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까지… 인재 잡아먹는 ‘황소개구리’ 의대
과학고·영재고 지원율도 떨어뜨려
최은경 기자 윤상진 기자 입력 2023.06.17. 03:00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5~6년 전만 해도 전교 1등은 당연히 과학고나 영재고를 지원했죠. 이젠 일반고에서 1등 찍고 의대 가려는 아이들이 훨씬 많아요.”(서울 A 중학교 교무부장)
‘의대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과학 영재를 키우는 과학고와 영재고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으로 16일 나타났다. 종로학원이 최근 마감된 전국 7개 과학영재학교의 2024학년도 신입생 원서 접수 결과를 취합한 결과, 평균 입학 경쟁률이 5.86대1로 작년(6.21대1)보다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7개 학교 지원자 수는 3918명으로 전년보다 5.6% 줄었다. 중3 학생 수가 1년간 3.9%(1만7549명) 줄었는데, 지원자가 이보다 더 많이 감소한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과학고와 영재고는 지난해 신입생부터 의대에 진학하려는 학생은 대입 추천서와 진로 상담에서 제외하고, 장학금과 교육비를 환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과학고와 영재고 졸업생들이 설립 취지대로 이공계에 진학하지 않고 의대로 몰리자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중학교 상위권 학생들은 의대 입시에 불리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과학영재고 진학을 꺼린 것으로 분석된다.
과학영재학교는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해 세워졌다. 학비가 무료이고 정부 예산 지원은 일반고의 두 배 이상이다. 하지만 졸업생 절반 가까이가 의대로 가는 학교가 나올 정도로 ‘이공계 아닌 의대 입시반’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지난 3월에 교육부는 영재학교가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지 5년마다 평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의대 가는 학생이 많은 과학영재고는 학교 평가에서 점수를 깎겠다는 뜻이다. 정부와 과학영재고 모두 의대 진학에 제한을 두려 하자 중학교 학부모들은 “차라리 일반고로 가자”는 분위기라고 한다. 의대가 ‘초등생 의대반’에 이어 과학영재고 경쟁률까지 잡아먹는 교육계의 ‘황소개구리’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대 진학을 위해 고교를 자퇴하는 최상위권 학생도 늘고 있다. 한 번이라도 시험을 망치면 의대 입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아예 자퇴하고 수능(정시) 공부에 ‘다 걸기’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수능 응시생 50만8030명 중 검정고시 출신은 1만5488명(3.1%)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일각에서는 수능을 ‘메디컬 고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능이 의학 계열 학과에 진학하려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쟁 무대가 됐다는 뜻이다. ‘의대 가려면 재수·삼수는 기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범석 서울시교육청 진로직업교육과 장학사는 “대입 원서 쓸 때 성적도 안 되는데 무조건 의대 쓰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며 “본인 적성보다 부모 압박으로 지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묻지 마 의대’ 현상으로 대학도 혼란스럽다. 올해 서울대 신입생 225명이 입학하자마자 휴학했는데, 대다수가 의대나 치대를 가기 위해 반수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직장도 의대 광풍 사정권에 있다. 지난해 17년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의예과 신입생으로 입학한 40대 중반 남성의 사연이 인터넷을 달구기도 했다. 종로학원이 한국교육개발원 교육 통계 서비스를 분석한 결과, 의약 계열 대학 신입생 중 26세 이상 성인 입학자가 2017년 130명에서 2021년 582명으로 급증했다. 사회 생활을 하다가 의약 계열 전문직으로 진로를 바꾼 만학도가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정재훈 가천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의대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은 의사만큼 대우받고 성공하는 직업이 많이 나와야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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