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미지 시에 대한 담론
- 김경주의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드라이아이스」와 「외계」를 중심으로
문정완
서론
김경주는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16년 동아일보에 희곡이 당선되었다.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는 독자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기담』(2008), 『시차의 눈을 달랜다』(2009)를 펴냈으며 김경주는 시인·평론가들로부터 가장 주목 받는 2000년대 젊은 시인으로 꼽혔으며 2009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김경주의 시의 이미지는 어떤 언어의 마법에서 온 낯선 풍경 같다. 그러나 이 낯선 풍경은 단순히 ‘낯설음’으로만 마감하지 않는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김경주를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시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반서정적인 전위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광휘를 거의 ‘폭력’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김경주 “그의 시는 연극과 미술과 영화의 문법을 넘나드는 다매체적인 문법과 ‘탈문법적인 언어’의 범람”을 목격한다는 것이다. ‘탈문법적인 언어’의 범람은 김경주만의 독창적인 이미지로 구조되며 이는 2000년대 시 문학을 새로운 이미지즘의 시대로 데려간다. 김경주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드라이아이스」와 「외계」를 중심으로 하여 김경주의 시가 담아내는 미래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담론하고자 한다.
마법적 이미지와 진술 ㅡ 겹침의 미학
「드라이아이스」
―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 친다
내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 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가고 있다
귀신처럼.
「드라이아이스」는 시적 주체인 화자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실존의 고뇌를 시적 언술로 형상화시킨다. 위 본문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는 일반적 상상력을 허문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과장되거나 비현실적 허구나 공허함을 동반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대상과 사물을 가져와 그 대상과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특성을 차용,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방향으로 그 대상을 왜곡시킨다. 이 왜곡은 막연한 뒤틀림이거나 자의적인 모호성으로 훼손되지 않고 시 주제의 범주 안에서 이미지를 안착시킨다. 이는 시인이 사물과 대상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깊은 통찰 및 철학적 사유에서 연원된다.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드라이아이스」 부분
위 시에서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누구나가 번번히 경험하는 이미지다.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손으로 뒤적거리다 보면 드라이아이스를 무의식중에 만질 때가 있다. 그 결빙의 시간이 손에 쩍하고 달라붙을 때 시인은 이 순간 상황을 절묘한 상상력과 자신의 내면의 성찰에서 빚어진 철학적 사유로 이미지를 완성 시켜나간다.그러니까 화자의 손이 드라이아이스와 접속하면서 순간 쩍 손이 달라붙는 그 ‘결빙의 순간’ 화자는 드라이아이스가 자신보다 더 지독하고 처절한 외로움을 견디던 중이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시인의 이러한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은 김경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관념적 이미지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육체성을 가진 이미지로 거듭나게 하고 나아가 김경주의 관념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시적 자궁’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이미지들을 출산하게 한다.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 친다
내 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 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드라이아이스」 부분
위 예로서 이 부분은 관념적 시행들이 배치된 시적 공간이다. 「드라이아이스」는 이 외에도 절묘하게 배치된 이미지와 화자의 진술이 접점 하면서 시의 행마를 완주시킨다. 전문과 예문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경주는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시상,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언어가 가져다주는 선율, 그 예술적 관념을 잡아채려 그는 언어의 절벽을 기어오른다. 외계, 우주, 더 넓은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려 했고 상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경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특유의 감각적 언어와 저음의 감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일상적 언어의 몸을 벗고 늘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새로운 육체를 부여하고 재배치시킨다. 그 결과적 효과로 김경주만의 시적 상상력과 마법적 언어는 신선함과 독창성,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마력 같은 ‘매혹의 힘’으로 시적 공간 전면에 자장으로 나타난다.
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외계」전문
시에서의 이미지는 세계에 대한 1차적 모방과 표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와 감각적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다. 김경주의 시의 이미지는 바로 모방되고 재현된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고 감각적인 명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쉬운 예로써 말하면 “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에서 바람은 형체를 가지지 않은 피부로 감각을 할 수는 있지만 손으로 바람을 만지거나 잡을 수는 없다. 여기서 김경주는 ‘진흙 같은’ 바람으로 그 무형의 바람에 ‘시의 육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에서도 드라이아이스를 통해 ‘결빙의 시간’이란 관념적 시간을 ’감각적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김경주의 이미지는 운동하고 새롭게 생성되어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고 재생산하여 형상화시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외계」에서 양팔이 없이 태어난 화가의 모습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화가는 입에 붓을 문채 종이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을 그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붓놀림은 다른 어느 화가의 붓과는 다른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한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아주 먼 곳까지 갔다 온다” 는 것은 그의 양팔이 없는 모습처럼 평범한 것과는 다르고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팔없이 태어났다는 건 삶에 적응하기 힘든 태생적인 치명적 결함이다.
그는 삶의 바깥, 멀리서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바람처럼 떠돈다. 그 바깥, 세상 바깥에서 화가는 오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하나를” 희구할 뿐이다.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상, 누구도 움켜쥐지 못한 선율, 그 예술을 잡아채려 그는 절벽에 기어 올라가 몇 달이고 입 벌린 채 있곤 한다. 외계, 우주, 더 넓은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려 한다. 바람은 시이며 음악이며 영혼이다. 이 세상 밖이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이기도 하다. 생명의 기원이기도 한 외계. ‘절벽’은 그 외계를 향해 뚫린 유일한 구멍이다. 그리고 유일한 숨이다. 위의 분석처럼 시들에는 어딘가 차분함과 황량함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김경주가 이미 삶을 존재론적인 어떤 것, 즉 약동하는 것들이 결국엔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에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며 「드라이아이스」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결국 삶을 마주함에 있어서 일종의 어색함과 외로움을 형성한다.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탐구하며 「외계」의 불구와 같은 기괴한 이미지들을 생성해 내고 외로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들을 완성해 낸다.
김경주의 시들은 위험한 상상의 시도를 하며 아슬아슬한 순간과 언어의 밀당을 펼쳐놓지만 서툴지 않았고 지나치게 침착하여 시의 긴장성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반복 통용되는 일상의 언어를 벗어던지고 ‘시의 몸’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그 의미에서 그의 시들은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찬사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들은 한편의 다른 시선으로서는 불편하고 모호할 수 있다.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으며 언어는 때론 차갑고 미지의 세계처럼 낯설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혼란스러운 전달 방법은 처음 김경주 세계에 들어온 사람에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소통이 바로 김경주 세계의 매력이다. 세상에 없는 계절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이 시집에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복 시인은 무한화서에서 “예술은 불화에서 나온다. 불화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피상적인 사고를 피하는 길이다. 자신과 불화하고 세상과도 불화하고 오직 시하고만 화해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라고 일성을 가했다. 이성복 시인의 말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예술은 불화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왜 예술은 불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뇌구조는 자동화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동화라는 연상구조는 일찍 인류가 자연법칙에서 살아남기 위해 습득한 자기방어기제다. 예를 들어 물고기하고 말하면 물고기와 관련된 모든 대상이 연상되고 떠오르는 것처럼 이 자동화 구조는 예술과는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자동연상은 예술의 행위에서 새로운 현상과 인식을 불러내지 못하며 새로운 현상과 관계를 맺는 것에 방해작용을 일으킨다. 예술은 불화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미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는 말과 동일선상에 있다 볼 수 있다. 즉 사고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김경주의 시는 모든 일상어와 불화한다. 모든 일상어에 폭력을 가한다. 언어의 기존 의미망을 탈주한다. 사실 열거한 이 3가지의 말은 서로 내통한다. 즉 같은 말이라는 뜻이다. 경주의 시는 일상의 범주를 거부하고 일상의 범주를 자기만의 세계로 재구성 재편집하여 자기만의 독창적 시세계를 구축한다. 김경주의 이미지는 외계이면서도 실존하는 현상이다. 그는 실존하는 현 세계를 외계적 마력으로 담아 낸다는 간단한 범주 안에서 그는 언어의 절벽을 기어오른다.