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뜰 예찬 <선어대(仙魚臺)와 마뜰 이야기>
선어대(仙魚臺)는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의 동쪽 제일 끝 지점의 모퉁이다. 암석절벽에 반변천이 휘어감아 소(沼)를 형성한 곳이다. 선어대의 유래다. 옛날 인근 마을에 늙은 총각 머슴이 살고 있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머슴 생활이 지겨워 하루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강물이 굽이치는 언덕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빠져 죽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예쁜 소녀가 나타나 손목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는 이 아래 소(沼)에 사는 인어(人魚) 인데 당신이 세상을 그만 두려는 마음은 이해 하지만 소녀의 말을 따르면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소녀는 이 소에서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려고 하는데 저 위의 또 다른 소((臨河沼)에 있는 임하용(臨河龍)이 계속하여 승천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일 이 장소에서 소녀가 승천하려 할 때 임하용이 나타나면 그때 맞붙어 싸우겠습니다. 그 때 낭군님은 큰소리로 ‘야 이놈아’ 하고 고함을 지르면 그 소리에 임하룡이 한 눈을 팔 때 그를 물어 죽이고 하늘로 올라가겠습니다.” 라고 하여 머슴은 인어가 알려준 되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밤 그 자리로 나갔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요란하고 강물이 용솟음치더니 어둠을 뚫고 승천하는 용을 보았지만 겁에 질려 기절하고 말았다. 인어용은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싸움을 포기하고 내려와 보니 머슴은 기절해 있었다. 그를 일깨워 사정을 들은 인어용은 내일은 꼭 성공하기로 권하고 다짐을 받았다.
이튼 날이 되어 어제와 마찬가지로 싸움은 절정에 달하였다. 머슴은 있는 힘을 다하여 ‘야 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매우 가느다란 목소리였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임하소의 용은 헛눈을 팔았다. 그 순간 인어용은 임하용의 목덜미를 힘껏 물어뜯어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 때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소녀는 이제 승천하겠아오니 낭군님은 급히 짐을 꾸려 뒷산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시오. 천지는 물바다가 되고 그 후 이곳에는 넓은 들판이 생기게 될 테니 그 토지에서 농사를 짓게 될 것입니다’ 라고 전하면서 승천하였다. 날이 새자 뒷산으로 올라 간 머슴은 토지를 얻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 머슴은 마가(馬哥)였으므로 마가의 들(野)이라 불리게 되어 속칭 마뜰이라 하였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상(龍上), 인어용이 사람으로 나타난 물가 언덕이라 하여 선어대(仙魚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상동은 안동시의 동쪽에 낙동강과 반변천의 삼각지류가 이룬 분지에 위치한다. 안동은 신라시대 혁거세 원년 BC57년 염상도사가 신라의 속국으로 창녕국을 세웠다. 그 후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고타야군인 것을 경덕왕 때에 고창군으로 고쳤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 3년인 929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고창군을 공격해왔다. 견훤은 후백제의 시조로서 892년에서 935년까지 재위한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바꾸었다. 아버지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장군이 된 사람이다.
930년 고창군 병산 (지금의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사곡)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싸움에서 김 행, 김선평, 장 길(장정필)등이 왕건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왕건은 김 행 공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가리켜 “능히 역사의 흐름과 기미에 밝아 권도를 먼저 예측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도로서 고려와 연합하여 신라 왕실의 원수를 갚고 도탄에 빠진 백성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하였으니 권도가 통달하였다” 했다.
그리하여 권도권자(權道權字)로 성(姓)을 내리고, 권 행 공에게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는 최고의 벼슬을 봉하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로 삼았다. 그리고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게 되니 안동 권의 본향이 안동으로 된 것이다.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은 정일품 벼슬로 정승의 윗자리이다. 아부공신(亞父功臣)은 국부(國父)의 버금가는 공신 벼슬이다. 태사(太師)는 정일품의 으뜸가는 벼슬로 왕(王)의 스승 격이라는 뜻이다. 권 행은 신라왕족이며 안동권씨의 시조이시다.
안동부는 영가군, 길주, 안동부, 안동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복주목, 다시 안동대도호부, 안동도, 안동관찰부를 거쳐 1896년에 안동군으로 고치면서 1060년간의 안동 땅에서 출발하여 1931년 안동면이 안동읍으로, 1963년 1월 1일 다시 안동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1일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다시 안동시로 발족되었다. 또한, 안동은 고려 공민왕이 1361년 12월 임진(壬辰)일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蒙塵 : 임금이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감)한 곳이다. 1362년 2월 신축(辛丑)일에 개성으로 돌아가기까지 70일 동안 머문 곳으로 고려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홍건적 침입 때 안동이 임시수도로 선택된 배경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외적 침입시 안전한 지리적 조건과 군량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민왕은 영남으로 몽진을 하며 적절한 보장처를 물색하다가 왕을 반기고 맞이하는 태도에 이끌려 안동을 임시수도로 정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공민왕 몽진 후 안동 인물들이 활발히 중앙에 진출하였으니 안동권씨와 안동김씨였다. 이로 인해 안동이 중앙무대에서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동시의 용상동은 주택단지를 확장 형성하여 아파트가 건립되는 등 인구가 급증하여 3만을 넘는 거대 동으로 변하였다. 용상동에는 과거에 전매청의 담배원료 공장이 있었고, 육군 제36사단 비행장이 위치하였다. 이 두 토지를 곁으로 안동교도소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번하게 범람하는 낙동강의 홍수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도시계획이 확장되면서 많은 국유재산을 매각하였다.
현재 각급 기관이 대부분 용상동에 자리한다. 중앙행정기관의 하부기관인 통계청, 보훈지청, 조달청이 소재하고, 의료기관으로 종합병원인 안동병원과 여성전문병원, 7개의 전문의 병원과 2개의 한의원, 7개의 약국이 있다. 4개의 금융기관과 정부공기업으로 한국통신과 근로복지공단, 한국수자원공사 등 지방청이 위치한다. 안동댐 아래에 민속박물관, 태조왕건 촬영 셋트장이 있다. 한편 용상동과 접하는 송천동에는 교육기관으로 국립 종합대학인 안동대학교가 있다.
용상동의 낙동강 둔치에는 테니스장과 축구장 등 운동시설이 있다. 안동댐과 반변천에 낚시터 등이 두루 자리한다. 안동시의 행정구역 중에서도 용상동은 행정․교육․보건․문화․노동․여가 등 전반을 겸비한 우수한 중심지이다. 북부지방의 거점도시인 안동시 지역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우수한 삶의 질 향상에 바탕을 둔 지역 주민의 생활에도 손색이 없는 동으로 손꼽힌다. 지금 용일회, 마뜰의 초석이다.
글 : 재구 용일회 권영시(자유기고가)
마뜰 예찬 2- < 찔레꽃 붉게 피는 이야기>
낙동강에 합류되는 반변천(半邊川)의 발원지는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일월산(해발1,211m)이다. 태생지를 떠나면서 빼어난 경관을 수없이 뒤로하고 유유히 흘러 임하댐에 잠시 저지당한다. 그렇지만 일부는 도수로를 통하여 영천의 자양댐으로 유입되어 다시 금호강으로 이어지고, 자양댐에서 일부는 경주시 강동면에 위치한 안계댐을 거쳐 포항의 공업용수로도 각각 진로를 바꾼다. 113km의 거리 길다면 긴 여정의 반변천, 경북 안동시 용상동을 마지막으로 소리 없이 낙동강과 한 몸을 이룬다. 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 마치막 경치로는 선어대(仙魚臺)를 거친다. 안동시 용상동과 송천동의 경계지점에서 휘어진 강물이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절경을 이룬 곳이다.
이곳 강물이 휘감아 도는 도로변 언덕배기에는 노령목의 모감주나무 한 그루가 꽃으로 노란 빛을 발한다. 여름철 아스팔트 열기를 노랗게 식혀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여기에서 안동대학 방면 길의 산비탈이다. 너덧 평의 자리에서 찔레나무가 하얀 꽃을 피웠다(2001년 8월 5일). 5~6월의 개화시기를 상실한 이 꽃의 모습이 특이했다.
한 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는 유행가가 전국을 누볐지만 어디쯤의 남쪽나라인가. 과연 붉게 핀 찔레꽃이 있을까. 아니면 상상의 꽃 색깔인지 되묻고 싶다.
그러나 지금 선어대의 비경은 아쉬울 따름이다. 이곳을 지나는 국도는 급커브로 늘 교통사고로부터 위험한 장소였다. 선어대를 기점으로 도로 확장과 선형을 변경한 직선화 교량건설이 진행 중이다(2007. 8 현재).
필자의 희귀수목이나 군락지의 발견은 당시마다 언론에 보도된다. 한편의 기사를 보신 동료 K과장께서 붉은 꽃 피는 찔레나무가 있다고 알려왔다. 관심 끝에 생육위치를 여쭸고, 꽃 피는 시기에 개화모습을 보여 달라는 요청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몇까지 의문점도 곁들여 여쭸다. 그랬더니 몇 년 전 친구들과 등산길에 발견하고 산에서 옮겨 왔다고 했다. 주택의 화단에 옮겼더니 해마다 붉은 찔레꽃이 만개 하고 있다며 크게 자랑하였다.
이듬해 개화기를 맞았다. 2007년 5월 중하순 어느 날, 태양은 대지를 향해 무더운 열을 가하고 있었다. 잊지 않은 K과장은 붉은 꽃이 만개한 줄기를 잘라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잎과 줄기․꽃잎의 수․꽃의 크기 모두 찔레와 똑같았다. 다만 핵심인 꽃의 색깔만이 붉은 색이었다. 처음의 의심은 변이종이 아닌 가 싶어 당초의 생육장소가 어딘지를 되물은 적이 있었다.
변이종과 교잡종, 판가름의 잣대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정확한 장소를 알려주지 않아 도입종의 장미라는 쪽으로 자신 있는 추정이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필자의 추정에 확신을 불어 넣고자 그 꽃을 들고 2년 전에 필자가 식재한 꽃송이가 크지 않는 장미꽃이 조경지로 안내하였다.
소나무 조경지 언덕에 식재한 장미가 한창 개화기를 맞았다. 직접 비견해 보여 주고 싶었다. 확인을 거친 후 도입종에 가깝다는 쪽으로 판단의 대답을 흘렸다. 그랬더니 대구에서 식물에 대한 관심과 학식이 있는 분께도 보여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장미라는 답을 받았다는 일관된 대답 뿐 이었다.
그래서 또 다시 인근에 위치한 학산(鶴山 ; 대구시 달서구 월성동, 송현동에 있는 산)으로 동행을 요구했다. 찔레꽃은 이미 개화기를 지나서 꽃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산에서 내려 와 도로변 옹벽에서 자라는 찔레넝쿨을 볼 수 있었다.
찔레나무 대목에서 장미를 접붙였으나 접붙인 부위의 찔레 부정아가 넝쿨을 이루었다. 길게 자라서 늘어진 찔레는 장미넝쿨과 함께 뒤엉켰지만 비교 관찰이 가능했다. 다시 꽃의 크기가 작은 장미가 식재된 조경지로 되돌아 왔다. 이곳의 장미 역시 줄기와 잎은 찔레나무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곳 줄기의 꽃은 장미였다.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장미라고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의 장미 수입업체에 전화를 걸어 함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미지사진을 메일로 전송했다.
도입장미라는 회신이 왔다. 그리고 필자가 예견하고 K과장에게 건넸던 말과 똑같은 내용으로 메일이 답해 온 것이다. 자생지 즉 입지적인 여건에 따라 교잡이나 변이가 가능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생지의 위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접목이 아니거나 인위적으로 옮기지 않은 상태의 자연 속에 자생한 장미였다면 엄청난 수확으로 판단해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꽃의 상태로 보아서는 도입종에 가깝다는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말고 나무사랑에 계속적인 관심을 당부하고 메일 회신을 출력한 기록물을 전달해 드렸다.
찔레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며 각처의 산야에 자라는 낙엽관목으로 약 2m쯤 자란다. 작은 가지는 녹색이지만 겨울에 붉게 되고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5~9매의 작은 잎으로 구성되어 총엽병 좌우로 달려있는 겹잎이다. 작은 잎은 타원형 또는 계란을 거꾸로 세운 모형이며 양끝이 뾰족하고 길이 2~3cm로서 잎 테두리는 톱니 모양이다. 표면에는 털이 없으나 뒷면에는 털이 있다.
꽃은 5~6월경 가지의 끝에서 거의 같은 길이의 꽃자루가 있는 꽃이 직경 2cm내외의 백색 또는 담홍색의 꽃으로 핀다. 꽃잎이 5개씩이며 꽃받침에는 면모가 밀생한다. 열매는 장과로서 9~10월에 붉게 익는다. 상록의 양지 및 밭 언덕에 잘 자라며, 장미를 접붙이 할 때 대목으로 쓴다.
글 : 재구 용일회 권 영 시(나무와 숲 탐방가)
첫댓글 선어대(仙魚臺)와 마뜰에 관한 상세한 유래 잘 보았습니다....마가의 들(野)이라 불리게 되어 속칭 마뜰이라 불리우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상(龍上), 인어용이 사람으로 나타난 물가 언덕이라 하여 선어대(仙魚臺)라고 부르게 된 우리 고장 유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어 고맙구나~~ 임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