고 주성은 희미해 주성을 보좌하는 별들도 빛이 희미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유는 공명에게 하늘의 힘으로 수명을 잠시 연장하는 기도를 올려보라고 권하자 무인 49명을 뽑아 모두 검은 옷을 입히고 검은 깃발을 들게 해 공명이 머무는 장막 밖을 지키게 하고 7일 동안 북두칠성에 기원한다. 7일 동안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공명은 12년의 수명이 더 늘어나는 것이지만, 등불이 꺼지게 되면 공명의 삶도 그것으로 끝나는 생명을 걸고 하는 그런 기원이다. 제단이 차려지고 제일 앞에는 큰 등불 7개를 세우고 장막 안으로 삥 둘러 마흔 아홉 개의 작은 등불을 세운다. 그리고 기원을 드리는 공명을 의미하는 등불 하나를 가운데 차려놓고 공명은 식음도 전폐하고 하늘과의 담판에 들어간다. 물론 장막 밖으로도 강유를 필두로 49명의 무사도 마찬가지로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사마의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공명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버린다. 사마의는 군사 일부를 보내 촉의 진영으로 공격하게 했고 그 사실을 공명에 알리려던 위연이 공명이 기도하는 장막 안으로 들어오다 그만 공명의 주등을 건드려 쓰러뜨린다. 이로써 공명의 마지막 희망이 촛불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오늘만 넘기면 12년을 더 살 수 있는데. 그날 공명은 지금까지 지켜보며 자신의 후계자로 점을 찍어두었던 강유를 불러 그간 틈틈이 써놓은 24권의 책을 넘겨주는데 거기엔 병법은 물론 신무기까지 모든 게 기록되어 있다. 마대를 불러 위연의 모반을 대비하고 양의를 불러 사후 대비책도 알려준다. 군사는 강유에게 승상자리에는 장완에게 맡겨 문무를 완벽히 물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륜거를 타고 오장읜의 진중을 둘러보며 하늘로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친다. 죽음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지만, 인간에겐 정말 가혹한 일이다. 자신을 닮은 나무인형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사륜거를 타고 밖으로 나와 캄캄한 밤에 자신의 별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눈을 감으며 "목숨이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슬퍼할 일도 아니고 두려워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건 자연으로 돌아가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죽어가면서까지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공명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공명은 이렇게 오장원의 별이 되어 하늘로 사라진다. 공명의 꿈이 사라지며 촉한의 꿈도 함께 사라진다. 공명은 스스로 북벌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명은 북벌을 수차례에 걸쳐 감행한다. 아마도 못다 이룰 꿈이기에 스스로를 불살라 버리기 위해였는지 모른다. 세상을 살며 목숨을 걸만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록, 북벌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하늘의 일이다.
▶ 오장원에서 바라본 위수
▶ 오장원에서 바라본 차이지아포
제갈량 묘를 나와 다시 오장원 언덕 끝으로 가 본다. 오장원은 아래서 바라보면 높은 언덕인데 올라와 보면 무척 넓고 평평한 평지로 군사를 주둔시키기에는 그만인 곳이란 생각이 든다. 삼국지 속에서 오장원은 무척 비중이 높은 장소였지만, 지금의 오장원은 그냥 언덕 위의 농촌이다. 삼국지에서 대첩을 관도전, 적벽전, 오장원전, 이릉전이라고도 하지만 지금은 공명이 죽은 곳이라 제갈량 묘라는 사당이 있고 의관을 묻은 의관총이 있을 뿐이다. 공명의 명성과는 달리 멋지진 않지만 이곳은 공명이 살아서 마지막 세상을 본 곳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장원 제갈량 묘를 구경하고 나와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되짚어 차이지아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