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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전원속의 내집 | 글·이연건축 조전환 대표 | 사진·변종석 기자
서양 열강의 간섭 속에 망망대해 조각배 같았던 운명의 조선말. 우리는 그 시대의 왕 고종보다, 왕보다 더한 권력을 쥐었던 흥선대원군보다도 조선의 국모로 위엄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한 여인, 명성황후를 떠올리게 된다. 일본자객에 의해 시해되기 전까지 사내대장부의 결단력과 외교관으로서의 협상력, 한 나라의 지어미로 조선말의 격동기를 슬기롭게 대처해나간 인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유교가 통치이념이자 생활이념이었던 조선의 왕조역사에 어린 임금을 대신해 가장 웃어른인 대비들의 현숙한 섭정으로 태평성대를 누린 때도 있었으나,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량은 오히려 격변기를 맞아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이 아닌가 싶다.
작년 ‘명성황후 시해 112주년 추모제’를 치르면서 생가권역을 정비하고 명성황후를 다룬 뮤지컬이 해외에서도 공연되는 것은 이 시대가 그녀의 꿈에 동감하고, 그 꿈대로 살다간 열정적인 인생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명성황후의 생가가 건축적으로 부재의 모양이나 결구법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명성황후가 8세까지만 살아 그녀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때문에 명성황후의 생애와 그녀를 둘러싼 시대 상황을 돌아보는 것이 이 생가의 존재 의미를 더 부각시킬 수 있다고 본다. 아버지 없는 소녀 민정호(자영)를 황후로 키워낸 집, 여주 능현리의 생가를 돌아보는 까닭이다.
여흥 민씨 세력과 그들이 여흥에 정착한 까닭
인현황후의 집(다음호에 소개)이자 명성황후가 여흥(여주)를 떠나 왕비로 즉위하기 전까지 지낸 곳인 감고당과 함께 명성황후 생가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의 집이다. 여흥 민씨는 고려 때부터 명문가였다. 고려 충선왕(1275~1325)은 고려 왕실의 족내혼을 금하면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선정해 공포했는데, 그 속에 여흥 민씨 가문도 속했다.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로 당대 최고의 명문거족들 중 하나로 여흥 민씨는 고려후기 과거를 통해 성장한 신진사대부를 대표했다. 누대에 걸친 명문가 속에서 몇 사람을 들자면 고려말기 공민왕(1330~1374) 때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랐던 민제(1339~1408)가 있다. 예조판서와 한양부윤, 조선 태조 때 여흥백에 봉해졌었던 인물이다. 조선 초기 태종(1367~1422)의 비였던 원경왕후(1365~1420)가 바로 민제의 딸로 이방원을 내조하며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조선중기 숙종(1661~1720)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 때도 여흥 민씨가 득세했다.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에 걸쳐 명성황후(1851~1895)가 흥선대원군(1820~1898)과 대적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끼쳤으며, 그 외에도 을사조약이 체결돼 자결했던 민영환(1861~1905)을 비롯해 겨레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여흥 민씨 일가가 활약했다.
명성황후의 선조들이 여주에 대대로 살기 시작한 것은 경종 때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에서 비롯된다. 신임사화는 장희빈(?~1701)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었던 인현왕후[숙종 7년(1681) 왕비간택]가 복위하면서 장희빈과 함께 그 지지세력이었던 남인이 실권하고 노론, 소론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되면서 숙종(1661~1720) 때부터 장희빈의 처벌 문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소론은 경종 즉위 1년 만에 연잉군(영조)를 세제(世弟)로 삼고 경종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한 노론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몰아가면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강경노론이었던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부터 큰아들 진후까지 권세를 누렸으나, 익수대에 이르러 신임사화를 맞았다. 정치보복이 두려워 서울을 떠나 민유중의 무덤이 있는 여주의 선산으로 낙향했다.
영조(1694~1776)와 정조(1752~1800)대에 이르러 남인과 소론이 중용되면서 노론강경파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순조대에는 외척인 안동 김씨의 득세로 좀처럼 서울로 올라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손 또한 귀해 독자로만 대가 이어졌다.
민유중(1630~1687)의 5대손 민치록(1799~1858)은 첫째부인이 낳은 딸이 죽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둘째부인 한산 이씨를 통해 3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잃고 막내딸만 살아남았다. 그녀가 바로 후일 명성황후인 것이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년) 11월 17일 아버지 민치록이 53세, 한산 이씨 어머니가 34세가 되던 해에 자영이라는 아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상당히 늦둥이었는데, 온 집안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으로 다소 과장한 감이 있어 보이지만, 고종이 쓴 「행록」에 의하면 명성황후가 태어날 때 방안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가득 번졌다고 하는 탄생 비화가 있다.
명성황후는 타고난 영리함과 재기발랄함으로 인근의 칭찬이 자자했다. 대명문가의 후손으로 가문의 전통과 일찍이 세상을 뜬 아버지의 교육, 이미 성인이 되어 관원이기도 한 양오빠를 통해 역사책, 경전, 시문 등을 섭렵하고 상당한 지식과 지혜를 겸비했다. 아버지 없는 외로운 16세의 소녀가 왕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양을 갖추게 되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8세까지 살았던 묘막 용도였던 생가
경기도 여흥(여주)군 능현리의 명성황후가 8세까지 살았던 생가는 황후의 생가치고는 초라하다. 1687년(숙종 13년)에 바로 뒤에 위치한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막치고는 규모가 장대한 편이다. 흔히 시묘살이라 하면 묘막, 여막이라고 하여 빈소 옆에 달아서 반 칸 정도의 크기로 짓되, 짚으로 천장과 3면을 가린 다음 여내(廬內)에는 거적을 펴놓고 그 위에 짚 베개를 만들어 놓아 3년간 삼베옷과 절제된 식생활을 하는, 아주 불편하고 힘든 모습을 상상한다. 여흥 민씨 일가는 대대로 권세를 누려온 탓에 서울에 적을 두고 활동하던 가문으로서 비록 몇 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해졌으나 당대 중전의 아비를 위해 지은 고향의 묘막은 우리의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었음은 짐작할 만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중전이 행차할 수도 있고, 권세가 이어진 장손을 만나기 위해 방문하는 당대 세도가들을 접대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3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가족들의 생활장소였기도 한 것이다.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50여 년 전, 여흥 민씨 일가의 사람이 살다가 가세가 기울어 땔감이 부족해 행랑채와 사랑채(중문채)를 허물어 사용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1975년과 그 다음해에 이르러 안채를 중수하고 어떤 이들이 살던 것을 여주군이 매입하여 1996년에 이르러 안채를 수리하고 기타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중건했다.
집 옆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안내문에 의하면 비(碑)가 선 자리가 명성왕후가 어릴 적 공부하던 방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비의 건립 당시에도 비각언저리까지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복원 과정에서 흥망성쇠에 따른 집의 규모에도 변화가 생겨 중건의 시점을 잡는데 차이가 있어 보인다.
현재 명성황후가 서울에서 살았던 집을 이전해 복원한 감고당, 기념관, 조각공원 등 명성황후 생가 권역 안에 위치한 명성황후 생가는 대문간채를 겸한 ㅡ자형 행랑채와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룬다. 그 옆으로 ㅁ자의 트인 부분에 있는 협문을 통해 독립된 별당으로 통한다.
안채는 독특한 평면이다. 보통 ㄱ자형 구조일 경우 몸채에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의 구성에 부엌이나 헛간 등의 부속시설이 꺾여 붙게 되는데, 안방이 도리방향 세 칸, 보방향 한 칸 반의 규모로 몸채에서 돌출되어 있다. 세 칸 중 두 칸에 걸쳐 퇴를 설치해 장방형의 공간을 깨는 파격적인 평면으로 가구 배치나 생활 행태가 자못 궁금해진다.
퇴로 향한 문을 열면 후원이 있는데, 여러 작물을 싱싱하게 가꾸고 있어 온기 없는 위인 생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다소 지우고 있다. 몸채는 오량구조로 전면에 퇴를 놓고 분합문을 달아 추위를 대비한 경기 지방의 마루 모습이다. 건넌방이 오히려 더 개방적으로 마루를 향해 사분합문이 달려 있다. 건넌방 앞에는 함실아궁이가 마련되어 툇마루가 높여져 있다.
마루로 통하는 건넌방 쌍여닫이문이나 뒷문은 눈여겨 볼만하다. 돌출한 안방의 문 주위나 건넌방의 입면에서 가로재나 세로재가 보이지 않고 면에서 문선만 독립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식(古式)의 형태이다. 건넌방의 경우 여닫이문 사이 세로재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답사를 다니면 이러한 문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추사고택, 맹씨행단 혹은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로 이 또한 고식(古式)으로 시각적인 개방감은 없으나 구조적 안정을 위해 이런 장치를 사용하였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독특한 공간으로는 건넌방 옆의 마루방을 들 수 있다. 마루방은 적당한 온습도를 유지할 수 있어 저장의 공간으로 이용되곤 했다. 건넌방 툇마루, 앞마당,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 있는 이곳은 현재 쌀가마니가 소품으로 쌓여져 있다. 묘막의 성격답게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제사용품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중한 물건이나 음식의 보관은 부엌이나 안방, 마루에서만 통하는 마루방에 마련되지만, 이 방의 문 위치로 보아 제사용품은 좀더 공공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몸채에서 돌출된 안방에는 부속채가 달려 있다. 혹자는 부속채의 후면이 반 칸 증축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집의 규모, 용도와 평면구성에 비추어볼 때 건축을 할 당시부터 계획된 것으로 짐작된다. 부엌의 한 칸 상부는 안방에서 통하는 다락을 내고 벽장이 돌출되어 있다. 부엌 중간의 홈이 파진 기둥은 부엌 공간의 변용보다는 기둥의 전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을 거쳐 마루 딸린 방 옆에는 중문이 나있다.
정면 6칸의 행랑채는 솟을지붕을 한 대문간, 두 칸의 방, 양쪽에 헛간을 두었다. 담장을 건물의 안쪽에 설치해 행랑마당이 좁은 반면 행랑채의 성격이 좀더 개방적이다. 대문간에서는 사랑채의 한 칸 대청마루가 보일 뿐이다. 마루의 뒷문을 열면 안채의 대청마루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쪽마루를 두른 두 칸의 사랑방은 대청마루와 한 개조로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공간은 아주 독립적이다. 좌우에 중문과 헛간이 위치해 뒷문을 닫을 땐 안채와 별개의 공간이 된다.
헛간에 연이은 세 개의 방은 아래채로 집안 식구들이 사용하던 공간인데 내밀한 별당을 시각적으로 차단시켜주면서도 긴밀한 공간구성을 보인다. 사내아이가 있다면 일반적으로 작은 사랑방으로 사용되어졌음 직하다. 누이는 별당에서 바느질을 하고 오빠는 작은 사랑방에서 소리 내어 글을 읽다가 무료함을 못 이겨 깔깔거리고 장난치며 오누이간 정을 쌓았을 법하다. 하지만 어린 정호(자영)는 외동딸로 혼자 별당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낙서하며 지내는 쓸쓸한 장면이 겹쳐지는 건 한나라의 왕비로서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 고군분투하다 어이없게 생을 마감한 그녀의 쓸쓸한 생애 때문일까.
여우사냥으로 지고 마는 파란만장한 삶
명성황후의 생애에 빠질 수 없는 이는 그의 남편 고종이 아니라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일 것이다. 명성황후는 비록 대대로 이어져오는 명문가에 총명한 규수였을지라도 편모에 양오빠만 남은 상황에서 왕비로까지 간택된 것은 파락호(破落戶)였던(혹은 그리 행세했던) 흥선군이 아들 고종을 통해 권력을 잡고 외척을 멀리해 더욱 탄탄한 권세를 다지기 위한 정치적 야망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한 전략적 간택, 정인(情人)이 있었던 고종의 외면, 궁인 이씨를 통한 완화군의 출생, 명성황후는 세 명의 대비 사이에서 공부에 매진하면서 대비들의 총애를 돌려놓고 결국 고종의 마음까지 가지는데 성공한다. 연달아 잃고 말았던 아이들 끝에 순종이 태어나고 10년 동안이나 섭정을 놓지 않는 흥선대원군에 맞서게 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고종에게 진언하여 결국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데, 호랑이를 키운 격이 된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은 점점 커져갔다.
흥선대원군이 사라진 후 고종은 명성황후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고, 강경노론인 여흥 민씨가 주도하는 정세 속에서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양오빠인 민승호와 친어머니를 죽게 한 폭탄테러가 위축된 흥선대원군의 무리가 주도한 일로 판단한 명성황후는 더욱 독해졌고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민승호가 죽자 그 제사를 모실 사람으로 아버지의 조카뻘인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정하고 민태호와 그의 아들 영익, 태호의 동생 규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그로 인해 영익이 친하게 지내던 홍영식, 김옥균 등 개화 및 개방에 적극적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
개화와 개방과정에서 벌어지는 임오군란(壬午軍亂). 흥선대원군이 재집권을 하면서 명성황후는 죽은 사람으로 몰려 장례까지 치러지는 곤욕을 당하며 도망 다니게 된다. 결국 임오군란을 빌미로 들어온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납치되고 명성황후는 다시 한양으로 입성한다. 그 후 명성황후와 민씨들을 숙청하려한 일본을 앞세운 개화파들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지만 갑오농민항쟁과 갑오개혁을 빌미로 일본의 간섭은 점차 커졌다. 그런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포기하도록 한 러시아의 외교력을 높이 평가한 명성황후는 러시아공사에게 손을 내밀면서 친러 성향의 관리들을 중용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위기감은 ‘여우사냥’으로 표출되고 만다.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포부가 컸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격렬한 대륙침략자였던 미우라와 그 일당에 의해 허망하게 끝이 났다. 생가 옆에 마련된 기념관에는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되었던 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일당의 후손들이 찾아와 사죄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씁쓸한 우리의 역사는 오늘도 여전히 왜곡되고 묻혀진 채로다. 그래서 명성황후 생가의 의미가 더욱 새삼스럽다.
이글을 쓴 조전환 씨는 이연건축의 대표로 한옥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전업목수로 한옥에 담겨진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되찾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한옥의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고 살림집에 적용하기 위해 목재의 규격을 통일하는 모듈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지난 2001년에는 이연건축을 세워 목수학교를 개설하였으며, 특히 경주 보문관광단지 신라밀레니엄파크에 전통 한옥호텔 ‘라궁(羅宮)’을 짓는 역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출처: 월간 전원속의 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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